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대식 29

물통

물통 우대식 전생에 나는 낙타 등에 매달린 누란의 물장수 아라베스크의 자세로 화석이 된 누란의 물장수 모래로 된 얼굴로 장사를 나가 기울어진 돌집으로 들어가는 당신의 해진 옷깃에 물을 붓는다 초승달이 뜰 때 물통의 남은 물을 신께 바치고 물값을 내라고 멱살을 잡고 울고불고 낙타를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호수처럼 먼 데 이르면 누구의 발자국도 없다 전생에 나는 낙타도 잃고 물통도 버린 누란의 물장수 —계간 《가히》 2024년 봄호

우대식 2024.03.11

먼 날

먼 날 우대식 화롯불에 호박 된장국이 뉘엿뉘엿 졸아가던 겨울밤 육백을 치다가 짧게 썬 파와 깨소금을 얹은 간장에 청포묵을 찍어 먹던 어른들 옆에서 찢어낸 일력(日歷) 뒷장에 한글을 열심히 썼던 먼 날 토방 쪽 창호문을 툭툭 치던 눈이 내리면 이젠 없는 먼 어머니는 고무신에 내린 눈을 털어 마루에 얹어놓고 어둠과 흰 눈 아래를 돌돌 흐르던 얼지 않은 물소리 몇, 이제 돌아오지 않는 먼 밤 돌아갈 귀(歸) 한 글자를 생각하면 내 돌아갈 곳이 겨울밤 창호문 열린 토방 한구석임을 선뜻 알 것도 같다 ―『설산국경』중앙북스, 2013.

우대식 2022.09.20

주홍글씨

주홍글씨 우대식 온 강이 얼었습니다 그대에게 가는 모든 길이 열렸습니다 등불이 켜진 작은 나무집에서 편지를 씁니다 “모든 길이 열렸지만 저는 두렵습니다. 물결이 마주치다 솟아오른 채 얼어버리듯 내 마음결도 불안정합니다” 그대에게 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다만, 수레바퀴 돌아가는 소리 언 강 눈 밟는 소리 봄으로 가는 채찍 소리 그대에게 가는 길을 다시 허무는 소리 싸락눈 위에 찍힌 주홍글씨 “여기 자신의 길조차도 가지 못한 한 영혼이 있다. 새소리에도 놀라는 어리석은 사랑이 있다 언 강이 녹아 풀어졌을 때 또다시 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겁 많은 사내가 있다” ―『설산국경』중앙북스, 2013.

우대식 2022.09.20

어린 마부와 양

어린 마부와 양 우대식 어린 마부의 옷에서 양의 피 냄새가 돌았다. 흑운 한울이라는 몽고의 깊은 초원에 와서 말을 탔다. 어린 말은 힘에 겨워 구릉을 오르며 깊은 숨을 몰아쉰다. 역겨운 향내가 피어나는 암자에 들어 경전을 돌리다 문득 한 마리 양이 되어 얌전히 두 발을 모으고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때, 어린 마부는 작은 돌 위에 앉아 코를 훌쩍이다 나를 보고 빙그레 웃음을 던졌다.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매우 즐거웠다. 어린 마부는 구름을 떼어 내 입에 넣어주었다. 구름은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아요. 그러나 기분은 좋아지지요. 몽골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가만히 구름을 받아먹었다. ―『설산국경』중앙북스, 2013.

우대식 2022.09.20

의심

의심 우대식 사람은 참말로 알 수 없는 것이어서 신께서 내게 옷 한 벌 지어주셨다. 의심이라는 환한 옷,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잠을 잘 때도 벗지 않는다. 견고한 이 한 벌의 옷을 입고 사람을 만나고 술을 마신다. 나는 너를 의심한다. 잠들지 못하는 밤을 위해 의심이 내 등을 다독인다. 내가 너를 지키마. 편히 쉬어라. 어떤 평안이 광배처럼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당신은 나의 아버지이고 전지전능하사 나를 보호하시며 한없이 사랑하시도다. 꿈속에서 나의 찬양은 오래도록 울려 퍼졌다. 배화교도처럼 의심의 불을 조용히 밝히고 내 아버지마저 그 제단에 바치기로 결심한 어느 새벽, 당신도 내 의심의 눈길을 피할 수 없다고 고백했을 때 천둥과 벼락으로 인해 하얀 의심의 옷이 더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설산국경』중..

우대식 2022.09.20

모자란남움직씨

모자란남움직씨 ― 불완전타동사를 위한 변명 우대식 불완전타동사의 우리말은 모자란남움직씨 모자란 채 움직여야 하는 언어의 운명 그 무언가를 만나야만 의미가 되는 쓸쓸함 앞으로 도원경(桃源境)이 흘러가고 기린(麒麟)도 지나가지만 무엇 하나도 잡을 수 없다 모자란남움직씨인 내 필설로는 내 눈을 찌를 길밖에는 없다 모자란 채 흘러가야 하는 그러나 끝까지 움직임을 멈추지 않을 내 푸른 사상, ―『단검』실천문학사, 2008.

우대식 2022.09.09

삵 우대식 내가 한 마리 삵이 되어 발해만 앞바다를 서성이는 이유는 어디 먼 해조음이 들려오는 탓이다 울지 말고 그만 잠들라는 그 어떤 먼 신호도 울음 소리였다는 것을 아는 때문이다 달 아래 그대 젖가슴으로 찬 손을 천천히 뻗어본다 죽음이란 이런 순간 다가오는 것 내가 한 마리 삵이 되어 발해만 앞바다를 서성이는 이유는 발이 네 개인 때문이다 해변을 달린다 달림, 들림 혹은 울음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다 12월의 해변을 내달려 나의 울음도, 너의 울음도 그대 핏줄 어딘가에 돋아난 푸른 감각이기를 간절히 원할 뿐이다 그대에게 보낸 한 통의 죽간(竹簡)은 받아보았는가 내 입에는 날이 선 이빨이 가득 고여 입을 벌리면 한 마리 삵이 되어 눈 내린 험한 산을 떠돈다고 썼다 기차는 발해만을 떠나 극락강을 지나는 중..

우대식 2022.09.09

아나키스트의 고백

아나키스트의 고백 우대식 내 안에 '살고' 있는 어떤 아나키한 개의 기억 -- 후지와라 신야 세상에 믿을 것은 그 어디에도 없다 조금씩 무언가에 위안을 주며 더러 위안을 받으며 살아갈 뿐, 그러므로 어떤 교훈도 그리 유용치 못하다 가장 똑똑하게 목도하는 진실은 지금 살아있다는 것 죽어갈 것이라는 사실 모든 생명 안에는 야차가 있다 '나'라는 곳으로 지독하게 '나'를 몰고 가다가 어느 순간 지상에 툭 내팽개친다 '아나키'란 어떻게 해석해도 좋다 뚝 떨어진 존재, '아나키'란 묻혀간다는 점에서 죽음에 가깝다 뚝 떨어져 묻혀가는 하나의 슬로모션 끝까지 슬로모션 종점을 향해 --『베두인의 물방울』여우난골, 2021.

우대식 2022.09.08

태백행

태백행 우대식 태백으로 돌아가야겠다 높고 우뚝하지만 늘 그림자가 진 곳 사람의 마을에서 소리를 지르면 쿵쿵 눈이 대답하는 곳 산골 마을에서 도깨비 같은 할머니가 동지 팥죽을 쑤다가 귀신을 만나 빗자루를 두들겨 패는 곳 검은 아리랑이 절벽으로 흘러내려 물이 산을 넘고 산이 물을 건너는 태백으로 가야겠다 낮은 지붕을 맞대고 천변으로 철주를 잇대어 밥도 팔고 술도 파는 곳 겨울에는 한낮에도 해가 떨어져 아궁이에 불을 지피며 하루를 살았다고 손을 터는 곳 높고 높으신 것은 하염없이 낮아 누구도 깨닫지 못하고 다만 겨우 발을 딛고 사는 곳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가 멸치국수 한 그릇을 먹고 싶다 나는 너무 더러워졌다 --『베두인의 물방울』여우난골, 2021.

우대식 2022.09.08

어린 순례자

어린 순례자 우대식 원주 어느 고등학교 밴드부였던 어린 외삼촌은 옥상에서 허벅지를 터지게 맞고 집으로 돌아와 하모니카를 불었다. 멀고 먼 앨라배마 나의 고향은 그곳. 그러면 더 어린 나는 한낮의 쓸쓸함을 앓곤 하였다. 외삼촌은 자전거 앞에 앉고 나는 뒤에 앉아 어린 낚시꾼이 되어 낚시터로 줄달음질치기도 하였다. 쨍쨍한 여름 햇살 아래 어린 낚시꾼 둘은 붙어 앉아 흔들리는 수면을 바라보며 밴조를 메고 떠나는 앨라배마를 하염없이 그리워했다. 삼촌 앨라배마가 어디야. 응 멀어. 자전거를 타고 갈 수 있는 앨라배마는 없나. 해가 질 무렵 자전거를 끌고 기찻길 옆으로 걸어가면서 서로의 등짝에 찍힌 선연한 주홍빛 놀을 보며 놀라곤 하였다. 엄마가 없던 나를 외삼촌은 토닥였던 것 같고 아버지가 없던 그를 나는 불쌍하..

우대식 2022.09.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