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2155

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 - 올라브 하우게

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 올라브 하우게 Olav H. Hauge(1908~1994) 눈이 내린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춤추며 내리는 눈송이에 서투른 창이라도 겨눌 것인가 아니면 어린 나무를 감싸안고 내가 눈을 맞을 것인가​ 저녁 정원을 막대를 들고 다닌다 도우려고. 그저 막대로 두드려주거나 가지 끝을 당겨준다. 사과나무가 휘어졌다가 돌아와 설 때는 온몸에 눈을 맞는다​ 얼마나 당당한가 어린 나무들은 바람 아니면 어디에도 굽힌 적이 없다 ㅡ 바람과의 어울림도 짜릿한 놀이일 뿐이다 열매를 맺어본 나무들은 한 아름 눈을 안고 있다 안고 있다는 생각도 없이.

외국의 시 2026.09.30

올라브 하우게의 「비 오는 날 늙은 참나무 아래 멈춰서다」 - 나희덕

비 오는 날 늙은 참나무 아래 멈춰서다 올라브 하우게 Olav H. Hauge(1908~1994) 오직 비 때문에 길가 늙은 참나무 아래 멈춰선 건 아닙니다, 넓은 모자 아래 있으면 안심이 되죠 나무와 나의 오랜 우정으로 거기에 조용히 서있던 거지요 나뭇잎에 떨어지는 비를 들으며 날이 어찌 될지 내다보며 기다리며 이해하며. 이 세계도 늙었다고 나무와 나는 생각해요 함께 나이 들어가는 거죠. 오늘 나는 비를 좀 맞았죠 잎들이 우수수 졌거든요 공기에서 세월 냄새가 나네요 내 머리카락에서도. -------------------------------- 진흙탕 같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싶을 때, 울라브 하우게의 시집 (임선기 옮김)를 읽는..

해설시 2026.09.29

사람의 밥 - 이준관

사람의 밥 이준관(1949~) 사람이 남긴 밥을 개가 먹는다 꼬리를 내리고 발톱을 오므리고 아주 평화롭게 밥을 먹는다 밥을 위해 아귀다툼을 벌이던 사람의 밥 어디에 저렇게 천연스런 평화가 깃들어 있었을까 콧등에 밥풀을 잔뜩 묻히고 참새랑 병아리랑 불러와 함께 개는 평화롭게 밥을 먹는다 배불리 먹어 밥물로 퉁퉁 불은 젖으로 강아지를 먹이고 밤에는 밤새워 우는 귀또리 새끼들도 불러와 품에 안고 먹인다 ----------------------------------- 나물이 먹고 싶을 때 들르는 동네 반찬집이 있다. 어제는 시금치무침이 없는지 물었다가 사장님에게 한소리 들었다. “지금 시금치가 얼마나 비싼데! 무쳐 봤자 ..

내가 읽은 시 2026.09.28

추석날 아침 - 홍신선

추석날 아침 홍신선(1944~ ) 차례 끝나 병풍 걷는데 문득 기러기 소리 들린다. 작년에 날아왔던 길 더듬더듬 다시 더듬어 오는 하늘에 깔린 기러기 몇 향합에 사른 한 오라기 연기에 이끌려 와 흠향(歆饗) 다 하고 구천으로 되돌아가는 누구누구 일행들 같다. 여느 날이 여느 날이고 그날이 그날인 세월 여전하지만 사노라 아귀다툼인 세상 내려다보며 그래도 저 삶이 그중 살 만했다고 누구누구와 기러기가 일행처럼 낄,낄,낄 마주 터놓고 웃는 웃음소리도 이 아침 나는 천심의 푸른 열두 폭에다 병풍 걷듯 접어 간직노니 가윗날 추석이다.

내가 읽은 시 2026.09.27

망토

망토 아도니스 우리 집에는 망토가 있다, 아버지의 삶으로 재단하고 고난으로 꿰맨. 그것이 내게 말한다ㅡ그의 거적자리 위에서, 너는 잎을 벗긴 나뭇가지 같았지, 그리고 너는 그의 생각 속에 있었어, 언제나 그리고 영원히. 우리 집에는 망토가 있다, 버려지고 헝클어진. 바람에 붙들려 그것은 나를 데려간다 진흙과 돌로 만든 아버지의 지붕으로, 그리고 망토의 구멍들 사이로 나는 엿본다 아버지의 감싸안는 두 팔을, 아버지의 심장을, 그의 심장에 내려앉은 슬픔이 나를 감싸며 지켜주고, 내 길을 기도로 가득 채우고는 나를 피리처럼, 숲처럼, 노래처럼 뒤에 남겨두고 떠난다.

아도니스 2026.09.26

시편

시편 아도니스 Adonis(1930~ ) 나는 새벽이자 맨 마지막에 오는 자ㅡ번개의 입에 얼굴을 대고 꿈들에게 나의 빵이 되라 명한다. 나는 대지의 피부를 씻기고, 나비 한 마리를 깃발처럼 들어 올려 그 위에 내 이름들을 쓴다. 나무 한 그루가 제 이름을 바꾸어 나에게 합류하고, 돌들은 내 목소리 속에서 자신들을 씻어내며, 평원은 나의 페이지들과 함께 잎을 터뜨린다ㅡ이들이 나의 군대이고, 나의 무기는 풀. 나는 두 겹이고, 세 겹이다, 바람과 돌에 내 얼굴을 새기고, 물 위에 내 얼굴을 새긴다, 나는 지평선에 거한다. 나는 파도의 가면을 쓰고, 바다는 나의 쌍둥이, 나의 짝. 나는 먼 곳을 향해 나아가고, 먼 곳은 거기 그대로 있다. 그리하여 나는 도착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빛난다..

아도니스 2026.09.26

오디세우스

오디세우스 아도니스 "그대는 누구인가? 어는 산꼭대기에서 왔는가, 그대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순결한 언어여?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그대는 어떤 깃발을 들었거나 내던졌는가? 그걸 꼭 물어야만 하겠소, 알키노오스*여? 그대는 덮개를 벗겨서 죽은 이의 얼굴을 보려는 것이오? 그대는 내가 어느 산꼭대기에서 왔는지 물었고, 내 이름도 물었소ㅡ내 이름은 오디세우스요. 나는 경계 없는 땅에서 왔소, 사람들이 등에 짊어지고 가는 땅에서. 나는 이곳에서 길을 잃었고, 저곳에서 내 시들과 함께 길을 잃었소, 그리하여 지금 공포와 메마름 한가운데 서 있소, 머무는 법도 모르고, 돌아가는 법도 모른 채. * 파이아케스족의 왕으로, 오디세우스는 난파한 자신을 ..

아도니스 2026.09.26

그대의 눈은 나를 보지 못했다

그대의 눈은 나를 보지 못했다 아도니스 Adonis(1930~ ) 그대의 눈은 나를 보지 못했다, 창조하는 정자(精子)의 물처럼 순결한 나를, 그대의 눈은 멀리서 다가오는 나를 보지 못했다. 봉헌의 행렬 속에서 발걸음마다 풀과 벼락을 남기며 다가오는 나를. 내일, 내일 봄의 불길 속에서 그대는 알게 되리라, 내가 무리의 도살자임을, 그대는 알게 되리라, 내가 씨 뿌리는 자임을, 내일, 내일 그대는 그대 자신의 두 눈으로 나를 보게 되리라.

아도니스 2026.09.26

바람의 왕

바람의 왕 아도니스 Adonis(1930~ ) 국경이 나의 깃발ㅡ그것은 아무도 만나지 않고,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는다. 국경이 나의 노래. 나는 꽃을 동원하고 나무를 징집한다, 하늘을 주랑처럼 쭉 펼치고, 사랑하고 살고, 나의 말(言) 속에서 태어난다. 나는 아침의 깃발 아래서 나비를 모은다, 열매를 가꾸고 비와 함께 밤을 보낸다, 구름과 그 종소리 속에서, 바닷속에서. 나는 별들을 불러내 하늘에 못 박으며 스스로를 바람의 왕이라고 선포한다. ㅡ『다마스쿠스인 미흐야르의 노래』 황유원 옮김, 은행나무 2026.

아도니스 2026.0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