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의 시 84

시인이란 누구인가 - 타데우시 루제베치

시인이란 누구인가 타데우시 루제베치(Tadeuz Ro'zewicz, 1921~2014, 폴란드 시인) 시인이란 시를 쓰는 사람이고 동시에 시를 쓰지 않는 사람이다 시인이란 매듭을 끊는 사람이고 스스로 매듭을 연결하는 사람이다 시인이란 믿음을 가진 사람이고 아무 것도 믿지 못하는 사람이다 시인이란 거짓을 말하는 사람이고 거짓에 속아 넘어가는 사람이다 넘어지는 사람이고 다시 일어나는 사람이다 시인이란 떠나가는 사람이고 결코 떠나지 못하는 사람이다 (최성은 옮김) ― 2022. 2. 12. 가창 '오퐁드부아'에서 읽음

외국의 시 2022.02.12

라이헤나우에 석양이 저물 때 - 마르틴 하이데거

라이헤나우에 석양이 저물 때(Abendgang auf der Reichenau) 마르틴 하이데거 은빛 등대불이 저 멀리 어스름한 둑길 쪽 호수로 흘러나가고, 나른한 여름 저녁 이슬 맺힌 정원에는 수줍어 구애하듯 밤이 내린다. 달빛 비치는 산마루 사이엔 오래된 옥탑 지붕 위에서 마지막으로 우짖던 새소리 걸려 있다. 밝은 여름날이 내게서 이룬 것은 내겐 결실 맺기 힘든 것, 그것은 영겁의 세월에서 오는 황홀한 운송이기에, 아주 소박한 잿빛 황무지에서 쉬고 있노라. (신상희 역)

외국의 시 2020.12.18

어느 겨울 저녁 - 게오르크 트라클

어느 겨울 저녁 게오르크 트라클(Georg Trakl) 창가에 눈이 내리고 만종이 은은히 울려 퍼지면 많은 사람들을 위해 식탁이 차려진다. 살림은 모자랄 것이 없다. 떠도는 나그네들은 어두운 좁은 길을 따라서 문으로 다가온다. 대지의 서늘한 수액을 마시며 은총의 나무는 찬연히 피어 있다. 길손은 말없이(still) 들어선다. 문턱은 이미 고뇌의 화석이 된 지 오래다. 식탁 위에는 빵과 포도주가 지순의 광명 속에서(in reiner Helle) 빛을 발하고 있다. --『들길의 사상가, 하이데거』 박찬국, 그린비출판사

외국의 시 2020.12.16

해변의 묘지 - 폴 발레리

해변의 묘지 폴 발레리(Paul Valery 1871~1945) 사랑하는 혼이여, 불후의 명성 같은 것을 얻으려 하지 말라,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의 깊이를 탐구하고자 하라. —핀다로스 「델프의 무녀들」 비둘기들 노니는 저 고요한 지붕은 철썩인다. 소나무들 사이에서, 무덤들 사이에서. 공정한 정오는 여기에서 불길로 바다를 짠다. 언제나 되살아나는 바다를! 신들의 정적에 오랜 시선을 보냄은 오 사유 다음에 찾아드는 보상이여! 섬세한 섬광은 얼마나 순수한 솜씨로 다듬어내는가 지각할 길 없는 거품의 무수한 금강석을, 그리고 이 무슨 평화가 수태되려는 듯이 보이는가! 심연 위에서 태양이 쉴 때, 영원한 원인이 낳은 순수한 작품들, 시간은 반짝이고 꿈은 지식이다. 견실한 보고, 미네르바의 단순한 사원, 고요의 덩..

외국의 시 2020.12.10

불어오는 바람 속에 - 밥 딜런

불어오는 바람 속에 밥 딜런(1941~ )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야 한 인간은 비로소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래. 그리고 얼마나 많은 바다 위를 날아야 흰 비둘기는 모래 속에서 잠이 들까? 그래. 그리고 얼마나 많이 하늘 위로 쏘아올려야 포탄은 영영 사라질 수 있을까? 그 대답은, 나의 친구여. 바람 속에 불어오고 있지. 대답은 불어오는 바람 속에 있네. 얼마나 오랜 세월을 버텨야 산은 바다로 씻겨 내려갈까? 그래. 그리고 얼마나 오랜 세월을 버텨야 어떤 이들은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 그래. 그리고 한 인간은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대체 몇 번이나 외면할 수 있을까? 그 대답은, 나의 친구여. 바람 속에 불어오고 있지. 대답은 불어오는 바람 속에 있네. 얼마나 자주 위를 올려다봐야 한 인간은 비로소 하늘..

외국의 시 2020.07.10

낙타 - 제임스 테이트

낙타 제임스 테이트 오늘 나는 정말로 이상한 것을 우편으로 받았다. 그것은 내가 사막에서 낙타를 타는 사진이었다. 그러나 나는 낙타를 탄 적이 없고 사막에 가본 적도 없다. 나는 젤라바를 입고 케피야를 두르고 장총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돋보기로 그 사진을 살펴보았다. 그건 확실히 나였다. 나는 그 사진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내가 사막에서 낙타를 타는 것은 꿈꿔본 적도 없다. 내 눈 속의 광포함으로 내가 어떤 성스러운 전쟁에서 싸우고 있는 것으로 보였는데, 거기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도 없었다. 나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이 사진을 감춰야 한다. 그들은 진짜 내가 누구인지 알면 안 된다. 나도 알면 안 된다. -------------------------- * Jellaba, 아랍식 긴 옷. * Keff..

외국의 시 2019.08.10

6월 - 이바라기 노리코

6월 이바라기 노리코 어딘가에 아름다운 마을은 없는가 하루의 일과 끝에는 한잔의 흑맥주 괭이를 세우고 바구니를 내려놓고 남자나 여자나 커다란 맥주잔을 기울이는 어딘가에 아름다운 거리는 없는가 먹을 수 있는 열매를 단 가로수가 어디까지나 잇달았고 제비꽃 빛깔의 석양은 젊은이들의 다정한 속삭임이 충만한 어딘가에 아름다운 사람과 사람의 힘은 없는가 같은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친숙함과 우스꽝스러움과 노여움이 날카로운 힘이 되어 솟아오르는

외국의 시 2019.03.01

내가 가장 예뻤을 때 - 이바라기 노리코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이바라기 노리코(茨木のり子, 1926~2006) 내가 가장 예뻤을 때 거리는 꽈르릉하고 무너지고 생각도 못한 곳에서 파란 하늘 같은 것이 보이곤 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주위의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공장에서 바다에서 이름도 없는 섬에서 나는 멋 부릴 기회를 잃어버렸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아무도 내게 다정한 선물을 주지 않았다 남자들은 거수경례밖에 몰랐고 순수한 눈짓만을 남기고 다들 떠나버렸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내 머리는 텅텅 비었고 내 마음은 무디어졌으며 손발만이 밤색으로 빛났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내 나라는 전쟁에서 졌다 이런 엉터리없는 일이 있느냐고 블라우스의 소매를 걷어 올리고 비굴한 거리를 쏘다녔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라디오에서는 재즈가 넘쳤다 담배 연기를 처음 마..

외국의 시 2019.02.25

자신의 감수성쯤 - 이바라기 노리코

자신의 감수성쯤 이바라기 노리코 ​ 바싹바싹 말라가는 마음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마라 스스로 물 주기를 게을리 해놓고 서먹스러워진 것을 친구 탓으로 돌리지 마라 유연함을 상실한 것이 어느 쪽이더냐 조바심 나는 것을 친척 탓으로 돌리지 마라 모든 것이 서투른 건 바로 나 초심이 사라지려는 것을 생활 탓으로 돌리지 마라 애초부터 나약한 마음가짐에 불과했다 안되는 것 모두를 시대 탓으로 돌리지 마라 조용히 빛나는 존엄의 포기 자신의 감수성쯤 자신이 지켜라 어리석은 자여 (임용택 옮김) —일본 현대대표시선『달에게 짖다』창비, 2018.

외국의 시 2019.0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