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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어주는 사람 - 이덕규

업어주는 사람 이덕규(1961~ ) 오래전에 냇물을 업어 건네주는 직업이 있었다고 한다 물가를 서성이다 냇물 앞에서 난감해하는 이에게 넓은 등을 내주는 그런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선뜻 업히지 않기에 동전 한 닢을 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업히는 사람의 입이 함박만해졌다고 한다 찰방찰방 사내의 벗은 발도 즐겁게 물속의 흐린 길을 더듬었다고 한다 등짝은 구들장 같고 종아리는 교각 같았다고 한다 짐을 건네주고 고구마 몇 알 옥수수 몇 개를 받아든 적도 있다고 한다 병든 사람을 집에까지 업어다 주고 그날 받은 삯을 모두 내려놓고 온 적도 있다고 한다 세상 끝까지 업어다주고 싶은 사람도 한 번은 만났다고 한다 일생 남의 몸을 자신의 몸으로 버티고 살아서 일생 남의 몸으로 자신의 몸을 버티고 살아서 그가 죽었을 때, ..

내가 읽은 시 2023.05.16

옥수수, 고추, 수박, 호박, 참외, 참깨, 고구마, 가지, 브로콜리, 양배추

아내는 아직 병원에 있고, 골절에 대한 치료를 시작한지 일주일째인 어제는 엑스레이 사진을 찍어서 중간검사를 했는데, 순조롭게 접합이 되고 있다는 소견이라고 한다. 이젠 링거와 주사도 맞지 않는데, 통증은 아직도 좀 있다고 아내는 말했다. 무엇보다도 잠을 못 자는 것이 가장 큰 고통이라서 밤에는 귀마개까지 사용해보지만 큰 효과는 없다고 한다. 어쨌든 일주일만 더 지나면 퇴원하게 될 것이고, 퇴원하면 생활의 리듬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 오늘 텃밭에서 상추잎을 따서 내일 아침에 갖다줄까, 물었더니 아내는 번거롭게 그럴 필요가 없다고 대답한다. 싱싱한 야채도 먹어야 뼈가 잘 붙지, 나의 말에 아내는 다시 상추를 갖다 달라고 한다. 나 혼자서 하자니 요즘 텃밭일이 밀리고 있다. 농약방에서 고추 모종 50포기와 수..

텃밭 일기 2023.05.12

자전거 사고事故

아내가 바람을 쐬러 나가자고 해서 접이식 자전거 두 대를 차에다 싣고 영천 금호읍까지 간 것은 그저께 아침이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타보지 못했던 길을 타기 위해 강변의 주차장에 주차를 한 후 금호강 자전거길을 상류 쪽으로 타기 시작했다. 당초에는 영천댐(자양댐)까지 자전거를 타고 왕복할 계획이었으나 실제로 와보니 생각보다 먼 길이고 노면도 그다지 평탄하지 않아서 영천시장까지만 가서 그곳의 이름난 음식인 소머리국밥을 사먹고 돌아오기로 했었다. 강둑길은 아카시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어서 향기로웠다. 그렇지만 소를 기르는 대형 축사 앞을 지나갈 때는 가축 분뇨 냄새가 잠시 코를 찌르기도 했다. 예전에 직장 친구들과 함께 부엉이 울음소리를 들으며 막걸리를 마시며 밤낚시를 하던 곳도 눈앞에 바라보였다. 그렇게 ..

텃밭 일기 2023.05.05

서시 - 이성복

서시 이성복(1952~ ) 간이식당에서 저녁을 사 먹었습니다 늦고 헐한 저녁이 옵니다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는 미끄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당신이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사방에서 새 소리 번쩍이며 흘러내리고 어두워 가며 몸 뒤트는 풀밭,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 키 큰 미루나무 사이로 잎잎이 춤춥니다

내가 읽은 시 2023.05.02

기장에 갔다가

하루 휴기를 내고 부모와 함께 바닷바람을 쐬겠다는 아들을 만나기 위해 아내와 나는 아침에 차를 몰고 집을 나섰다. 한 시간 20분을 달려 언양의 아들이 사는 아파트에 들렀다가 그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기장군 일광읍의 바닷가로 갔다. 그곳 바닷가의 한 음식점*에서 조금 이른 점심으로 전복죽을 먹었다. 전복죽은 쌉살한 성게 알이 들어 있어서 맛이 더 있었다. 전복구이를 곁들여 먹어서 배가 불렀다. 그리고 거기서 멀지 않은 바닷가의 한 카페**에서 차를 마셨는데, 오늘 들른 음식점과 카페는 모두 아들이 전에 가보았던 곳으로서 음식이나 분위기가 좋게 느껴지던 곳이란다. 카페는 이름 있는 건축가가 지은 곳이었다. 발코니나 옥상에 놓인 푹신한 소파에서 바닷바람과 전망을 즐기도록 되어 있었다. 그 카페에서는 고리 원..

귀한 마주침, 텅 빈 충만 - 엄원태

귀한 마주침, 텅 빈 충만 엄원태 목요일 늦은 오후, 텅 빈 강의실 복도에서 쓰레기통을 비우고 있는 청소 아주머니와 마주친다. 눈이 마주치자 몸피가 조그만 아주머니는 내게 다소곳이 허리 굽혀 인사를 한다. 내가 마치 ‘높은 사람’이라도 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공손한 인사. 무슨 종류일지 짐작 가는 바 없지 않지만, 아마도 어떤 ‘결핍’이 저 아주머니의 마음에 가득하여서, 마음자리를 저리 낮고 겸손하게 만든 것이겠다. 저 나지막한 마음의 그루터기로 떠받치고 품어 안지 못할 것이 세상에 있기나 한 것일까? 아주머니, 쓰레기들을 일일이 뒤적여 종이며 캔과 병 같은 것들을 골라내어 따로 챙긴다. 함부로 버려진 것들에서 ‘소중한 어떤 것’을 챙기는 사람 여기 있다. 아주머니는 온몸으로, 시인이다.

내가 읽은 시 2023.0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