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2159

나는 날마다 파혼한다 - 임효빈

나는 날마다 파혼한다 임효빈(1966~ ) 헤르만 헤세는 세 번 결혼하고 두 번 이혼했다고 한다 첫 번째 부인은 사랑의 병에 걸려 죽고 두 번째 부인의 사랑은 헤세답게 식었지만 늙은 헤세는 세 번째에도 사랑을 걸었단다 그는 사랑을 만나기 위해 헤어지고 검은 원피스를 입은 그녀들의 사랑은 하얀 드레스에 있었단다 헤세의 사랑은 슬픔에 잠겼고 오래된 사랑은 자정을 위해 스스로 불타버렸단다 나비 날갯짓처럼 사랑을 위해 이혼한 헤세 나비와 헤세는 사랑을 모았지만 꽃술에 걸린 그녀들의 사랑은 꽃만을 기억했단다 꽃이 궁금한 사람들이 헤세에게 물으면 헤세는 주저 없이 어떤 사랑도 첫사랑이라 말했단다 나는 나를 사랑하기 위해 어제의 나와 파혼했지만 언제까지 파혼해야 나를 만날 수 있을..

내가 읽은 시 2026.10.04

날은 흐리고 싸락눈이 내렸다 - 김용만

날은 흐리고 싸락눈이 내렸다 김용만 날은 흐리고 싸락눈이 내렸다 눈 내리고 흐린 날은 그리운 것들도 떠돈다 소죽솥에 불 메우고 아버지는 마당을 쓸었다 큰눈이 오려나 강 건너 앞산 밑이 자욱하다 황토 마당에 쓸린 싸락눈이 콩고물처럼 밀린다 쓸지 않아도 될 마당이지만 묵묵히 빗질하는 아버지는 엄숙했다 저녁 지을 쌀 까불다 챙이 끝을 쳐 싸라기 한줌 마당에 던져주고 자욱한 앞산 바라보는 어머니 손이 붉게 젖어 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눈이 오면 설레었다는 것을 아버지 나이 되어 알았다 아버지 성긴 머리 위 오래 머물던 싸락눈 닭장 문 걸고 토방에 발을 터는 아버지의 가지런한 하루 ―『기역은 가시 히읗은 황토』창비, 2025

내가 읽은 시 2026.10.04

이승희의 「파주 9」 해설 - 최형심

파주 9 이승희(1965∼ ) 별 사이로 뱀 한 마리 오래 지나간다 비로소 낮으로부터 놓여난 너는 발가락이 많이 굽었다 질문도 없이 만나는 생처럼 구부정한 어깨를 지나면 이국의 밤이 따뜻해질까 국수 먹으러 갈까 카드점을 보러 갈까 좀 아파 보여 오늘 뜨는 별은 다 모르는 사이 같아서 가만히 만져보는 어둠 반쯤 둥근 무덤 같구나 어느 부분이 지워졌는지 알 수 없어서 막차가 사라진 곳으로 자라는 식물들 너무 멀리가지는 말자고 남은 얼굴로 웃어주자 여기 없는 그 모든 게 별이 된다는 우린 그런 이야기를 한다 ------------------------------------- 파주라는 지명은 지도 위의 가장자리를 떠올리게..

해설시 2026.10.03

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 - 올라브 하우게

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 올라브 하우게 Olav H. Hauge(1908~1994) 눈이 내린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춤추며 내리는 눈송이에 서투른 창이라도 겨눌 것인가 아니면 어린 나무를 감싸안고 내가 눈을 맞을 것인가​ 저녁 정원을 막대를 들고 다닌다 도우려고. 그저 막대로 두드려주거나 가지 끝을 당겨준다. 사과나무가 휘어졌다가 돌아와 설 때는 온몸에 눈을 맞는다​ 얼마나 당당한가 어린 나무들은 바람 아니면 어디에도 굽힌 적이 없다 ㅡ 바람과의 어울림도 짜릿한 놀이일 뿐이다 열매를 맺어본 나무들은 한 아름 눈을 안고 있다 안고 있다는 생각도 없이.

외국의 시 2026.09.30

올라브 하우게의 「비 오는 날 늙은 참나무 아래 멈춰서다」 - 나희덕

비 오는 날 늙은 참나무 아래 멈춰서다 올라브 하우게 Olav H. Hauge(1908~1994) 오직 비 때문에 길가 늙은 참나무 아래 멈춰선 건 아닙니다, 넓은 모자 아래 있으면 안심이 되죠 나무와 나의 오랜 우정으로 거기에 조용히 서있던 거지요 나뭇잎에 떨어지는 비를 들으며 날이 어찌 될지 내다보며 기다리며 이해하며. 이 세계도 늙었다고 나무와 나는 생각해요 함께 나이 들어가는 거죠. 오늘 나는 비를 좀 맞았죠 잎들이 우수수 졌거든요 공기에서 세월 냄새가 나네요 내 머리카락에서도. -------------------------------- 진흙탕 같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싶을 때, 울라브 하우게의 시집 (임선기 옮김)를 읽는..

해설시 2026.09.29

사람의 밥 - 이준관

사람의 밥 이준관(1949~) 사람이 남긴 밥을 개가 먹는다 꼬리를 내리고 발톱을 오므리고 아주 평화롭게 밥을 먹는다 밥을 위해 아귀다툼을 벌이던 사람의 밥 어디에 저렇게 천연스런 평화가 깃들어 있었을까 콧등에 밥풀을 잔뜩 묻히고 참새랑 병아리랑 불러와 함께 개는 평화롭게 밥을 먹는다 배불리 먹어 밥물로 퉁퉁 불은 젖으로 강아지를 먹이고 밤에는 밤새워 우는 귀또리 새끼들도 불러와 품에 안고 먹인다 ----------------------------------- 나물이 먹고 싶을 때 들르는 동네 반찬집이 있다. 어제는 시금치무침이 없는지 물었다가 사장님에게 한소리 들었다. “지금 시금치가 얼마나 비싼데! 무쳐 봤자 ..

내가 읽은 시 2026.09.28

추석날 아침 - 홍신선

추석날 아침 홍신선(1944~ ) 차례 끝나 병풍 걷는데 문득 기러기 소리 들린다. 작년에 날아왔던 길 더듬더듬 다시 더듬어 오는 하늘에 깔린 기러기 몇 향합에 사른 한 오라기 연기에 이끌려 와 흠향(歆饗) 다 하고 구천으로 되돌아가는 누구누구 일행들 같다. 여느 날이 여느 날이고 그날이 그날인 세월 여전하지만 사노라 아귀다툼인 세상 내려다보며 그래도 저 삶이 그중 살 만했다고 누구누구와 기러기가 일행처럼 낄,낄,낄 마주 터놓고 웃는 웃음소리도 이 아침 나는 천심의 푸른 열두 폭에다 병풍 걷듯 접어 간직노니 가윗날 추석이다.

내가 읽은 시 2026.09.27

망토

망토 아도니스 우리 집에는 망토가 있다, 아버지의 삶으로 재단하고 고난으로 꿰맨. 그것이 내게 말한다ㅡ그의 거적자리 위에서, 너는 잎을 벗긴 나뭇가지 같았지, 그리고 너는 그의 생각 속에 있었어, 언제나 그리고 영원히. 우리 집에는 망토가 있다, 버려지고 헝클어진. 바람에 붙들려 그것은 나를 데려간다 진흙과 돌로 만든 아버지의 지붕으로, 그리고 망토의 구멍들 사이로 나는 엿본다 아버지의 감싸안는 두 팔을, 아버지의 심장을, 그의 심장에 내려앉은 슬픔이 나를 감싸며 지켜주고, 내 길을 기도로 가득 채우고는 나를 피리처럼, 숲처럼, 노래처럼 뒤에 남겨두고 떠난다.

아도니스 2026.09.26

시편

시편 아도니스 Adonis(1930~ ) 나는 새벽이자 맨 마지막에 오는 자ㅡ번개의 입에 얼굴을 대고 꿈들에게 나의 빵이 되라 명한다. 나는 대지의 피부를 씻기고, 나비 한 마리를 깃발처럼 들어 올려 그 위에 내 이름들을 쓴다. 나무 한 그루가 제 이름을 바꾸어 나에게 합류하고, 돌들은 내 목소리 속에서 자신들을 씻어내며, 평원은 나의 페이지들과 함께 잎을 터뜨린다ㅡ이들이 나의 군대이고, 나의 무기는 풀. 나는 두 겹이고, 세 겹이다, 바람과 돌에 내 얼굴을 새기고, 물 위에 내 얼굴을 새긴다, 나는 지평선에 거한다. 나는 파도의 가면을 쓰고, 바다는 나의 쌍둥이, 나의 짝. 나는 먼 곳을 향해 나아가고, 먼 곳은 거기 그대로 있다. 그리하여 나는 도착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빛난다..

아도니스 2026.09.26

오디세우스

오디세우스 아도니스 "그대는 누구인가? 어는 산꼭대기에서 왔는가, 그대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순결한 언어여?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그대는 어떤 깃발을 들었거나 내던졌는가? 그걸 꼭 물어야만 하겠소, 알키노오스*여? 그대는 덮개를 벗겨서 죽은 이의 얼굴을 보려는 것이오? 그대는 내가 어느 산꼭대기에서 왔는지 물었고, 내 이름도 물었소ㅡ내 이름은 오디세우스요. 나는 경계 없는 땅에서 왔소, 사람들이 등에 짊어지고 가는 땅에서. 나는 이곳에서 길을 잃었고, 저곳에서 내 시들과 함께 길을 잃었소, 그리하여 지금 공포와 메마름 한가운데 서 있소, 머무는 법도 모르고, 돌아가는 법도 모른 채. * 파이아케스족의 왕으로, 오디세우스는 난파한 자신을 ..

아도니스 2026.0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