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의 시 78

거룩한 가을 - 게오르그 트라클

거룩한 가을   게오르그 트라클     거칠게 한 해가 끝을 맺는다.   황금빛 포도주와 정원의 열매들로.   둥글게 침묵하는 숲들은 놀랍구나   고독의 동행자들이여.    농부는 말한다, 참으로 평화롭구나.   저녁 종소리는 길고 나직하니   마지막까지 행복감을 선사하고   철새의 무리가 작별인사를 한다.    때는 사랑에게 온화한 시간,   나룻배를 타고 푸른 강물을 흘러가니   풍경과 풍경들이 차례로 아름다워라―   고요와 침묵 속에서 하나하나 사라져간다.    ―막스 피카르트 『인간과 말』(1955) 「〔14〕 말과 사물」에서

외국의 시 2025.01.04

시인이란 누구인가 - 타데우시 루제베치

시인이란 누구인가 타데우시 루제베치(Tadeuz Ro'zewicz, 1921~2014, 폴란드 시인) 시인이란 시를 쓰는 사람이고 동시에 시를 쓰지 않는 사람이다 시인이란 매듭을 끊는 사람이고 스스로 매듭을 연결하는 사람이다 시인이란 믿음을 가진 사람이고 아무 것도 믿지 못하는 사람이다 시인이란 거짓을 말하는 사람이고 거짓에 속아 넘어가는 사람이다 넘어지는 사람이고 다시 일어나는 사람이다 시인이란 떠나가는 사람이고 결코 떠나지 못하는 사람이다 (최성은 옮김) ― 2022. 2. 12. 가창 '오퐁드부아'에서 읽음

외국의 시 2022.02.12

라이헤나우에 석양이 저물 때 - 마르틴 하이데거

라이헤나우에 석양이 저물 때(Abendgang auf der Reichenau) 마르틴 하이데거 은빛 등대불이 저 멀리 어스름한 둑길 쪽 호수로 흘러나가고, 나른한 여름 저녁 이슬 맺힌 정원에는 수줍어 구애하듯 밤이 내린다. 달빛 비치는 산마루 사이엔 오래된 옥탑 지붕 위에서 마지막으로 우짖던 새소리 걸려 있다. 밝은 여름날이 내게서 이룬 것은 내겐 결실 맺기 힘든 것, 그것은 영겁의 세월에서 오는 황홀한 운송이기에, 아주 소박한 잿빛 황무지에서 쉬고 있노라. (신상희 역)

외국의 시 2020.12.18

어느 겨울 저녁 - 게오르그 트라클

어느 겨울 저녁   게오르그 트라클(Georg Trakl)     창가에 눈이 내리고   만종이 은은히 울려 퍼지면   많은 사람들을 위해 식탁이 차려진다.   살림은 모자랄 것이 없다.    떠도는 나그네들은   어두운 좁은 길을 따라서 문으로 다가온다.   대지의 서늘한 수액을 마시며   은총의 나무는 찬연히 피어 있다.    길손은 말없이(still) 들어선다.   문턱은 이미 고뇌의 화석이 된 지 오래다.   식탁 위에는 빵과 포도주가   지순의 광명 속에서(in reiner Helle)   빛을 발하고 있다.     --『들길의 사상가, 하이데거』 박찬국, 그린비출판사

외국의 시 2020.12.16

해변의 묘지 - 폴 발레리

해변의 묘지 폴 발레리(Paul Valery 1871~1945) 사랑하는 혼이여, 불후의 명성 같은 것을 얻으려 하지 말라,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의 깊이를 탐구하고자 하라. —핀다로스 「델프의 무녀들」 비둘기들 노니는 저 고요한 지붕은 철썩인다. 소나무들 사이에서, 무덤들 사이에서. 공정한 정오는 여기에서 불길로 바다를 짠다. 언제나 되살아나는 바다를! 신들의 정적에 오랜 시선을 보냄은 오 사유 다음에 찾아드는 보상이여! 섬세한 섬광은 얼마나 순수한 솜씨로 다듬어내는가 지각할 길 없는 거품의 무수한 금강석을, 그리고 이 무슨 평화가 수태되려는 듯이 보이는가! 심연 위에서 태양이 쉴 때, 영원한 원인이 낳은 순수한 작품들, 시간은 반짝이고 꿈은 지식이다. 견실한 보고, 미네르바의 단순한 사원, 고요의 덩..

외국의 시 2020.12.10

불어오는 바람 속에 - 밥 딜런

불어오는 바람 속에 밥 딜런(1941~ )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야 한 인간은 비로소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래. 그리고 얼마나 많은 바다 위를 날아야 흰 비둘기는 모래 속에서 잠이 들까? 그래. 그리고 얼마나 많이 하늘 위로 쏘아올려야 포탄은 영영 사라질 수 있을까? 그 대답은, 나의 친구여. 바람 속에 불어오고 있지. 대답은 불어오는 바람 속에 있네. 얼마나 오랜 세월을 버텨야 산은 바다로 씻겨 내려갈까? 그래. 그리고 얼마나 오랜 세월을 버텨야 어떤 이들은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 그래. 그리고 한 인간은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대체 몇 번이나 외면할 수 있을까? 그 대답은, 나의 친구여. 바람 속에 불어오고 있지. 대답은 불어오는 바람 속에 있네. 얼마나 자주 위를 올려다봐야 한 인간은 비로소 하늘..

외국의 시 2020.07.10

낙타 - 제임스 테이트

낙타 제임스 테이트 오늘 나는 정말로 이상한 것을 우편으로 받았다. 그것은 내가 사막에서 낙타를 타는 사진이었다. 그러나 나는 낙타를 탄 적이 없고 사막에 가본 적도 없다. 나는 젤라바를 입고 케피야를 두르고 장총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돋보기로 그 사진을 살펴보았다. 그건 확실히 나였다. 나는 그 사진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내가 사막에서 낙타를 타는 것은 꿈꿔본 적도 없다. 내 눈 속의 광포함으로 내가 어떤 성스러운 전쟁에서 싸우고 있는 것으로 보였는데, 거기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도 없었다. 나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이 사진을 감춰야 한다. 그들은 진짜 내가 누구인지 알면 안 된다. 나도 알면 안 된다. -------------------------- * Jellaba, 아랍식 긴 옷. * Keff..

외국의 시 2019.08.10

어느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 - 베르톨트 브레히트

어느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 베르톨트 브레히트 성문이 일곱 개인 테베를 누가 건설 했던가? 책에는 왕들의 이름만 적혀 있다. 왕들이 손수 바윗덩어리들을 끌고 왔을까? 그리고 몇 차례나 파괴된 바빌론 그 때마다 그 도시를 누가 일으켜 세웠던가? 건축 노동자들은 황금빛 찬란한 도시 리마의 어떤 집에서 살았던가? 만리장성이 완공된 날 밤 벽돌공들은 어디로 갔던가? 위대한 로마에는 개선문이 많기도 하다. 누가 그것들을 세웠던가? 로마의 황제들은 누구를 정복하고 개선했던가? 끊임없이 노래되는 비잔틴에는 시민들을 위한 궁전들만 있었던가? 전설적인 아틀란티스에서도 바다가 그 땅을 삼켜 버린 날 밤에 물에 빠져 죽어가는 자들이 그들의 노예를 찾으며 울부짖었다. 젊은 알렉산더는 인도를 정복했다. 그가 혼자서 해냈을까? ..

외국의 시 2018.0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