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삼 33

달 뜰 때까지

달 뜰 때까지 김종삼 해방 이듬 이듬해 봄 十時―十一時 솔밭 속을 기어가고 있음 멀리 똥개가 짖고 있음 달뜨기 전 넘어야 한다 함 경계선이 가까워진다 함 엉덩이가 들린다고 쥐어 박히고 있음 개미가 짖고 있음 달뜨기 전 넘었음 빈 마을 빈집들 있음 그런 데를 피해가고 있음 시간이 지났음 경계선이 다시 나타남 총기 다루는 소리 마구 보임 시야에 노란 붉은 검은 빗발침 개새끼들 길을 잘못 들었음 간간 遠近의 고함이 캄캄한 拘置所 전체가 벼룩떼이다 순찰 한 놈이 다녀갔음 벽 한 군데 거적떼길 들추어보았음 굵은 삭장 귀 네個가 가로질린 살창임 합세하여 잡아당기고 있음 흙덩어리 떨어진 소리가 오래가고 있음 짐작 時計 二時 빠져 나갈 구멍이 뚫리고 있음 腦波 일고 있음 현재 罪目 反動 및 破壞分子 三時 三時―四時 아..

김종삼 2022.03.30

앙포르멜

앙포르멜 김종삼 나의 無知는 어제 속에 잠든 亡骸 쎄자아르 프랑크가 살던 寺院 주변에 머물렀다. 나의 無知는 스떼판 말라르메가 살던 本家에 머물렀다. 그가 태던 곰방댈 훔쳐 내었다 훔쳐 낸 곰방댈 물고서 나의 하잘것이 없는 無知는 방 고호가 다니던 가을의 近郊 길바닥에 머물렀다. 그의 발바닥만한 낙엽이 흩어졌다. 어느 곳은 쌓이었다. 나의 하잘것이 없는 無知는 쟝 뽈 싸르트르가 經營하는 煉炭工場의 職工이 되었다. 罷免되었다. --------------------- 앙포르멜(informel) : 구상과 기하학적 추상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난 서정적 추상을 특징으로 하는 1950년대의 전위미술운동. 세자르 프랑크(Cesar A. Frank, 1822~1890) : 벨기에 출신의 프랑스 작곡가, 오르가니스트.

김종삼 2022.03.30

나의 본적

나의 본적 김종삼(1921~1984) 나의 본적은 늦가을 햇볕 쪼이는 마른 잎이다. 밟으면 깨어지는 소리가 난다. 나의 본적은 거대한 계곡이다. 나무 잎새다. 나의 본적은 푸른 눈을 가진 한 여인의 영원히 맑은 거울이다. 나의 본적은 차원을 넘어 다니지 못하는 독수리다. 나의 본적은 몇 사람밖에 안 되는 고장 겨울이 온 교회당 한 모퉁이다. 나의 본적은 인류의 짚신이고 맨발이다.

김종삼 2019.12.03

배음(背音)

배음(背音) 김종삼(1921~1984) 몇 그루의 소나무가 얕이한 언덕엔 배가 다니지 않는 바다, 구름 바다가 언제나 내다 보였다 나비가 걸어오고 있었다 줄여야만 하는 생각들이 다가오는 대낮이 되었다. 어제의 나를 만나지 않는 날이 계속되었다. 골짜구니 대학건물은 귀가 먼 늙은 석전(石殿)은 언제 보아도 말이 없었다. 어느 위치엔 누가 그런지 모를 풍경의 배음이 있으므로, 나는 세상에 나오지 않은 악기를 가진 아이와 손쥐고 가고 있었다.

김종삼 2019.01.11

올페

올페 김종삼 햇살이 눈부신 어느 날 아침 하늘에 닿은 쇠사슬이 팽팽하였다 올라오라는 것이다. 친구여, 말해다오. -------------------- 이 시는 언뜻 한 장의 성화(聖畵)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시간적 배경은 제1연의‘햇살이 눈부신/어느 날 아침’인데 여기서의‘햇살’과 제2연의‘하늘에 닿은 쇠사슬’이 신비하고 신성한 이미지로 다가오기 때문이다.신화·원형비평에서 본다면 햇살과 쇠사슬은 모두‘상향’의 관념과 결합되고 특히 빛은‘신성’의 상징으로 신이나 성령을 암시하고 쇠사슬은 거기로 갈 수 있는 방편이 되기 때문이다.과연 서정적 자아는‘올라오라는 것이다.’라고 하늘의 음성을 들었다고 전한다.그리고 연을 바꿈으로서 생각의 시간을 마련한 후,그래도 청자인 친구를 부르며 말해 달라고 부탁한다.조..

김종삼 2015.12.25

궂은 날

궂은 날 김종삼 입원하고 있었읍니다 육신의 고통 견디어 낼 수가 없었읍니다 어제도 죽은 이가 있고 오늘은 딴 병실로 옮겨간 네 살짜리가 위태롭다 합니다 곧 연인과 死刑 간곡하였고 살아 있다는 하나님과 간혹 이야기-ㄹ 나누며 걸어가고 싶었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의 한 손을 잡아 주지 않았읍니다. ------------------------- 김종삼 시에는 많은 죽음의 모티프가 나와 있는데, 그것은 생의 종점에 가까울수록 출현 빈도가 높아지고 있다. 그는 1984년 12월 간경화로 타계하기까지 여러 번 병원을 드나들며 병마에 시달렸다. 그래서 죽음에 가까워진 자신의 운명을 생각하면서 죽음과 관련된 시를 여러 편 남기게 되었을 것이다. 앞에서 본 것처럼 김종삼은 죽음에 대하여 초탈한 모습을 보이지만, 위의..

김종삼 2015.12.25

掌篇

掌篇 김종삼 작년 1월 7일 나는 형 종문이가 위독하다는 전달을 받았다 추운 새벽이었다 골목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허술한 차림의 사람이 다가왔다 한미병원을 찾는다고 했다 그 병원에서 두 딸아이가 죽었다고 했다 부여에서 왔다고 한다 연탄가스 중독이라고 한다 나이는 스물둘, 열아홉 함께 가며 주고받은 몇 마디였다 시체실 불이 켜져 있었다 관리실에서 성명들을 확인하였다 어서 들어가보라고 한즉 조금 있다가 본다고 하였다 -------------------------- (...) 매우 드라이한 시이다. 형 종문에 대한 병문안을 가다가 추운 새벽 골목길에서 만난 허술한 차림의 사람을 만나 병원까지 가다가 들은 이야기를 시적 주체의 그 어떠한 반응도 생략한 채 간략하게 기록했을 뿐인 시이다. 그러나 그 시적 내용은 천..

김종삼 2015.1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