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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옥관 「노래의 눈썹」 해설 - 김상환

새의 발가락보다 더 가난한 게 어디 있으랴 지푸라기보다 더 가는 발가락 햇살 움켜쥐고 나뭇가지에 얹혀 있다 나무의 눈썹이 되어 나무의 얼굴을 완성하고 있다 노래의 눈썹, 노래로 완성하는 새의 있음 배고픈 오후, 허기 속으로 새는 날아가고 가난하여 맑아지는 하늘 가는 발가락 감추고 날아가는 새의 자취 좇으며 내 눈동자는 새의 메아리로 번져나간다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장옥관 시집, 문학동네 2022) 이 한 편의 시 「노래의 눈썹」(A Song's Eyebrows)은 ‘아심토트’(Asymptote. 영어권을 비롯한 세계적인 번역문학저널 플랫폼)에 소개된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이 시는 기본적으로 몸과 언어의 공능(功能)을 은유의 방식을 통해 구현하고 있다. 은유는 ‘하나의 패턴’으로 서로 다른 것들의 ..

해설시 2024.10.31

뒤척이다 - 천양희

뒤척이다   천양희(1942~ )     뒤척이다   허공을 향해   몸을 던지는 거미처럼   쓰러진 고목 위에 앉아   지저귀는 붉은가슴울새처럼   울부짖음으로 위험을   경고하는 울음원숭이처럼   바람 불 때마다 으악   소리를 내는 으악새처럼   불에 타면서 꽝꽝   소리를 내는 꽝꽝나무처럼    남은 할 말이 있기라도 한 듯   나는 평생을   천천히 서둘렀다

내가 읽은 시 2024.10.30

옛 산길을 걸으며

멀리서 팔공산을 쳐다보면 단풍이 중턱까지는 내려온 것 같다. 중턱까지 내려왔다는 것은 비로봉이나 동봉과 서봉 등의 주봉과 주능선에선 이미 단풍이 졌거나 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순환도로나 고향마을에도 단풍이 금방 내려올 것이다. 물론 단풍이 등고선을 따라 횡대로 줄을 서서 손을 잡고 내려오는 것은 아니다. 산에 자생하는 단풍과는 종이 다른 순환도로의 단풍나무는 대부분이 이미 물들었으며, 산가 마당의 감나무는 벌써 잎이 거의 다 떨어진 상태다. 아무튼, 오늘은 그 팔공산의 단풍을 구경할 겸 옛 산길을 걸으며 추억 속으로 한번 들어가보고 싶어서 아침에 집을 나섰다. 먼저 산가 마당에 주차를 하고, 며칠 전에 쪄서 비닐하우스 안에다 널어둔 콩대를 뒤집어 주고, 집에서 챙겨온 점심이 든 작은 배낭을 메고 등..

텃밭 일기 2024.10.29

『사물들과 철학하기 - 어떤 철학 경험』 중에서 - 공산

사발   (...) 여기 최초의, 본래의 물건이 있다. 그 물건은 인간의 출현을 나타낸다. 다 자란 원숭이들은 몽둥이와 돌 등, 무기와 도구를 대신할 수 있는 것들을 가진다. 사발이 아니라. 오직 인류와 함께 공기, 호리병, 사발, 주발들이 태어난다.   사발은 담는 역할을 개시한다. 근본적으로 사발은 안심하게 해준다. 이 용기는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끝없는 유출을 중단시킨다. 흩어짐을 막아 주는 것이다. 그것은 쏟아붓기를 중단시키고 유출을 멈추게 한다. 필연적으로 흘러나가 유실되도록 예정된 액체가 저장된다. 손보다 더 낫다. 지속적이고 힘도 들지 않는다.   (...) 불가의 승려들이 다 버려도 보시 사발 한 그릇만은 지녔던 데에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거의 집을 대신..

고방 2024.10.28

한강의 「북향 방」 감상 - 유희경

북향 방   한 강     봄부터 북향 방에서 살았다    처음엔 외출할 때마다 놀랐다   이렇게 밝은 날이었구나    겨울까지 익혀왔다   이 방에서 지내는 법을    북향 창 블라인드를 오히려 내리고   책상 위 스탠드만 켠다    차츰 동공이 열리면 눈이 부시다   약간의 광선에도    눈이 내렸는지 알지 못한다   햇빛이 돌아왔는지 끝내   잿빛인 채 저물었는지    어둠에 단어들이 녹지 않게   조금씩 사전을 읽는다    투명한 잉크로 일기를 쓰면 책상에 스며들지 않는다   날씨는 기록하지 않는다    밝은 방에서 사는 일은 어땠던가   기억나지 않고   돌아갈 마음도 없다    북향의 사람이 되었으니까    빛이 변하지 않는    ---------------------------------- ..

해설시 2024.10.20

한강의 「저녁 잎사귀」 감상 - 이설야

저녁 잎사귀   한 강 (1970~)     푸르스름한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밤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찾아온 것은 아침이었다    한 백 년쯤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내 몸이   커다란 항아리같이 깊어졌는데    혀와 입술을 기억해내고   나는 후회했다    알 것 같다    일어서면 다시 백 년쯤   볕 속을 걸어야 한다   거기 저녁 잎사귀   다른 빛으로 몸 뒤집는다 캄캄히   잠긴다                  —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 2013.      ------------------------------------------   소설가 이전에 시인이었던, 그녀가 ‘심장을 문지르’며 쓴 언어의 창고로 들어간다. 그 창고에서 오래된 가구의 서랍을 하나둘씩 ..

해설시 2024.10.15

굴원의 초혼과 김소월의 초혼 - 김상동

(1) 동쪽은 그대가 의탁할 수 없는 곳/ 키가 천 길인 장인국 사람은/ 오직 사람의 혼만을 찾아 먹는다네/ 열 개의 태양이 번갈아 나와/ 무쇠는 녹아 흐르고 돌도 녹아 버리지/ 그들은 모두 몸에 익어 탈이 없지만/ 혼이 가면 반드시 없어져 버린다네/ 혼이여 돌아오라/ 그곳은 그대가 의탁할 곳이 못 되느니/ (...)사람들이 다 같이 진정을 풀어놓고/ 한마음으로 시를 읊조리네/ 마시고 또 마시고 끝없이 기뻐함은/ 선조와 옛 벗으로 유쾌해서라네/ 혼이여 돌아오라/ 어서 그대의 옛집으로 돌아오라 (2)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어!/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붉은 해는 서산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시론, 시인론 2024.10.12

도착 - 문정희

도착   문정희 (1947~)     이름도 무엇도 없는 역에 도착했어   되는 일보다 안 되는 일 더 많았지만    아무것도 아니면 어때   지는 것도 괜찮아   지는 법을 알았잖아   슬픈 것도 아름다워   내던지는 것도 그윽해    하늘이 보내준 순간의 열매들   아무렇게나 매달린 이파리들의 자유   벌레 먹어   땅에 나뒹구는 떫고 이지러진   이대로   눈물나게 좋아   이름도 무엇도 없는 역   여기 도착했어

내가 읽은 시 2024.10.11

지금 오는 이 이별은 - 박규리

지금 오는 이 이별은 박규리 이 나이에 오는 사랑은 다 져서 오는 사랑이다 뱃속을 꾸르럭거리다 목울대도 넘지 못하고 목마르게 내려앉는 사랑이다 이 나이에 오는 이별은 멀찍이 서서 건너지도 못하고 되돌이키지도 못하고 가는 한숨 속에 해소처럼 끊어지는 이별이다 지금 오는 이 이별은 다 져서 질 수도 없는 이별이다 ―『이 환장할 봄날에』 2004

내가 읽은 시 2024.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