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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을 거스를 줄 아는 배롱나무

배롱나무는 석달 열흘을 꽃피우는 나무라지만, 그래서 본명이 '백일홍'이지만, 이곳 대구 바닥에서는 꽃의 절정을 이루는 시기가 보통 7월 중순부터 8월 중순까지다. 8월 중순이 지나면 꽃보다 열매가 많아져서 꽃이 그다지 소담스럽게 보이지 않는 것이다. 올해는 그 절정 시기에 꽃을 많이 피운 나무가 눈에 많이 띄지 않았는데, 유난히 긴 가뭄 탓이라 생각되었다. 그런데, 지난 8월 하순에 비가 몇 차례 흠뻑 내리고부터는 배롱나무의 꽃들이 뒤늦게 다시 피어나고 있었다. 아마도 배롱나무는 그동안 꽃 피우기를 많이 참고 있다가 뒤늦게 활짝 터트리는 것 같았다. 9월도 중순에 접어들어 쌀쌀한 오늘 아침, 자전거를 타고 불로동 고분군 앞을 지나가다가 흐드러진 꽃을 사진 찍었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 - 신동옥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 신동옥(1977~ ) 이 시는 비금도 왕소금 같은 별이 뜨는 보드랍고 너른 개펄처럼 끝없는 이야기 우리는 GPS도 지름길도 없는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헤매기 시작했으니까 돌아갈 생각도 없고 어딘가로 가겠다는 것도 아냐 갈기다 만 낙서처럼 내팽개쳐진 하늘에 제멋대로 모양을 바꾸어가며 흔들리는 구름을 봐 그러니 우리가 배를 뒤집고 드러눕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나 네가 사는 세상에도 바다가 있니 빛과 공기를 가려 마시고 이따금 정신을 차리고 바다로 나아가는 고래가 있니 우리도 상어처럼 먹을 걸 찾아 지느러미를 흔들자 겨드랑이에 날개라도 돋친 듯 교차로를 맴돌다가 신호등 너머 허공에서 미끄러지는 메아리 이제 막 죽어가는 내 곁에서 이제 막 태어난 당신이 눈을 뜨..

내가 읽은 시 2026.09.07

달항아리 놓을 곳 - 유계영

달항아리 놓을 곳 유계영 우유 한 방울을 소에게 돌려주려면 비가 좀 와야 해 상한 우유 한 컵 싱크대에 쏟아버리고 오후 내내 수도꼭지를 열어두는 어린이의 마음을 나무랄 순 없어​ 에너지의 차원에서​ 고양이가 책상 끄트머리에 아슬아슬 놓인 물컵을 밀어 메아리 듣는 일에도 까닭은 있어 벼룩시장에서 산 달항아리를 안고 공원을 지날 때 싸움판이 벌어진 노인정에 앳된 경찰이 와서 하는 말을 들었어​ 내 잘못이다 내 잘못이다 하셔야 해요​ 대추 한 봉지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 의논하다 생긴 일이라는데 누가 누구의 소실이냐 나는 엄연히 재혼이다 그런 말 오가더니 할머니들 울었어​ 대추를 나무에게 돌려주려면 비가 좀 와야 좋고 대추는 ..

해설시 2026.08.29

김희준의 「일랑일랑」 감상 - 임종명

일랑일랑 김희준 어린 묘목을 사왔다​ 8월이 살찌고 햇살이 과수원으로 긴 숨을 불어넣던 날 줄무늬 수박이 계절의 한가운데를 가르면 눈물 많은 복숭아가 먼저 생겨 제 울음을 토해내던 날 1,630마일을 건너 신부를 데려왔다​ 늙은 삼촌은 새장가를 갔다 데려온 신부는 맨발이었다 뿌리 휑한 신부는 과수원에 자주 들락거렸다 발이 큰 삼촌이 무서웠는지 맨발인 자기 발이 부끄러웠는지​ 심장이 붉은 토마토가 온점을 찍는 날이 늘어갔다 낯선 곳에서 매미가 울었다 알 수 없는 곳으로 울음이 흘러가고 곳곳에 여름의 문장으로 환한 날이었다​ 여물지 못한 안부가 이국의 단어로 속살거리는 저녁 어둠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스며든다 신부는 설익은 잠을 잤다 곯은 자두는 단내가 심했다 복숭아가 ..

해설시 2026.08.26

김상동의 「국화」 감상 - 김동원

국화 김상동 이런 경우 3개월도 멀다는 거예요 2개월 후에 보도록 합시다 (몇 차례 찬비가 지나가는 동안 기러기 떼는 북국의 긴 밤들을 물고 왔네) 그 더디디더디던 2개월이 다 지나고 내일이면 검사 결과가 나오는데 만에 하나, 아니 둘에 하나 재발이라면 아무 약도 듣지 않을 텐데 생존 기간 중앙값이 4.7개월이라는데 (울타리 위에까지 내려온 해가 따스운 손으로 이마를 짚어 주곤 했지) 밤새 도망만 다니다가 악몽에서 깨어나 찌뿌둥한 아침 마당가에 서리 뒤집어쓴 내가 서 있네 뿌리는 멀쩡하다는 거예요 새봄에 다시 보도록 합시다 ㅡ『대구문학』 2024년 5·6호 -------------------------------------..

해설시 2026.08.22

나의 형 미겔에게 - 세사르 바예호

나의 형 미겔에게 세사르 바예호(1892~1938) 형! 오늘 난 툇마루에 앉아 있어. 형이 여기 없으니까 너무 그리워. 이맘때면 장난을 쳤던 게 생각나. 엄마는 우리를 쓰다듬으며 말씀하셨지. “아이구, 얘들아…” 저녁 기도 전이면 늘 술래잡기를 했듯 지금은 내가 숨을 차례야. 형이 나를 찾지 못해야 하는데. 마루, 현관, 통로. 그다음에는 형이 숨고, 나는 형을 찾지 못해야 해. 그 술래잡기에서 우리가 울었던 게 생각이 나. 형! 8월 어느 날 밤, 형은 새벽녘에 숨었어. 그런데 웃으며 숨는 대신 시무룩했었지. 가버린 시절 그 오후의 형의 쌍둥이는 지금 형을 못 찾아 시무룩해졌어… 벌써 어둠이 영혼에 내리는걸. 형! 너무 늦게..

내가 읽은 시 2026.08.20

나의 시집 - 김영찬

나의 시집 김영찬 나 오늘 새로 집 한 채 지을 것이네 창문만 있고 질문은 없는 집 손님만 있고 주인 없는 집 응답은 있으나 주제도 주체도 없어 이상하지만 말 없는 가구를 사들이고 과묵한 벽면을 색칠해야지 꽃 피울 유실수와 그늘 푸른 관목들 날아가서 돌아오지 않을 새들을 위한 둥지들을 글쎄 꾸며놔도 나쁠 거야 없지 그래야겠네 불필요한 질문과 쓸데없는 대문은 생략했지만 누구나 함부로 지붕 뜯고 들어와 한참을 울다가도 아무 상관 없는 집 있어도 좋은 집 없어도 좋은 집 처음부터 끝까지 울타리는 없지만 울타리 둘러치고 앉아 담장 밖의 바람 소릴 끌어모으기 아주 편한 집 푹신한 소파에 기대 잠깐 가면을 취해도 햇살 달려..

내가 읽은 시 2026.08.20

아기 앞에서 - 김기택

아기 앞에서 김기택(1957~) 아직 제가 태어나지 않은 것 같은 표정으로 몸이 생겼는지 모르는 것 같은 눈으로 유아차에 앉아 있던 아기가 내 눈과 마주친다, 순간 아기가 다칠 것 같다 내 눈빛에서 튀어 나가는 이빨과 발톱을 어떻게 눈알에 붙들어 매야 하나 난감하다 자신을 방어할 어떤 몸짓도 하지 않고 아기는 편한 자세로 앉아 있다 끊임없이 뭔가를 방어하고 있던 내 두려움도 아기 앞에서 다 들켜버린다 꽉 쥐고 있던 주먹이 풀리고 관절이 연약해지며 내 안에서 조용히 무너지는 것이 있다 혀에 가득한 말들은 발음을 잃고 표정은 뭘 해야 할지 몰라 입 벌리고 멍해진다 -----------------------------------------..

내가 읽은 시 2026.0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