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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비사막 어머니

고비사막 어머니 김사인 1 잘 가셨을라나. 길 떠나신지 벌써 다섯해 고개 하나 넘으며 뼈 한자루 내주고 물 하나 건너면서 살 한줌 덜어주며 이제 그곳에 닿으셨을라나. 흙으로 물로 바람으로 살과 뼈 터럭들 제 갈 길로 보내고 당신만 남아 잠시 호젓하다가 아니, 아무것도 아닌 이게 뭐지, 화들짝 놀라시다가 그 순간 남은 공부 다 이루어 높이 오른 연기처럼 문득 흩어지셨을까. 2 어디 가 계신가요 어머니. 이렇게 오래 전화도 안 받으시고 오늘 저녁에는 돌아오세요. 콩국수를 만들어주세요. 수박도 좀 잘라주시고 제 몫으로 아껴둔 머루술도 한잔 걸러주세요. 술 잘하는 아들 대견해하며, 당신도 곁에 앉아 찻숟갈로 맛보세요 나는 이렇게만 해도 취한다 하시며. 어머니, 머리도 좀 만져봐주세요 손도 좀 잡아주세요 그래, ..

김사인 2015.11.15

좌탈(坐脫)

좌탈(坐脫) 김사인 때가 되자 그는 가만히 곡기를 끊었다. 물만 조금씩 마시며 속을 비웠다. 깊은 묵상에 들었다. 불필요한 살들이 내리자 눈빛과 피부가 투명해졌다. 하루 한번 인적 드문 시간을 골라 천천히 집 주변을 걸었다. 가끔 한자리에 오래 서 있기도 했다. 먼 데를 보는 듯했다. 저녁별 기우는 초겨울 날을 골라 고요히 몸을 벗었다 신음 한번 없이 갔다. 벗어둔 몸이 이미 정갈했으므로 아무것도 더는 궁금하지 않았다. 개의 몸으로 그는 세상을 다녀갔다.

김사인 2015.11.15

8월

8월 김사인 긴 머리 가시내를 하나 뒤에 싣고 말이지 야마하 150 부다당 들이밟으며 쌍, 탑동 바닷가나 한바탕 내달렸으면 싶은 거지 용두암 포구쯤 잠깐 내려 저 퍼런 바다 밑도 끝도 없이 철렁거리는 저 백치 같은 바다한테 침이나 한번 카악 긁어 뱉어주고 말이지 다시 가시내를 싣고 새로 난 해안도로 쪽으로 부다당 부다다다당 내리꽂고 싶은 거지 깡소주 나발 불듯 총알 같은 볕을 뚫고 말이지 쌍,

김사인 2015.11.15

뵈르스마르트 스체게드

뵈르스마르트 스체게드 김사인 다음 생은 노르웨이쯤에서 살겠네. 바다를 낀 베르겐의 한산한 길 인색한 볕을 쬐며 나, 당년 마흔일고여덟 배불뚝이 요한센이고 싶네. 일찍 벗어진 머리에 큰 키를 하고 청어와 치즈 덩어리를 한 손에 들고 좀 춥군, 어시장 냉동탑 그림자 더욱 길어질 때 늘어나 덜걱거리는 헌 구두를 끌며 걸으리. 브뤼겐 지나 어시장 옆 좌판에서 딸기와 버찌도 좀 사겠네 싱겁게 몇낱씩 눈이 날리는 저녁. 성당 지나 시장 골목 입구도 좋고 오래된 다리 부근도 좋고 새벽 두시 숙소를 못 찾은 부랑자가 윗도리를 귀 끝까지 올리는 시간 다리 옆 둔덕을 타고 비틀비틀 강가로 내려가는 그 사내이겠네. 미끄러질 듯하지만 절대 넘어지지 않지. 적막 속의 새로 두시 물결만 강둑에 꿀럭거려 취해 흔들거리며 오줌을 누..

김사인 2015.11.15

바짝 붙어서다

바짝 붙어서다 김사인 굽은 허리가 신문지를 모으고 상자를 접어 묶는다. 몸빼는 졸아든 팔순을 담기애 많이 헐겁다. 승용차가 골목 안으로 들어오자 바짝 벽에 붙어선다 유일한 혈육인 양 작은 밀차를 꼭 잡고. 고독한 바짝 붙어서기 더러운 시멘트 벽에 거미처럼 수조 바닥의 늙은 가오리처럼 회색 벽에 낮고 낮은 저 바짝 붙어서기 차가 지나고 나면 구겨졌던 종이같이 할머니는 천천히 다시 펴진다. 밀차의 바퀴 두개가 어린 염소처럼 발꿈치를 졸졸 따라간다. 늦은 밤 그 방에 켜질 헌 삼성 테레비를 생각하면 기운 씽크대와 냄비들 그 앞에 선 굽은 허리를 생각하면 목이 멘다 방 한구석 힘주어 꼭 짜놓았을 걸레를 생각하면.

김사인 2015.11.15

달팽이

달팽이 김사인 귓속이 늘 궁금했다. 그 속에는 달팽이가 하나씩 산다고 들었다. 바깥 기척에 허기진 그가 저 쓸쓸한 길을 냈을 것이다. 길 끝에 입을 대고 근근이 당도하는 소리 몇낱으로 목을 추겼을 것이다. 달팽이가 아니라 도적굴로 붙들려간 옛적 누이거나 평생 앞 못 보던 외조부의 골방이라고도 하지만, 부끄러운 저 구멍 너머에서는 누구건 달팽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 안에서 달팽이는 천년쯤을 기약하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고 한다. 귀가 죽고 귓속을 궁금해할 그 누구조차 사라진 뒤에도 길이 무너지고 모든 소리와 갈증이 다한 뒤에도 한없이 느린 배밀이로 오래오래 간다는 것이다. 망해버린 왕국의 표장(標章)처럼 네개의 뿔을 고독하게 치켜들고 더듬더듬 먼 길을.

김사인 2015.11.15

팔공산에 올라

11시에 부인사 동쪽 등성이를 따라 등산을 시작하여 '이말재'를 거쳐 두 시간 만에 팔공산 주능선에 올라섰다. 동봉과 서봉은 몇 년에 한번씩은 올라왔었지만 이 능선에 오르기는 한 십 년 만인 것 같다. 가뭄 탓인지 단풍은 그다지 곱지 않고 황사 때문에 시야도 많이 흐리지만, 평일이라 호젓해서 좋다. 그 옛날, 아버지를 따라 지게 지고 나무하러 다니고 동네 아이들과 소먹이러 다니던 골짜기들이 한눈에 다 들어온다. 저기 동쪽으론 톱날바위와 서봉과 비로봉이 눈앞에 보이고, 돌아보면 내가 올라온 등성이도 보인다. 이쯤에서 메고 온 단감과 막걸리로 목을 좀 축여도 되겠다. 서봉과 비로봉을 거쳐 동봉에서 일몰의 광경을 보고 내려가려고 한다.

텃밭 일기 2015.10.23

연못 파기

오늘은 팔공산 주능선을 종주해보려고 생각하다가 그건 단풍이 더 드는 며칠 후로 미루고, 텃밭에다 작은 연못을 하나 만들기로 했다. 도랑물이 흘러 나오도록 만들어진 밸브 앞쪽 토란밭 머리에 삽, 괭이, 곡괭이를 사용하여 땅을 팠다. 서너 시간 땀을 흘려, 가장 깊은 곳은 1m쯤의 깊이가 되도록 파고나서, 도랑물로 담수를 하니 수면 넓이가 한 평은 좋이 되는 것 같다. 한 평이라는 면적이 이토록 넓은지, 물의 양은 또 얼마나 많은지 오늘 실감하였다. 이리하여 반달 모양의 작은 연못이 하나 한반도의 아래쪽 팔공산 자락에 새로이 생겼다. 이 둠벙은 텃밭에 물을 줘야 할 때 조금씩 내려오는 도랑물을 미리 받아 두어 시간을 절약할 목적으로 만들었지만, 내게는 그밖에 욕심이 하나 더 생겼다. 앞으로 두고봐서 누수가 ..

텃밭 일기 2015.10.15

분갈이

오늘은 점심도 걸러가며 난의 분갈이를 했다. 작년 이맘때 시험삼아 일지출과 상원황에 양파주머니 내복을 입혀보았었는데, 오늘 보니까 확실히 뿌리의 발육 상태가 좋다. 화분 내부의 통기성이 훨씬 좋아진 결과다. 그래서 올해는 모든 화분에 이 방법을 적용하여 분갈이를 했다. 양파주머니 내복법이란, 작은 크기의 양파주머니를 화분 깊이에 맞춰 통째로 잘라 화분 내벽에 두르고 그 안에다 난과 난석을 넣는 방법이다. 아파트 베란다의 열악한 환경에서 애란인들의 가장 큰 난제가 바로 뿌리썩음이라, 그것을 개선해보고자 내가 독창적으로 고안한 방법이다. 앞으로 우리집 난은 뿌리가 썩지 않고 튼튼하게 자랄 것으로 자못 기대된다. 분갈이를 해주고 나니 난들이 즐거워하고 내게 고마워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마땅히 해야할 일을..

텃밭 일기 2015.0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