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2171

반구대 암각화 - 이명윤

반구대 암각화 이명윤 저 호수에 낚싯바늘을 던지면 시간의 파문이 일고 와와, 수천 년 전의 함성과 북방긴수염고래와 작살을 든 사내들이 줄줄이 공중으로 솟구쳐 오를 것 같다 망원경으로 보세요 배는 심연 속으로 가라앉고 바람은 암벽 속에 꼬리를 감추었지만 고래의 피 묻은 손이 철철 검은 아이를 받아내고 동굴 속 긴 울음을 먹여 살린 우리는 위대한 사냥꾼의 후예들, 일행 중 누군가 가늘게 탄식했다 오늘은 물에 잠겨 고래가 가져간 손목을 볼 수가 없군요 지금도 공중을 유영하는 치명적인 햇살 혹은 화살에 대하여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우린 모두 먼 길을 돌아 여기에 왔음을 안다 암벽 속의 사내가 웃고 있었다 이곳에 오실 땐 고단한 사냥..

내가 읽은 시 2026.10.09

마루 밑에 살던 것들에게 - 송진권

마루 밑에 살던 것들에게 송진권 괭이같이 앙알대며 쏟아붓는 햇볕도 더는 비집고 들어갈 수 없어 무춤하니 멈춘 뜰팡에 헝겊 덧대 기운 고무신 밀어내고 댓돌에 올라앉은 강아지 내려놓고 마루 밑을 들여다보면 마루 틈으로 스며든 햇볕에 푸른 물 든 감자 밀어내며 들여다보면 귀퉁이 깨진 호롱아 내가 흘린 유리구슬들아 찢어진 털신아 귀뚜라미와 노래기와 지네 들아 밤송이로 막아놓은 쥐구멍 속의 쥐들아 숯검댕 묻은 몽당빗자루야 잘들 있었는가 여기서 잘들 살고 있었는가

내가 읽은 시 2026.10.08

귀가 슬픈 사람 - 서수찬

귀가 슬픈 사람 서수찬 나는 아래층 치킨 집 매상을 계단을 밟고 안 내려가 봐도 다 안다 영업이 끝나고 셔터 내리는 소리에 그날 매상의 이력이 다 적혀 있다 나는 장부를 들여다보듯 읽는다 매상이 오른 날의 셔터 소리는 거침이 없이 부드럽게 촤르르 촤르르 내려간다 셔터를 내리는 손길이 부르는 노래가 내 달팽이관에 즐겁게 모인다 매상이 저조한 날에는 셔터가 마지못해 내려오느라 끼걱끼걱 찌그러진 소리를 낸다 내 귀는 얼른 가서 안 내려오려는 셔터를 억지로라도 도와서 내려주고 온다 어쩌자고 치킨 집 주인은 내 귀에다 가게의 비밀을 속속들이 다 적는 걸까 ―『버스기사 S시인의 운행일지』 시인동네, 2022 ---------..

내가 읽은 시 2026.10.08

리듬의 역사 - 손택수

리듬의 역사 손택수 동대구역 광장 감시 카메라의 삼엄한 불침번 속에 그가 돌아왔다 비상계엄이 돌아오고 태엽 인형처럼 눈을 비비고 일어나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노래를 따라 하던 아이도 돌아왔다 하굣길엔 동요 대신 병영의 노래들을 불렀지 어김없이 애국가와 함께 오던 저녁은 길을 가도 가도 동작 그만 얼음땡 놀이라도 하듯 얼음왕국 주술이 풀리길 기다렸지 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납니다 이불 너머로 훔쳐보던 명화극장과 뉴스와 밤의 쇼들 매혹은 금기 속에서 더 생생해진다는 걸 일찌감치 알게 해준 그가 돌아왔다 비상계엄이 돌아오고 동지 밤에 사발통문이 폭발하는구나 응원봉이 반짝이고 장갑차와 헬기와 탱크 대신 논밭 갈아엎던 트..

내가 읽은 시 2026.10.07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노벨상』 - 나희덕

노벨상 보리스 파스테르나크(1890~1960) 나는 덫에 갇힌 짐승처럼 끝장났다. 어딘가에 있을 사람들, 자유, 빛. 그러나 나를 추적하는 시끄러운 소리. 내가 밖으로 나갈 길은 없다. 어두운 숲과 연못 기슭, 쓰러진 전나무의 통나무. 길은 사방으로 잘려 있다. 무슨 일이 닥치든 상관없다. 내가 무슨 더러운 일을 했단 말인가? 내가 살인자인가? 악당인가? 나는 내 땅의 아름다움을 써서 온 세상이 울게 만들었을 뿐. 거의 무덤가에서 그래도 나는 그때가, 선한 정신이 비겁하고 사악한 세력을 물리칠 그날이 오리라 믿는다. ------------------------ 노벨 문학상 발표일이 가까워지니 이 시가 떠오른다. 보리스 파스테르..

해설시 2026.10.07

김진덕 여사의 오월 - 고영서

김진덕 여사의 오월 -빛고을 시편 고영서 녹동에서 반나절 광주에 가 닿으면 망월동에서 또 반나절 네 이름 석 자 쓰다듬으러 왔다 아무도 주검을 못 보았으니 제대로 죽지도 못헌 내 새끼 네 아부진 또 멀찍이 서서 저렇듯 속울음만 삼키는구나 뒷짐 지고 모르는 척 고개 돌려도 가슴에 눈물이 그렁그렁 해 시신 없는 무덤이 무슨 소용이냐 남들은 뒤에서 수군댄다만 구천을 떠도는 너의 혼이기에 자석처럼 쓸려오는 에미의 마음 열아홉 너를 만나고 가는 날은 하루해가 짧아 쓸쓸히 저물어 돌아가는 것을 어디에 누워서 꿈을 꾸는 거냐 옥환아, ―『기린 울음』 삶창, 2007

내가 읽은 시 2026.10.07

처서기 - 박성룡

처서기(處暑記) 박성룡(1932~2002) 처서 가까운 이 깊은 밤 천지를 울리던 우레소리들도 이젠 마치 우리들의 이마에 땀방울이 걷히듯 먼 산맥의 등성이를 넘어가나 보다. 역시 나는 자정을 넘어 이 새벽의 나른한 시간까지는 고단한 꿈길을 참고 견뎌야만 처음으로 가을이 이 땅을 찾아오는 벌레 설레이는 소리라도 듣게 되나 보다. 어떤 것은 명주실같이 빛나는 시름을, 어떤 것은 재깍재깍 녹슨 가윗소리로, 어떤 것은 또 엷은 거미줄에라도 걸려 파닥거리는 시늉으로 들리게 마련이지만, 그것들은 벌써 어떤 곳에서는 깊은 우물을 이루기도 하고 손이 시릴 만큼 차가운 개울물 소리를 이루기도 했다. 처서 가까운 이 깊은 밤 나는 아직은 깨..

내가 읽은 시 2026.10.07

폐가 - 김수열

폐가 김수열 삼십 년도 훌쩍 넘었지만 어제 같은 기억이 있다 표선에서 성읍 지나 걸어 걸어 낡고 반갑고 적막한 초가 몇 채 만났다 물 한 모금 얻을까 정낭 지나 안으로 들었다 삼방문도 정지문도 닫혀 있었다 있수과? 있수과? 기척이 없었다 조심스레 삼방문 열었다 아, 족대가 족대가 마루널 틈새 틈새로 족대가 시퍼런 족대가 퍼렇게 구짝구짝 초가를 뚫고 나란히 나란히 삼방 가득 족대가 숨이 탁 끊기고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삼복인데 등골이 서늘했다 대천동 어디쯤이었고 내가 만난 첫 번째 4‧3이었다. ―『날혼』 삶창, 2025 ------------------------------------ 삼십 년도 훌쩍 지난 시기라면 4·3에 대한 진상규명이 ..

내가 읽은 시 2026.10.06

도서관의 도서관 - ​임효빈

도서관의 도서관​ 임효빈(1966~ )​​ 한 노인의 죽음은 한 개의 도서관이 사라지는 거라 했다​ 누군가 한 권의 책을 읽을 때 나는 열람실의 빈 책상이었다 책상은 내가 일어나주길 바랐지만​ 누군가의 뒤를 따라갔으나 나의 슬픔은 부족했고 무수한 입이었지만 말 한마디 못했고 소리 내어 나를 읽을 수도 없었다​ 대여 목록 신청서에는 첨언이 많아 열람의 눈이 쏟아지고 도서관은 이동하기 위해 흔들렸다​ 당신은 이미 검은 표지를 넘겨 놓았고 반출은 모퉁이와 모퉁이를 닳게 하여 손이 탄 만큼 하나의 평화가 타오른다는 가설이 생겨났다​ 몇 페이지씩 뜯겨나가도 도서관 첫 목록 첫 페이지엔 당신의 이름이 꽂혀 있어​ 책의 완결을 위해 읽을 수 없는 곳을 읽었을 때 나는 걸어가 문을 닫..

내가 읽은 시 2026.10.06

저문 바람의 노래 - 고재종

저문 바람의 노래 고재종(1957~ ) 바람이 쓰다듬는 저물녘의 노래는 시오리 읍내 장에 갔다가 뉘엿뉘엿 돌아오던 아버지의 두루마기 자락처럼 지극하네 불콰해진 강물, 반짝이는 고요를 깨며 누군가를 몰래 호출하는 뻐꾸기 이때쯤 바람은 수수밭 가를 서성거렸지 늘 굽은 등을 보이며 숨어드는 쓸쓸한 꿈들과 짐짓 보람도 없이 저미는 시간의 갈기조차 가만가만 다독이던 바람의 노래 노을빛, 휘파람소리 차마 말할 수 없는 것들은 능선으로 굽이친다네 이제는 노래로도 모자라 노래도 버리고 너무 멀어져서 명치끝만 타는 사랑의 길목 어둡지 않게 하나 둘 별들을 송출하는 분꽃 나팔들 내 늦은 귀가를 조율하던 어머니의 마루에서 오늘은 무엇을 넣고 빼..

내가 읽은 시 2026.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