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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승유의 「그녀는 거의 자기집에 있는 것 같았다」 감상 - 고광식

그녀는 거의 자기집에 있는 것 같았다 임승유 어디에 있었어 부엌 책상 위 하얀색 바구니에 그 바구니라면 내가 어제 비누칠까지 해가며 씻은 후에 오후 햇볕에 말려서 올려 놓은 것 그 전에는 베란다 한 구석에서 겨울을 났지 그 전에는 서로 다른 세 가지 색깔의 꽃을 피워내던 화초가 심겨 있었고 그 전에는 요즘엔 안 쓰는 그린 초크가 가득 담겨 있어서 내가 쏟아낸 것 더 전에는 내가 모르는 것 모르겠어 그게 어쩌다 거기 들어가 있었는지 ―《아토포스Atopos》 2023 여름호 ................................................ 시적 화자가 “어디에 있었어” 묻는다. 장소성을 묻는 이 물음은 구체적이고 독특한 곳을 지칭한다. 네가 있었던 그곳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장소..

해설시 2023.08.29

다시 자전거를 타고

올 여름은 유례없이 긴 장마에다 강수량도 많았고 유난히 더웠다. 아직도 낮에는 33도를 오르내리고 있다. 더위를 피하여 아내와 나는 산가에 머물면서 텃밭 일을 하고 볼일이 있을 때만 가끔 시내에 나오곤 했었다. 어제는 참깨를 쩌서 비닐하우스 안에다 세워 두었고, 지난주에는 김장배추도 모종했다. 익은 고추를 따서 고추 건조용 미니 비닐하우스에다 넣어 두었으므로 며칠은 따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텃밭 일이 좀 한가해졌고 조석으론 제법 서늘해서 어제 시내로 나왔다. 산가에 머무는 동안 자전거를 타지 못해서 탄탄하던 허벅지 근육이 많이 풀린 느낌이다. 지난봄에 함께 자전거를 타다가 팔이 부러진 아내는 이제 많이 나았지만 아직 오른팔을 맘대로 쓰지 못하고 있다. 완치가 된다 해도 앞으로는 겁이 나서 자전거를 타지..

텃밭 일기 2023.08.26

새로운 기쁨 - 유계영

새로운 기쁨 유계영 ​ ​ 그런 나라에는 가본 적 없습니다 영화에서는 본 적 있어요 나의 경험은 아침잠이 많고 새벽에 귀가합니다 잎사귀를 다 뜯어먹힌 채 돌아옵니다 안다고 말하고 싶어서 차바퀴꿈은 많이 꿉니다 황봉투에 담긴 얇고 가벼운 꿈인데 ​ 낮에는 구청 광장에 우두커니 서서 감나무를 올려다보았습니다 까치가 까치밥을 쪼는 것을 보고 밤에는 하염없이 영화를 보았습니다 트빌리시 바르샤바 베오그라드 그런 도시에는 가본 적이 없고 ​ 까치가 나뭇가지를 툭 차면서 날아가는 것은 낮에 본 것 미치지 않고서야 미치지 않고서야 그러는 것같이 팔이 떨어져라 흔들리는 잎사귀들이라면 밤에 본 것 ​ 나의 경험은 내내 잠들어 있습니다 다시는 일어날 마음이 없어 보입니다 죽어서도 보고 있다면 죽은 것이 아닌데 자꾸 보고 있..

내가 읽은 시 2023.08.25

한참이나 물끄러미 쳐다본다 - 조성국

한참이나 물끄러미 쳐다본다 조성국(1963~ ) 산불에 타면서 꿈적 않고 웅크린 까투리의 잿더미 요렁조렁 들추다 보니 꺼병이 서너 마리 거밋한 날갯죽지를 박차고 후다닥 내달린다 반 뼘도 안 되는 날개 겨드랑이 밑의 가슴과 등을 두르는 데서 살아남은 걸 보며 적어도 품이라면 이 정도쯤은 되어야지, 입안말하며 꽁지 빠지게 줄행랑치는 뒷덜미를 한참이나 물끄러미 쳐다본다

내가 읽은 시 2023.08.22

기억을 버리는 법 - 김혜수

기억을 버리는 법 김혜수 버리자니 좀 그런 것들을 상자 속에 넣어 높은 곳에 올려놓는다 가끔 시선이 상자에 닿는다 쳐다보고만 있자니 좀 그런 것들을 더 큰 상자에 넣어 창고 속에 밀어버린다 창고 속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모서리가 삭아내리는 것들 자주 소멸을 꿈꾸며 닳아 내부조차 지워져버린 것들 가끔 생각이 창고에 닿는다 고요한 어둠 속에서 점차 생각조차 희박해지고 창고를 넣을 더 큰 상자가 없을 때 그때 상자 속의 것들은 버려진다 나도, 자주, 그렇게 잊혀갔으리라 ―『이상한 야유회』 (창비 2010)

내가 읽은 시 2023.08.19

와이퍼 - 차성환

와이퍼 차성환 희곡을 쓰는 사람을 길에서 만났다. 오래전에 그가 해준 찐득한 토마토파스타 냄새가 떠올랐다. 쌍둥이가 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는데 옆에 쌍둥이가 서 있다. 어딘가를 급히 가는 길이라고 했다. 모두다 어디론가 간다. 악수를 하면서 차시인 언제 보지요, 하지만 언제 볼 생각은 없어 보인다. 서로 안부를 묻고 둘은 서둘러 차에 탔다. 운전석과 조수석에 동시에 탔는데 누가 희곡을 쓰는 사람인지 헷갈렸다. 누가 형인지 동생인지 물어볼 수도 있었는데 결정적인 실수를 한 것 같다. 눈꼬리가 약간 올라간 쪽이 형일 거야. 그는 약간 못되게 생겨먹었으니까. 중얼거리며 한손으로 흔들다가 아쉬운 마음에 다른 손도 번쩍 들어 똑같은 속도로 안녕, 하고 흔들었다. ― 『딩아돌하』, 2023, 여름.

내가 읽은 시 2023.08.02

폭설 카페 - 전영관

폭설 카페 전영관 북방으로 떠나기 맞춤인 날이다 눈송이를 헤아리는 당신에게 탁자에 흥건한 커피 향을 준비하라고 눈짓한다 솔개처럼 날아갈 생각을 했다 활공이란 허공을 미끄러지는 새들의 기법 눈 내리는 날의 생각들은 위험해도 푹신하다 나의 북방은 안온할 것 발정에 겨운 수컷 순록들이 뿔 부딪는 소리에 하르르 자작나무 가지의 설화(雪花)가 쏟아지는 곳 우리의 북방은 분주할 것 어둠 속으로 살금거리는 들짐승들 사이 어미 여우가 꼬리로 가만가만 젖먹이들 칭얼거림을 덮어 재우는 곳 당신은 아내여서 북방의 끼니를 예감하는지 눈빛 자욱하다 눈구경 하느라 창가에 서 있다가 순록에게 배운 듯 우쭐거리며 자리로 돌아온다 토끼나 쫓다가 도끼마저 잃어버린 나무꾼처럼 자발없이 웃어본다

내가 읽은 시 2023.08.02

이수명의 「체조하는 사람」 해설 - 송승환

체조하는 사람 이수명 나에게 체조가 있다. 나를 외우는 체조가 있다. 나는 체조와 와야만 한다. 땅을 파고 체조가 서 있다. 마른 풀을 헤치고 다른 풀을 따라 웃는다. 사투리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다. 대기의 층과 층 사이에 체조가 서 있다. 나는 체조를 따라 자꾸 미끄러지는 것일까 나는 체조를 떠나지 않고 나는 구령이 터져 나온다. 체조는 심심하다. 체조가 나에게 휘어져 들어올 때 나는 체조를 이긴다. 체조는 나를 이긴다. 아래층과 위층이 동시에 떨어져 나간다. 나는 참 시끄럽다. 내가 체조를 감추든가 체조가 나를 감추든가 해야 했다. 그렇게 한 번에 화석화된 광학이 있다. 거기, 체조하는 사람은 등장하지 않는다. 체조는 나에게 없는 대기를 가리켜 보인다. 무너지느라고 체조가 서 있다. ―시집 『마치』..

해설시 2023.0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