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 일기 127

한국 춘란 강산애

내가 애란인으로서 동양란 여남은 포기와 함께 수십 년을 살아오면서도 그동안 한국 춘란에 대해선 큰 관심이 없었다. 한국 춘란은 중국 춘란이나 혜란과는 달리 향기가 없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다 한국 춘란은 잎이나 꽃의 모양과 무늬와 색깔에 따라 엄청나게 높은 가격으로 거래가 되어서 사서 키워볼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예전엔 직장의 친구와 함께 춘란이 자생하는 청도나 밀양 등의 남쪽 지방으로 산채를 하러 몇 번 간 적도 있지만, 내 마음에 드는 난을 만나기란 잔디밭에서 바늘 찾기보다 어려운 일이어서 일찌감치 포기했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배양이 늘었기 때문인지 한국 춘란의 가격이 전반적으로 많이 떨어져서 한두 포기 키워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일전에 나는 춘란을 판매하는 한 유튜브 채널을 시청하다..

텃밭 일기 2024.11.22

옛 산길을 걸으며

멀리서 팔공산을 쳐다보면 단풍이 중턱까지는 내려온 것 같다. 중턱까지 내려왔다는 것은 비로봉이나 동봉과 서봉 등의 주봉과 주능선에선 이미 단풍이 졌거나 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순환도로나 고향마을에도 단풍이 금방 내려올 것이다. 물론 단풍이 등고선을 따라 횡대로 줄을 서서 손을 잡고 내려오는 것은 아니다. 산에 자생하는 단풍과는 종이 다른 순환도로의 단풍나무는 대부분이 이미 물들었으며, 산가 마당의 감나무는 벌써 잎이 거의 다 떨어진 상태다. 아무튼, 오늘은 그 팔공산의 단풍을 구경할 겸 옛 산길을 걸으며 추억 속으로 한번 들어가보고 싶어서 아침에 집을 나섰다.먼저 산가 마당에 주차를 하고, 며칠 전에 쪄서 비닐하우스 안에다 널어둔 콩대를 뒤집어 주고, 집에서 챙겨온 점심이 든 작은 배낭을 메고 등산..

텃밭 일기 2024.10.29

박각시, 꼬리박각시

당콩밥에 가지 냉국의 저녁을 먹고나서   바가지꽃 하이얀 지붕에 박각시 주락시 붕붕 날아오면   집은 안팎 문을 횅하니 열젖기고   인간들은 모두 뒷등성으로 올라 멍석자리를 하고 바람을 쐬이는데   풀밭에는 어느새 하이얀 대림질감들이 한불 널리고   돌우래며 팟중이 산옆이 들썩하니 울어댄다.   이리하여 한울에 별이 잔콩 마당 같고   강낭밭에 이슬이 비 오듯 하는 밤이 된다. 위의 글은 백석의 시 「박각시 오는 저녁」의 전문이다. 시인의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 지방이 이 시의 지리적 배경이겠지만 나의 어릴적 팔공산 지역의 풍경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시에 나오는 '박각시'는 물론 저녁 어스름에 박꽃이 피기 시작하면 그 박꽃에 날아오는 박각싯과의 나방이다. '주락시'는 날개와 가슴에 줄이 있는 '줄박각시'..

텃밭 일기 2024.10.08

나의 뒤늦은 자전거 길 정비

내가 자전거를 타고 자주 다니는 길은 집에서 가까운 금호강변과 불로천변 자전거 길이다. 오늘은 그중 불로천변 자전거 길의 불로교 부근에 있는 장애물을 내 손으로 제거하기로 하였다. 그 장애물이라는 것은 평탄한 콘크리트 노면에 여기저기 불거져 있는 시멘트 덩어리인데, 노면 건설 공사를 한 후 나중에 떨어진 시멘트 반죽이 그대로 굳은 것이다. 자전거를 탈 때마다 시멘트 덩이가 여간 신경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밝은 낮에는 용케 그것을 피해 가면 되지만 어두운 저녁에는 가로등이 켜져 있어도 잘 보이지 않아서 천천히 조심조심 그 구간을 지나가야 했다. 만약에 비가 내려 노면이 젖은 날에 그 불거져 반질반질한 시멘트 덩어리 위로 자전거 바퀴가 지나가다가 미끄러지기라도 한다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었다.그..

텃밭 일기 2024.10.04

이 장미 한 송이

3년 전에 결혼하여 멀리 사는 둘째 아들 부부는 아내와 나의 생일에 축하 케이크나 꽃바구니를 보내 주곤 하였다. 빵을 좋아하는 나는 케이크가 반가웠지만 꽃바구니에 대해선 마냥 반갑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한 뼘도 안 되는 짧은 길이로 잘려서 물먹은 스펀지(플로럴 폼 floral form)에 빽빽이 꽂혀 있는 꽃들을 보면 안쓰럽고 부자연스럽고 답답한 느낌을 줄 뿐만 아니라 사나흘만 지나면 시들어서 한 보따리의 쓰레기가 돼 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들 부부에게 앞으론 꽃바구니 같은 건 보내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내가 누구인가?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지금도 텃밭을 가꾸고 있는 농부가 아니던가? 한번은 그 꽃바구니의 장미가 시들기 전에 꽃대가 그중 긴 것 몇 송이를 골라서 꽃은 잘라 버리고 꺾꽂이를 ..

텃밭 일기 2024.09.19

라원이의 대구 첫나들이

태어난 지 1년 반이 된 손녀 라원이가 어제 낮에 난생처음으로 제 부모와 함께 대구에 왔다가 오늘 오후에 남양주로 돌아갔다. 그는 승용차를 타고 멀리 가는 것을 싫어한다고 하는데, 추석 열차표 예매를 놓쳐서 1주일 앞당겨 열차(SRT)를 타고 왔다가 간 것이다.  어제 낮에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승용차를 타고 동대구역으로 마중을 나갔었다. 불로동의 냉면집에서 점심을 함께 먹고 바로 팔공산으로 갔다. 도중에 잠이 든 라원이 할아버지의 고향집인 산가에 도착해서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기다린 후에 뒤쪽의 계곡으로 내려갔다. 더운 날씨라 물은 차지 않았다. 라원이는 얕은 물에 들어가 손발로 물을 튀기며 노는 것을 좋아했다. 이 개울은 내가 어릴 적엔 여남은 명의 마을 아이들이 여름이 되면 살다시피 하던 곳이지만 지..

텃밭 일기 2024.09.09

텃밭 식구들의 근황

지난 주말에 북상했던 장마전선은  이곳 팔공산 지역에 하루만에 30mm 정도의 비를 뿌려 가물던 텃밭을 적셔 주고는 다시 남쪽으로 물러나 있다. 아직 7월도 오지 않았지만 기온은 연일 30도를 훨씬 웃돌며 무덥다. 이런 가운데 텃밭 식구들은 열심히 자라며 꽃을 피우고 열매를 키워가고 있다. 저희들에게 할애된 계절을 헛되이 보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쏟고 있는 모양새다.고구마는 무성해진 잎들이 본격적으로 덩굴을 뻗칠 채비를 하고 있고, 참깨는 아래쪽부터 벌써 꽃을 피우고 있다. 고추도 키가 많이 자라서 먼저 달린 열매는 매운맛이 돌기 시작했다. 여남은 포기의 토마토들도 한창 열매를 맺는 중인데, 그중 흑토마토 네 포기는 트럭을 타고 지나가던 이웃마을 친구가 자기 밭에 심고 남은 것이라며 내게 준 것이다. 복..

텃밭 일기 2024.06.24

오디오 마니아들과 함께

오늘 오후엔 두 오디오 마니아 친구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우리집과 가까운 지묘동에 옛 직장 동료가 자기만의 멋진 음악실을 갖추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지난주에 다른 한 옛 동료와 함께 그곳에 놀러갔었다. 과연 널찍한 공간에 멋진 오디오 시스템이 갖춰져 있었다. 거기서 몇 곡의 연주곡과 좋아하는 옛 노래를 듣다보니 또 다른 오디오 마니아인 초등학교 동기가 생각나서 오랜만에 그에게 문자로 연락을 했었다. 그 친구는 내가 보낸 오디오 시스템 사진을 보더니 '크랑필림 스피커보다 친구가 더 보고 싶다'는 답장을 보내왔다. 그래서 오늘 오후에 네 사람이 지묘동의 그 음악실에서 만난 것이다. 동기 친구는 우리들에게 '크랑필림' 스피커와 엠프 시스템에 대한 설명을 장황하게 해 주었다. 이 시스템은 대구의 누구..

텃밭 일기 2024.0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