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행열차 - 허영자 완행열차 허영자(1938~ ) 급행열차를 놓친 것은 잘된 일이다 조그만 간이역의 늙은 역무원 바람에 흔들리는 노오란 들국화 애틋이 숨어 있는 쓸쓸한 아름다움 하마터면 나 모를 뻔하였지 완행열차를 탄 것은 잘된 일이다 서러운 종착역은 어둠에 젖어 거기 항시 기다리고 있거니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누비듯이 혹은 홈질하듯이 서두름 없는 인생의 기쁨 하마터면 나 모를 뻔하였지 —『기타를 치는 집시의 노래』 1995 내가 읽은 시 2024.01.03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 신경림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신경림 어려서 나는 램프 불 밑에서 자랐다. 밤중에 눈을 뜨고 내가 보는 것은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뿐이었다. 나는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다. 조금 자라서는 칸델라 불 밑에서 놀았다. 밖은 칠흑 같은 어둠 지익지익 소리로 새파란 불꽃을 뿜는 불은 주정하는 험상궂은 금점꾼들과 셈이 늦는다고 몰려와 생떼를 쓰는 그 아내들의 모습만 돋움새겼다. 소년 시절은 전등불 밑에서 보냈다. 가설극장의 화려한 간판과 가겟방의 휘황한 불빛을 보면서 나는 세상이 넓다고 알았다, 그리고 나는 대처로 나왔다. 이곳저곳 떠도는 즐거움도 알았다 바다를 건너 먼 세상으로 날아도 갔다.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들었다. 하지만 멀리 다닐수록, 많이 보고 들을수록 이상하게도.. 내가 읽은 시 2023.12.28
모든 첫 번째가 나를 - 김혜수 모든 첫 번째가 나를 김혜수 모든 첫 번째가 나를 끌고 다니네 아침에 버스에서 들은 첫 번째 노래가 하루를 끌고 다니네 나는 첫 노래의 마술에서 풀려나지 못하네 태엽 감긴 자동인형처럼 첫 노래를 흥얼거리며 밥을 먹다가 거리를 걷다가 흥정을 하다가 거스름돈을 받다가 아침에 들은 첫 번째 노래를 흥얼거리네 모든 첫번째 기척들이 나를 끌고 다니네 첫 떨림과 첫 경험과 첫사랑과 첫 눈물이 예인선처럼 나를 끌고 모든 설레임과 망설임과 회한을 지나 모든 두 번째와 세 번째를 지나 모든 마지막 앞에 나를 짐처럼 부려놓으리 나는, 모든, 첫 번째의, 인질, 잠을 자면서도 나는 아침에 들은 첫 노래를 흥얼거리네 나는, 모든, 첫 기척의, 볼모 내가 읽은 시 2023.12.28
올 여름의 인생 공부 - 최승자 올 여름의 인생 공부 최승자 모두가 바캉스를 떠난 파리에서 나는 묘비처럼 외로웠다. 고양이 한 마리가 발이 푹푹 빠지는 나의 습한 낮잠 주위를 어슬렁거리다 사라졌다. 시간이 똑똑 수돗물 새는 소리로 내 잠 속에 떨어져 내렸다. 그러고서 흘러가지 않았다. 엘튼 죤은 자신의 예술성이 한물갔음을 입증했고 돈 맥글린은 아예 뽕짝으로 나섰다. 송×식은 더욱 원숙해졌지만 자칫하면 서××처럼 될지도 몰랐고 그건 이제 썩을 일밖에 남지 않은 무르익은 참외라는 뜻일지도 몰랐다. 그러므로, 썩지 않으려면 다르게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다르게 사랑하는 법 감추는 법 건너뛰는 법 부정하는 법. 그러면서 모든 사물의 배후를 손가락으로 후벼 팔 것 절대로 달관하지 말 것 절대로 도통하지 말 것 언제나 아이처럼 .. 내가 읽은 시 2023.12.28
깨끗한 식사 - 김선우 깨끗한 식사 김선우 어떤 이는 눈망울 있는 것들 차마 먹을 수 없어 채식주의자 되었다는데 내 접시 위의 풀들 깊고 말간 천 개의 눈망울로 빤히 나를 쳐다보기 일쑤, 이 고요한 사냥감들에도 핏물 자박거리고 꿈틀거리며 욕망하던 뒤안 있으니 내 앉은 접시나 그들 앉은 접시나 매일반. 천년 전이나 만년 전이나 생식을 할 때나 화식을 할 때나 육식이나 채식이나 매일반. 문제는 내가 떨림을 잃어간다는 것인데, 일테면 만년 전의 내 할아버지가 알락꼬리암사슴의 목을 돌도끼로 내려치기 전, 두렵고 고마운 마음으로 올리던 기도가 지금 내게 없고 (시장에도 없고) 내 할머니들이 돌칼로 어린 죽순 밑둥을 끊어내던 순간, 고맙고 미안해하던 마음의 떨림이 없고 (상품과 화폐만 있고) 사뭇 괴로운 포즈만 남았다는 것. 내 몸에 무.. 내가 읽은 시 2023.12.28
섶섬이 보이는 방 - 나희덕 섶섬이 보이는 방 ―이중섭의 방에 와서 나희덕 서귀포 언덕 위 초가 한 채 귀퉁이 고방을 얻어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아이들을 키우며 살았다 두 사람이 누우면 꽉 찰, 방보다는 차라리 관에 가까운 그 방에서 게와 조개를 잡아먹으며 살았다 아이들이 해변에서 묻혀온 모래알이 버석거려도 밤이면 식구들의 살을 부드럽게 끌어안아 조개껍질처럼 입을 다물던 방, 게를 삶아먹은 게 미안해 게를 그리는 아고리와 소라껍질을 그릇 삼아 상을 차리는 발가락군이 서로의 몸을 끌어안던 석회질의 방, 방이 너무 좁아서 그들은 하늘로 가는 사다리를 높이 가질 수 있었다 꿈속에서나 그림 속에서 아이들은 새를 타고 날아다니고 복숭아는 마치 하늘의 것처럼 탐스러웠다 총소리도 거기까지는 따라오지 못했다 섶섬이 보이는 이 마당에 서서 .. 내가 읽은 시 2023.12.28
신문지 밥상 - 정일근 신문지 밥상 정일근 더러 신문지 깔고 밥 먹을 때가 있는데요 어머니, 우리 어머니 꼭 밥상 펴라 말씀하시는데요 저는 신문지가 무슨 밥상이냐며 궁시렁 궁시렁 하는데요 신문질 신문지로 깔면 신문지 깔고 밥 먹고요 신문질 밥상으로 펴면 밥상 차려 밥 먹는다고요 따뜻한 말은 사람을 따뜻하게 하고요 따뜻한 마음은 세상까지 따뜻하게 한다고요 어머니 또 한 말씀 가르쳐 주시는데요 해방 후 소학교 2학년이 최종학력이신 어머니, 우리 어머니 말씀 철학 내가 읽은 시 2023.12.28
동승 - 하종오 동승同乘 하종오 국철을 타고 앉아 가다가 문득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들려 살피니 아시안 젊은 남녀가 건너편에 앉아 있었다 늦은 봄날 더운 공휴일 오후 나는 잔무하러 사무실에 나가는 길이었다 저이들이 무엇 하려고 국철을 탔는지 궁금해서 쳐다보면 서로 마주 보며 떠들다가 웃다가 귓속말할 뿐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모자 장사가 모자를 팔러 오자 천 원 주고 사서 번갈아 머리에 써 보고 만년필 장사가 만년필을 팔러 오자 천 원 주고 사서 번갈아 손바닥에 써 보는 저이들 문득 나는 천박한 호기심이 발동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황급하게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국철은 강가를 달리고 너울거리는 수면 위에는 깃털 색깔이 다른 새 여러 마리가 물결을 타고 있었다 나는 아시안 젊은 남녀와 천연하게 동승하지 못하고 있어 낯짝.. 내가 읽은 시 2023.12.28
고래를 위하여 - 정호승 고래를 위하여 정호승 푸른 바다에 고래가 없으면 푸른 바다가 아니지 마음속에 푸른 바다의 고래 한 마리 키우지 않으면 청년이 아니지 푸른 바다가 고래를 위하여 푸르다는 걸 아직 모르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모르지 고래도 가끔 수평선 위로 치솟아 올라 별을 바라본다 나도 가끔 내 마음속의 고래를 위하여 밤하늘 별들을 바라본다 내가 읽은 시 2023.12.28
첫사랑 - 고재종 첫사랑 고재종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꽃 한번 피우려고 눈은 얼마나 많은 도전을 멈추지 않았으랴 싸그락 싸그락 두드려 보았겠지 난분분 난분분 춤추었겠지 미끄러지고 미끄러지길 수백 번 바람 한 자락 불면 휙 날아갈 사랑을 위하여 햇솜 같은 마음을 다 퍼부어 준 다음에야 마침내 피워 낸 저 황홀 보아라 봄이면 가지는 그 한 번 덴 자리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상처를 터뜨린다. 내가 읽은 시 2023.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