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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날 아침 - 홍신선

추석날 아침 홍신선(1944~ ) 차례 끝나 병풍 걷는데 문득 기러기 소리 들린다. 작년에 날아왔던 길 더듬더듬 다시 더듬어 오는 하늘에 깔린 기러기 몇 향합에 사른 한 오라기 연기에 이끌려 와 흠향(歆饗) 다 하고 구천으로 되돌아가는 누구누구 일행들 같다. 여느 날이 여느 날이고 그날이 그날인 세월 여전하지만 사노라 아귀다툼인 세상 내려다보며 그래도 저 삶이 그중 살 만했다고 누구누구와 기러기가 일행처럼 낄,낄,낄 마주 터놓고 웃는 웃음소리도 이 아침 나는 천심의 푸른 열두 폭에다 병풍 걷듯 접어 간직노니 가윗날 추석이다.

내가 읽은 시 2026.09.27

메리 루플의 「어두운 구석」 - 나희덕

어두운 구석 메리 루플 Mary Ruefle(1952~ ) 물건을 넣어두려고 빈 서랍을 청소하고 있었다. 거기엔 별게 없었다ㅡ 죽은 파리 한 마리, 거뭇한 동전 한 닢, 시침핀 하나, 뒤쪽 구석의 먼지. 핀을 집으려고 손가락을 오그렸을 때 시 하나가 내게 왔다. 말하자면, 그것은 내 마음속에서 한 단어 한 단어 나타났다. 그게 어떻게 서랍 속에 들어갔을까? 얼마나 오래 기다렸을까? 내가 거기 넣어두었던가, 보관해 두려고? 그건 파리의 것이었나? 그가 어느 외로운 높이에서 이 부스러기들의 놀이터 위로 그걸 떨어뜨렸나, 난데없이 찾아온 자기 자신의 죽음을? ----------------------------- 한국 독자..

해설시 2026.09.23

도강록渡江錄 - 우대식

도강록渡江錄 우대식 5월의 해거름 수박 모종을 심어놓고 다독이니 어두워진다 물 건너 집으로 가려다 뒤를 돌아본다 수박 모종의 머리가 납작 엎드려 있다 낯설다 낯설다 속으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밭머리 짚가리에 앉아 맑고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느 날 나도 뼛가루가 된 채 이방의 땅에서 몇 날을 보낼 것이다 낯설다 중얼거릴 때 풀꽃들이 쳐다보고 새가 다녀가고 당신을 닮은 당신과 나를 닮은 내가 밤을 건너 물가에 다다를 때, —계간 《미네르바》 2026 가을호 ------------------------------------ 우대식 / 1965년 강원도 원주 출생.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늙은 의자에 앉아 바..

우대식 2026.09.22

금강초롱 - 신중신

금강초롱 신중신愼重信(1941~2025) 상원사 가까운 산기슭서 초롱꽃 세 낱을 층층으로 피워 올린 한 줄기 여린 꽃대와 마주치다. 저토록 깨끗한 모양을 빚어내기 위해서 몇 철을 내내 밤이슬에 씻겨야 하고 세상 어디에도 없던 색감과 향기를 뿜어내기까지 얼마나 새벽 범종 소리를 들어야 했던 걸까? 높이 날면 미래를 바라보려니 하는 기대와 빨라야만 행운을 움켜쥐리라는 사람 마음에 샘물 한 모금 내밀 듯 금강초롱 한 층이 무량정천無量淨天 석탑 한 층과 무에 다르며 사뿐히 내걸린 저 같은 가벼움인들 우리가 이승에서 감당하는 무게와 어찌 다르랴. 잡목림 우거진 산길을 오른 참에 샛말간 생김새 그대로 꽃송이를 매단 물빛 금강초롱꽃을 보..

내가 읽은 시 2026.09.20

라원이의 대구 나들이

라원이가 그저께 제 부모와 함께 열차를 타고 대구 할머니네에 와서 하룻밤을 자고 어제 오후에 돌아갔다. 추석 연휴에 접어들면 교통이 복잡해질 것이기 때문에 한 주 앞당겨 미리 할머니 할아버지를 뵈러 왔다가 간 것이다. 그저께 오후 2시 반경에 동대구역에서 만났는데, 할머니집에 밤을 따러 가고 싶다고 하여 바로 팔공산 산가로 갔었다. 텃밭에서 아직 덜 익은 밤과 감, 키위를 제 손으로 따고 고구마와 땅콩도 캐 보았다. 그밖에도 참깨를 털어 보고, 호두, 콩, 팥, 대추, 수박, 가지, 토마토, 고추 등도 직접 따며 무척 즐거워했다. 그렇게 딴 것들을 소중히 봉지에 담아 집에 와선 저녁에도 다시 꺼내 보며 놀았다. 열매들뿐만 아니라 그는 공원에서 주운 낙엽 한 장이라도 가볍게 버리는 법이 없었다. 낮에 놀 ..

텃밭 일기 2026.09.18

물가에 호랑이 - 엄원태

물가에 호랑이 엄원태 ​ 강변 자전거 길에서 밤마다 어슬렁거리는 저 사내는, 어둠 속 처절한 고라니 울음소리엔 별 반응 없다가도 한 번씩 우두커니 멈춰 서서 건너편 버드나무 아래쪽 더 어두운 지점을 노려보곤 했다. 거기 호랑이가 있다고,​ 밤 산책길에 마주칠 때마다 내게 아낌없는 경고를 마다하지 않았기에, 나도 그 시선을 따라 그곳을 바라보곤 한다.​ 거기 정말 호랑이가 있다.​ 산그림자 불거진 근육질 윤곽만 컴컴할 뿐, 산과 강의 구분도 안 되는 흑암 덩어리 건너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우리는 잠시,​ 누군가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아무것도 안 보이는 물가에서​ 우리를 지켜보는 호랑이를 노려볼 때가 있다. ​ 평생..

내가 읽은 시 2026.09.18

성유림의 「웃는올빼미 깃털 뽑기」 - ChatGPT

웃는올빼미 깃털 뽑기 성유림 어떤 밤은 완전한 밤이 되어도 어두워지지 않았다 배드민턴장의 사람들이 사라질 때까지 마지막 버스가 종점으로 돌아갈 때까지 집으로 돌아온 내가 패딩을 벗고 새장 문을 열 때까지도 올빼미가 수북한 깃털을 남기고서 밖으로 떠나버렸을 때 나는 분명 발가벗은 몸이었고 텅 빈 새장의 부끄러움을 알 것 같았다 부드러운 깃털을 쓰다듬는다 도망친 새들이 모여든다는 숲을 알고 있어 어두워지지 않는 밤과 가까워지지 않는 숲을 사이에 두고 텅 빈 몸을 휘젓는 바람이 불었다 나뭇잎이 얼룩덜룩 그늘지는 바닥은 빛보다 어둠이 더 많았고 빛나지 않기 위해 서로 엉겨 붙어 있는 그림자들을 보고 있으면 빛이 끔찍한 무언가라는 생각이..

해설시 2026.09.15

특급 인생 - 조 은

특급 인생 조 은 (1960~ ) 내 인생은 특급 슬픔도 특급 고통도 특급 초특급이었을 행복 한 입도 맛보지 못하고 묘혈 속에 누워본다 나 일찍부터 두 다리를 여기 넣고 살았나 여기서 움트고 꽃을 피웠나 수없이 기웠던 희망 달큰한 열매인 줄 알았나 가물가물한 기억 속 특급 하늘이 다가온다 뻐근한 허리를 받쳐준다 처음 맛보는 빈틈없는 일체감!

내가 읽은 시 2026.0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