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거의 자기집에 있는 것 같았다
임승유
어디에 있었어
부엌 책상 위 하얀색 바구니에
그 바구니라면 내가 어제 비누칠까지 해가며 씻은 후에 오후 햇볕에 말려서 올려 놓은 것 그 전에는 베란다 한 구석에서 겨울을 났지 그 전에는 서로 다른 세 가지 색깔의 꽃을 피워내던 화초가 심겨 있었고 그 전에는 요즘엔 안 쓰는 그린 초크가 가득 담겨 있어서 내가 쏟아낸 것 더 전에는 내가 모르는 것
모르겠어 그게 어쩌다 거기 들어가 있었는지
―《아토포스Atopos》 2023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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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화자가 “어디에 있었어” 묻는다. 장소성을 묻는 이 물음은 구체적이고 독특한 곳을 지칭한다. 네가 있었던 그곳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장소였는지를 묻는 것이다. 이처럼 타자가 있는 곳을 살펴봄으로써 화자가 안주할 장소를 탐색한다. 질 높은 생존을 위해선 환경의 중요성을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화자는 “그 전에는 베란다 한 구석에서 겨울을 났지”라고 지리적 위치와 공간을 환기한다. 화자의 물음은 익명화되어 사라진 정체성에 대한 확인이다. 언제든지 지금 여기는 정체성이 무너질 수도 있는 곳이다.
정체성을 확인하는 방식은 “그 전에는 서로 다른 세 가지 색깔의 꽃을 피워내던 화초가 심겨 있었고”처럼 간절하다. 고립된 화자의 순수 자아는 세상 밖으로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밝은 햇볕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그녀는 언제나 집 안에 갇혀 있다. 스스로 숨죽이고 있는 모습이 물화의 세계에서 비인간화되어 있다. 화자가 “부엌 책장 위 하얀색 바구니에” 있다는 것은 존재의 은폐이다. 세계라는 무한 공간에 자신도 모르게 던져진 자의 슬픔이다.
세계화 시대, 우선 장소를 달리하는 국가가 파편화되고 국가 안에서 시민은 또다시 장소를 달리한다. 그리고 한 장소에서 사는 가족도 능력에 따라 파편화된다. 이 상태에서 누군가는 쾌락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지만, 누군가는 아주 철저하게 고립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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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광식 / 시인, 문학평론가. 1990년 《민족과문학》 신인상에 시로, 2014년 〈서울신문〉신춘문예에 문학평론으로 등단. 시집 『외계 행성 사과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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