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인 25

코스모스

코스모스 김사인(1956~ ) 누구도 핍박해본 적 없는 자의 빈 호주머니여 언제나 우리는 고향에 돌아가 그간의 일들을 울며 아버님께 여쭐 것인가 ------------------------------------- 소설가 이태준의 수필 중에 ‘가을꽃’이라는 짧은 글이 있다. 거기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가을꽃들은 아지랑이와 새소리를 모른다. 찬 달빛과 늙은 벌레 소리에 피고 지는 것이 그들의 슬픔이요 또한 명예이다.’ 갑자기 가을꽃이 짠하면서도 거룩하게 느껴진다. 이태준이 말한 것은 비단 꽃만은 아닐 것이다. 그가 짚어낸 가을꽃의 속성에서는 사람의 태도라든가 인생 같은 것이 떠오르기도 한다. 이렇게 우리는 꽃 하나를 놓고도 세월이라든가 우리네 삶까지 읽을 수 있다. 김사인의 이 시도 가을꽃을 제목으로 삼..

김사인 2023.10.02

고향의 누님

고향의 누님 김사인 한주먹 재처럼 사그라져 먼데 보고 있으면 누님, 무엇이 보이는가요 아무도 없는데요 달려나가 사방으로 소리쳐봐도 사금파리 끝에 하얗게 까무라치는 늦가을 햇살뿐 주인 잃은 지게만 마당 끝에 모로 자빠졌는데요 아아 시렁에 얹힌 메주덩어리처럼 올망졸망 아이들은 천하게 자라 삐져나온 종아리 맨살이 차라리 눈부신데요 현기증처럼 세상 노랗게 흔들리고 흔들리는 세상을 손톱이 자빠지게 할퀴어 잡고 버텨와 한소리 비명으로 마루 끝에 주저앉은 누님 늦가을 스산한 해거름이네요 죽은 사람도 산 사람도 떠나 소식 없고 부뚜막엔 엎어진 빈 밥주발 헐어진 토담 위로는 오갈든 가난의 호박 넌출만 말라붙어 있는데요 삽짝 너머 저 빈들 끝으로 누님 무엇이 참말 오고 있나요

김사인 2018.12.26

전주(全州)

전주(全州) 김사인 자전거를 끌고 여름 저녁 천변 길을 슬슬 걷는 것은 다소 상쾌한 일 둑방 끝 화순집 앞에 닿으면 찌부둥한 생각들 다 내려놓고 오모가리탕에 소주 한 홉쯤은 해야 하리 그러나 슬쩍 피해가고 싶다 오늘은 물가에 내려가 버들치나 찾아보다가 취한 척 부러 비틀거리며 돌아간다 썩 좋다 저녁빛에 자글거리는 버드나무 잎새들 풀어헤친 앞자락으로 다가드는 매끄러운 바람 (이런 호사를!) 발바닥은 땅에 차악 붙는다 어깨도 허리도 기분이 좋은지 건들거린다 배도 든든하고 편하다 뒷골목 그늘 너머로 오종종한 나날들이 어찌 없겠는가 그러나 그러나 여기는 전주천변 늦여름, 바람도 물도 말갛고 길은 자전거를 끌고 가는 버드나무 길 이런 저녁 북극성에 사는 친구 하나쯤 배가 딴딴한 당나귀를 눌러타고 놀러 오지 않을라..

김사인 2017.06.10

풍경의 깊이 2

풍경의 깊이 2 김사인 이 길, 천지에 기댈 곳 없는 사람 하나 작은 보따리로 울고 간 길 그리하여 슬퍼진 길 상수리와 생강나무 찔레와 할미꽃과 어린 풀들의 이제는 빈, 종일 짐승 하나 지나지 않는 환한 캄캄한 길 열일곱에 떠난 그 사람 흘러와 조치원 시장통 신기료 영감으로 주저앉았나 깁고 닦는 느린 손길 골목 끝 남매집에서 저녁마다 혼자 국밥을 먹는, 돋보기 너머로 한번씩 먼 데를 보는 그의 얼굴 고요하고 캄캄한 길

김사인 2017.06.10

풍경의 깊이

풍경의 깊이 김사인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 이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 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쪽 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요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보일 듯 말 듯 옅게 묻어 있는 것이며, 그 나른한 고요의 봄볕 속에서 나는 백년이나 이백년쯤 아니라면 석달 열흘쯤이라도 곤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석달이며 열흘이며 하는 이름만큼의 내 무한 곁으로 나비나 벌이나 별로 고울 것 없는 버러지들이 무심히 스쳐가기도 할 것인데, 그 적에 나는 꿈결엔 듯 그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온 낯익은 냄새가 어느 생에..

김사인 2017.06.10

금남여객

금남여객 김사인 창틀에 먼지가 보얗던 금남여객 대흥동 버스 차부 제일 구석에나 미안한 듯 끼여 있던 회남행 금남여객 판암동 세천 지나 내탑 동면 오동 지나 몇번은 천장을 들이받고 엉덩이가 얼얼해야 그다음 법수 어부동 '대전 갔다 오시능규, 별고는 읎으시구유' 어쩌구 하는 데 냅다 덜커덩거리는 바람에, 나까오리를 점잖게 들었다 놓아야 끝나는 인사 일습 마칠 수도 없던 금남여객, 그래도 굴하지 않고 소란통 지나고 나면 다시 '그래 그간 별고는 읎으시구유' 못 마친 인사 소리소리 질러 기어이 마저 하고 닳고 닳은 나까오리 들었다 놓던 금남여객 보자기에 꽁꽁 묶여 머리만 낸 암탉이 난감한 표정으로 눈을 굴리던 금남여객 하루 세차례 오후 네시 반이 막차지만 다섯시 넘어 와도 잘하면 탈 수 있던 금남여객 장마철엔 ..

김사인 2017.01.10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김사인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그 처자 발그라니 언 손에 얹혀 나 인생 탕진해버리고 말겠네 오갈 데 없는 그 처자 혼자 잉잉 울 뿐 도망도 못 가지 그 처자 볕에 그을려 행색 초라하지만 가슴과 허벅지는 소젖보다 희리 그 몸에 엎으러져 개개 풀린 늦잠을 자고 더부룩한 수염발로 눈꼽을 떼며 날만 새면 나 주막 골방 노름판으로 쫓아가겠네 남는 잔이나 기웃거리다 중늙은 주모에게 실없는 농도 붙여보다가 취하면 뒷전에 고꾸라져 또 하루를 보내고 "나 갈라네" 아무도 안 듣는 인사 허공에 던지며 허청허청 별빛 지고 돌아오겠네 그렇게 한두 십 년 놓아 보내고 맥없이 그 처자 몸에 아이나 서넛 슬어놓겠네 슬어놓고 나 무능하겠네 젊은 그 여자 혼자 ..

김사인 2016.09.26

노숙

노숙 김사인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눅눅한 요 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 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 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순한 너를 뉘었으니 어찌하랴 좋던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네게 묻는다 어떤가 몸이여

김사인 2016.0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