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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물원을 위하여·3 - 엄원태

이 동물원을 위하여·3 ―고라니 울음 신참인 저 고라니는 별난 부적응자인가 저녁이면 속엣것을 전부 토해 내며 제 인후부를 마구 긁어 대는 울음을 운다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서 비명처럼 저리 운다고 한다 고라니는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꿈꾸는지도 모른다 제 분수엔 턱도 없을 꿈이지만 멧돼지가 되려는 것보다는 더 그럴듯한 꿈인 건 분명하다 꿈이란 게 그런 것일지도 모르니까 지도부에게 저 울음은 꽤 거슬리는 것일 터 그 울음은 제 안의 짐승을 모두 토해 내 버리는 것일 수도 있다는 첩보에 따라 신속한 중단 조처에 처해졌고 울음은 조금 더 처절하게 며칠 이어지다 말았다 잘 운다고 고라니가 표범이나 사람이 되진 않을 텐데 이 동물원에선 그런 게 가능할지도 모른다 편 갈라 물어뜯는 것이 사람의 것인 동물원에서라면 사람의..

내가 읽은 시 2023.06.18

백일홍 편지 - 배재경

백일홍 편지 배재경(1966~ ) 어머니는 분분한 사월 85년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다 환갑을 넘긴 외사촌 형은 고모! 고모!를 부르며 꺼이꺼이 슬프게 운다 아들인 나보다 더 섧게 울어 내가 무안할 정도다 삼일장 봉분을 쌓고자 연분홍 벚꽃 잎이 우수수 날리는 도로를 달려 고향 뒷산, 아부지 옆으로 모셔졌고, 외사촌 형은 어느 사이 준비했는지 백일홍 두 그루를 봉분 앞 좌우에 심었다 우리~고모~ 좋아~하는~ 꽃~인데, 엉엉! 곡을 하며 백일홍을 심는다 우리 가족사를 모르는 분들이라면 외사촌 형이 부모상을 당한 자식 같다 나는 왜 눈물이 안 나는 것일까, 사촌 형의 곡소리가 높으면 높을수록 나는 형의 등을 토닥이며 달래기 바빴다 상주가 뒤바뀐 듯하다 그런 사촌 형은 이태 뒤 홀연히 어머니를 보러 떠났다. 형..

내가 읽은 시 2023.06.16

숲을 바라보며 - 이수익

숲을 바라보며 이수익 내가 내 딸과 아들을 보면 그들이 늘 안심할 수 없는 자리에 놓여 있는 그런 내 딸과 아들이듯이, 나무가 그 아래 어린 나무를 굽어보고 산이 그 아래 낮은 산을 굽어보는 마음이 또한 애비가 자식을 바라보듯 그런 것일까. 문득 날짐승 한 마리 푸른 숲을 떨치고 솟아오를 때도 온 산이 조바심을 치며 두 팔 벌려 안으려고, 안으려고 한다.

내가 읽은 시 2023.06.16

유기동물 보호소 - 김명기

유기동물 보호소 김명기(1969~) 버려진 개 한 마리 데려다 놓고 얼마 전 떠나버린 사람의 시집을 펼쳐 읽는다 슬픔을 더 슬프게 하는 건 시만 한 게 없지 개 한 마리 데려왔을 뿐인데 칠십 마리의 개가 일제히 짖는다 흰 슬픔 검은 슬픔 누런 슬픔 큰 슬픔 작은 슬픔 슬픔이 슬픔을 알아본다 갈피를 꽂아 두었던 시의 가장 아픈 문장에 밑줄을 긋고 나니 남은 문장들이 일제히 눈가에 젖어든다 슬픔은 다 같이 슬퍼야 견딜 수 있다

내가 읽은 시 2023.06.05

남택상-Pardonne Moi(용서하세요)

어떤 분이 카톡을 통해 동영상을 하나 보내왔다. 동영상은 배경 사진에다 자막이 올라가도록 한 것이었는데, SNS에 떠돌아다니는 그런 부류의 통속적인 내용이어서 자막을 두어 줄 읽다가 핸드폰을 꺼버렸다. 끄고 나니까 그 영상에 흐르다 내 귀에 여운으로 남은 배경음악이 생각나서 다시 핸드폰을 켜고 그 음악을 들어보았다.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어우러진 선율은 몇 번을 다시 들어도 싫증이 나지 않았다. 이 노래의 제목을 알 수는 없을까. 이 음악을 알고 있거나 제목을 찾는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모를 지인에게 나는 그 영상을 보냈다. ‘자막의 내용은 제 관심 밖입니다만 배경음악의 제목을 좀 알고 싶군요.’ 늦은 저녁 시간이기 때문인지 답이 없었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잠자리에 누워 나는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

텃밭 일기 2023.06.04

잘 가 - 박지웅

잘 가 박지웅 ​ ​ 여자의 혀는 정직하고 차가웠다 입에서 나오는 가장 낮은 온도 잘 가 마트에서 구입한 제품처럼 건넨 잘 가 나는 잘 가를 받아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앞뒤 잘린 토막의 말 잘 가는 피가 빠지는 데 몇 달이 걸렸다 몇 달째 꿈쩍하지 않는 잘 가 가끔 이름을 불러보았으나 잘 가는 선뜻 나오지 않았다 고깃덩어리로 썩어가는 잘 가를 꺼내어 몇 번 삼키려 했으나 오래된 관처럼 입이 열리지 않았다 냉장고는 온통 사후의 세계 나는 냉장고에 심장을 넣고 기다린다 내 혀는 아직 핏물이 덜 빠졌다 ​ ―시집 『나비가면』 2021

내가 읽은 시 2023.05.30

죄와 벌 - 조오현

죄와 벌 조오현(1932∼2018) 우리 절 밭두렁 벼락 맞은 대추나무 무슨 죄가 많았을까 벼락 맞을 놈은 난데 오늘도 이런 생각에 하루해를 보냅니다 ------------------- ■ 조오현(曺五鉉 1932년~2018년) 승려, 시조 시인. 경남 밀양 출생. 1958년 입산. 1968년 《시조문학(時調文學)》에 〈봄〉 · 〈관음기(觀音記)〉로 추천되어 나왔다. 주요작품에 〈설산(雪山)에 와서〉,〈할미꽃〉, 〈석엽십우도(石葉十牛圖)〉, 〈석굴암대불(石窟庵大佛)〉, 〈비슬산(琵瑟山) 가는길〉 등이 있다. 오현 스님은 2018년 5월 26일, 신흥사에 입적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조오현 [曺五鉉] (국어국문학자료사전, 1998., 이응백, 김원경, 김선풍)

내가 읽은 시 2023.05.28

왜왜 - 김상환

왜왜 김상환 德萬 아버지는 말씀하셨지요 만 벼랑에 핀 홍매가 말없이 지고 나면 무릎을 펼 수 없어 나이테처럼 방 안을 맴돌고 물음은 물가 능수버들 아래 외로 선 왜가리가 왜왜 보이지 않는지 먼 산 능선이 꿈처럼 다가설 때 두엄과 꽃이 왜 발 아래 함께 놓여 있는지 達蓮 어머니에 대한 나의 궁금은 앵두 하나 없는 밤의 우물가에 몰래 흘린 눈물 이후 단 한 번의 말도 없는 굽은 손 다시는 펼 수 없는 축생의 손가락 산수유나무 그늘 아래 먹이를 찾는 길고양이처럼 길 잃은 나는 왜 먼동이 트는 아침마다 십이지신상을 돌고 돌며 천부경을 음송하는지 좀어리연이 왜 낮은 땅 오래된 못에서 피어나는지 어느 여름 말산의 그 길이 왜 황토빛이고 음지마인지 해맞이공원을 빠져나오다 문득, 사리함이 아름답다는 생각 ―제4회(20..

내가 읽은 시 2023.05.27

프랭크 매코트의『안젤라의 재』 - 공산

늦은 나이에 자전 소설自傳小說을 써 퓰리처상을 받은 프랭크 매코트를 나는 얼마 전에 우연히 알게 되었다. 김루시아의 훌륭한 번역으로 문학동네가 출판한 그의 책『안젤라의 재』를 사려고 검색을 해보았지만 이미 절판된 지 오래되어 파는 곳이 없었다. 마침 이웃 동네의 ‘작은도서관’에 책이 있다고 검색되어서 자전거를 타고 가 빌려 와서 틈틈이 읽었다. 가난 속에서 지독한 술주정꾼인 아빠, 난로 속의 식은 재만 바라보는 불쌍한 엄마, 그리고 여러 동생들과 함께 굶주리며 어린 시절을 보낸 저자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이야기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는 1930년생이니까 1921년생, 1926년생인 나의 부모님과 거의 동시대에 살았다. 나는 그보다 한 세대 뒤에 태어났으니 그렇게 힘들게 어린 시절을 보내진 않았지..

고방 2023.0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