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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 데스노스의 「목소리」 - 나희덕

목소리 로베르 데스노스(1900~1945) 목소리 하나, 저 멀리서 당도한 목소리 하나 귓가에 더 이상 울리지 않는다, 북소리 같은, 감추어진, 목소리 하나가, 그럼에도, 또렷이, 우리에게 도착한다. 그 목소리 무덤에서 나온 듯해도 그 목소리 오로지 여름과 봄을 이야기할 뿐이다. 그 목소리 기쁨으로 육신을 가득 채워 주고, 그 목소리 입술에 미소의 불을 밝혀 놓는다. 그 목소리 나는 듣는다. 오로지 그것은 저 요란한 삶과 전쟁터를, 부서지는 천둥소리와 속닥거리는 수다를 가로질러 당도한 인간의 목소리이리라. 당신은? 이 목소리가 당신에게 들리지 않나요? 목소리는 말한다 “고통은 짧게 지나갈 겁니다” 목소리는 말한다 “아름다운 시절이 머지않았습니다..

해설시 2026.10.20

뒷간에 앉아 보낸 세월 - 박두규

뒷간에 앉아 보낸 세월 박두규(1956~ ) 두텁나루숲 뒷간에 앉아 있으면 강이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온다. 서서히 안개가 걷히며 강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쪼그려 앉아 바라보는 두텁나루의 아침은 또 다른 세상이다. 새들은 날아오르거나 자맥질하거나 바위에 외다리로 서 있다. 그래, 나도 그러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경이로운 풍경 속 점 하나로 쪼그려 앉아 있는 것이다. 그 세상은 그 세상대로 이 세상은 이 세상대로 쪼그려 앉아 다리가 저린 세상, 그렇게 하루가 가고 한 해가 가고 한 생이 간다. 그렇게 지리산 어느 구석 바위틈에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구절초 하나 홀로 피었다 진다. ―『두텁나루숲 뒷간에 앉아』 솔출판사, 2025. ------------------------------..

내가 읽은 시 2026.10.19

주인 - 이홍섭

주인 이홍섭(1965~ ) 아이가 힘겹게 뒤집기를 시작하면서 이 철없는 세상을 용서하기로 했다 마흔 넘어 찾아온 아이가 외로 자기 시작하면서 이 외로운 세상을 용서하기로 했다 바람에 뒤집히는 감잎 한 장 엉덩이를 치켜들고 전진하는 애벌레 한 마리도 여기 이 세상의 어여쁜 주인이시다 힘겹고, 외로워도 가야 하는 세상이 저기에 있다 —『터미널』 문학동네, 2011

내가 읽은 시 2026.10.15

앤 카슨의 「신의 일」 - 나희덕

신의 일 앤 카슨 Anne Carson(1950~ ) 부엌에 드는 달빛은 신의 표식이다. 당신 자신의 배꼽으로부터 당신을 뽑아내는 검은 흡입관 같은 슬픔, 또 불교도들이 ‘무심(無心)’이라고 부르는 것은 신의 표식이다. 인간의 대화와 나란히 이어지는, 채찍질 같은 막다른 골목들은 신의 표식이다. 신 스스로의 평온함은 신의 표식이다. 감자나 돈의 놀랍도록 차가운 냄새. 침묵의 견고한 조각들. 이 다양한 표식들로부터 당신은 할 일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슬픔은 걷어버려라, 그것은 할 일을 가리고 있는 덮개다. ------------------------------ 올해 노벨 문학상은 캐나다 시인 앤 카슨에게 주어졌다. 앤 카슨..

해설시 2026.10.12

반구대 암각화 - 이명윤

반구대 암각화 이명윤 저 호수에 낚싯바늘을 던지면 시간의 파문이 일고 와와, 수천 년 전의 함성과 북방긴수염고래와 작살을 든 사내들이 줄줄이 공중으로 솟구쳐 오를 것 같다 망원경으로 보세요 배는 심연 속으로 가라앉고 바람은 암벽 속에 꼬리를 감추었지만 고래의 피 묻은 손이 철철 검은 아이를 받아내고 동굴 속 긴 울음을 먹여 살린 우리는 위대한 사냥꾼의 후예들, 일행 중 누군가 가늘게 탄식했다 오늘은 물에 잠겨 고래가 가져간 손목을 볼 수가 없군요 지금도 공중을 유영하는 치명적인 햇살 혹은 화살에 대하여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우린 모두 먼 길을 돌아 여기에 왔음을 안다 암벽 속의 사내가 웃고 있었다 이곳에 오실 땐 고단한 사냥..

내가 읽은 시 2026.10.09

마루 밑에 살던 것들에게 - 송진권

마루 밑에 살던 것들에게 송진권 괭이같이 앙알대며 쏟아붓는 햇볕도 더는 비집고 들어갈 수 없어 무춤하니 멈춘 뜰팡에 헝겊 덧대 기운 고무신 밀어내고 댓돌에 올라앉은 강아지 내려놓고 마루 밑을 들여다보면 마루 틈으로 스며든 햇볕에 푸른 물 든 감자 밀어내며 들여다보면 귀퉁이 깨진 호롱아 내가 흘린 유리구슬들아 찢어진 털신아 귀뚜라미와 노래기와 지네 들아 밤송이로 막아놓은 쥐구멍 속의 쥐들아 숯검댕 묻은 몽당빗자루야 잘들 있었는가 여기서 잘들 살고 있었는가

내가 읽은 시 2026.10.08

귀가 슬픈 사람 - 서수찬

귀가 슬픈 사람 서수찬 나는 아래층 치킨 집 매상을 계단을 밟고 안 내려가 봐도 다 안다 영업이 끝나고 셔터 내리는 소리에 그날 매상의 이력이 다 적혀 있다 나는 장부를 들여다보듯 읽는다 매상이 오른 날의 셔터 소리는 거침이 없이 부드럽게 촤르르 촤르르 내려간다 셔터를 내리는 손길이 부르는 노래가 내 달팽이관에 즐겁게 모인다 매상이 저조한 날에는 셔터가 마지못해 내려오느라 끼걱끼걱 찌그러진 소리를 낸다 내 귀는 얼른 가서 안 내려오려는 셔터를 억지로라도 도와서 내려주고 온다 어쩌자고 치킨 집 주인은 내 귀에다 가게의 비밀을 속속들이 다 적는 걸까 ―『버스기사 S시인의 운행일지』 시인동네, 2022 ---------..

내가 읽은 시 2026.10.08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노벨상」 - 나희덕

노벨상 보리스 파스테르나크(1890~1960) 나는 덫에 갇힌 짐승처럼 끝장났다. 어딘가에 있을 사람들, 자유, 빛. 그러나 나를 추적하는 시끄러운 소리. 내가 밖으로 나갈 길은 없다. 어두운 숲과 연못 기슭, 쓰러진 전나무의 통나무. 길은 사방으로 잘려 있다. 무슨 일이 닥치든 상관없다. 내가 무슨 더러운 일을 했단 말인가? 내가 살인자인가? 악당인가? 나는 내 땅의 아름다움을 써서 온 세상이 울게 만들었을 뿐. 거의 무덤가에서 그래도 나는 그때가, 선한 정신이 비겁하고 사악한 세력을 물리칠 그날이 오리라 믿는다. ------------------------ 노벨 문학상 발표일이 가까워지니 이 시가 떠오른다. 보리스 파스테르..

해설시 2026.10.07

김진덕 여사의 오월 - 고영서

김진덕 여사의 오월 -빛고을 시편 고영서 녹동에서 반나절 광주에 가 닿으면 망월동에서 또 반나절 네 이름 석 자 쓰다듬으러 왔다 아무도 주검을 못 보았으니 제대로 죽지도 못헌 내 새끼 네 아부진 또 멀찍이 서서 저렇듯 속울음만 삼키는구나 뒷짐 지고 모르는 척 고개 돌려도 가슴에 눈물이 그렁그렁 해 시신 없는 무덤이 무슨 소용이냐 남들은 뒤에서 수군댄다만 구천을 떠도는 너의 혼이기에 자석처럼 쓸려오는 에미의 마음 열아홉 너를 만나고 가는 날은 하루해가 짧아 쓸쓸히 저물어 돌아가는 것을 어디에 누워서 꿈을 꾸는 거냐 옥환아, ―『기린 울음』 삶창, 2007

내가 읽은 시 2026.10.07

처서기 - 박성룡

처서기(處暑記) 박성룡(1932~2002) 처서 가까운 이 깊은 밤 천지를 울리던 우레소리들도 이젠 마치 우리들의 이마에 땀방울이 걷히듯 먼 산맥의 등성이를 넘어가나 보다. 역시 나는 자정을 넘어 이 새벽의 나른한 시간까지는 고단한 꿈길을 참고 견뎌야만 처음으로 가을이 이 땅을 찾아오는 벌레 설레이는 소리라도 듣게 되나 보다. 어떤 것은 명주실같이 빛나는 시름을, 어떤 것은 재깍재깍 녹슨 가윗소리로, 어떤 것은 또 엷은 거미줄에라도 걸려 파닥거리는 시늉으로 들리게 마련이지만, 그것들은 벌써 어떤 곳에서는 깊은 우물을 이루기도 하고 손이 시릴 만큼 차가운 개울물 소리를 이루기도 했다. 처서 가까운 이 깊은 밤 나는 아직은 깨..

내가 읽은 시 2026.1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