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2128

김희준의 「일랑일랑」 감상 - 임종명

일랑일랑 김희준 어린 묘목을 사왔다​ 8월이 살찌고 햇살이 과수원으로 긴 숨을 불어넣던 날 줄무늬 수박이 계절의 한가운데를 가르면 눈물 많은 복숭아가 먼저 생겨 제 울음을 토해내던 날 1,630마일을 건너 신부를 데려왔다​ 늙은 삼촌은 새장가를 갔다 데려온 신부는 맨발이었다 뿌리 휑한 신부는 과수원에 자주 들락거렸다 발이 큰 삼촌이 무서웠는지 맨발인 자기 발이 부끄러웠는지​ 심장이 붉은 토마토가 온점을 찍는 날이 늘어갔다 낯선 곳에서 매미가 울었다 알 수 없는 곳으로 울음이 흘러가고 곳곳에 여름의 문장으로 환한 날이었다​ 여물지 못한 안부가 이국의 단어로 속살거리는 저녁 어둠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스며든다 신부는 설익은 잠을 잤다 곯은 자두는 단내가 심했다 복숭아가 ..

해설시 2026.08.26

김상동의 「국화」 감상 - 김동원

국화 김상동 이런 경우 3개월도 멀다는 거예요 2개월 후에 보도록 합시다 (몇 차례 찬비가 지나가는 동안 기러기 떼는 북국의 긴 밤들을 물고 왔네) 그 더디디더디던 2개월이 다 지나고 내일이면 검사 결과가 나오는데 만에 하나, 아니 둘에 하나 재발이라면 아무 약도 듣지 않을 텐데 생존 기간 중앙값이 4.7개월이라는데 (울타리 위에까지 내려온 해가 따스운 손으로 이마를 짚어 주곤 했지) 밤새 도망만 다니다가 악몽에서 깨어나 찌뿌둥한 아침 마당가에 서리 뒤집어쓴 내가 서 있네 뿌리는 멀쩡하다는 거예요 새봄에 다시 보도록 합시다 ㅡ『대구문학』 2024년 5·6호 -------------------------------------..

해설시 2026.08.22

나의 형 미겔에게 - 세사르 바예호

나의 형 미겔에게 세사르 바예호(1892~1938) 형! 오늘 난 툇마루에 앉아 있어. 형이 여기 없으니까 너무 그리워. 이맘때면 장난을 쳤던 게 생각나. 엄마는 우리를 쓰다듬으며 말씀하셨지. “아이구, 얘들아…” 저녁 기도 전이면 늘 술래잡기를 했듯 지금은 내가 숨을 차례야. 형이 나를 찾지 못해야 하는데. 마루, 현관, 통로. 그다음에는 형이 숨고, 나는 형을 찾지 못해야 해. 그 술래잡기에서 우리가 울었던 게 생각이 나. 형! 8월 어느 날 밤, 형은 새벽녘에 숨었어. 그런데 웃으며 숨는 대신 시무룩했었지. 가버린 시절 그 오후의 형의 쌍둥이는 지금 형을 못 찾아 시무룩해졌어… 벌써 어둠이 영혼에 내리는걸. 형! 너무 늦게..

내가 읽은 시 2026.08.20

나의 시집 - 김영찬

나의 시집 김영찬 나 오늘 새로 집 한 채 지을 것이네 창문만 있고 질문은 없는 집 손님만 있고 주인 없는 집 응답은 있으나 주제도 주체도 없어 이상하지만 말 없는 가구를 사들이고 과묵한 벽면을 색칠해야지 꽃 피울 유실수와 그늘 푸른 관목들 날아가서 돌아오지 않을 새들을 위한 둥지들을 글쎄 꾸며놔도 나쁠 거야 없지 그래야겠네 불필요한 질문과 쓸데없는 대문은 생략했지만 누구나 함부로 지붕 뜯고 들어와 한참을 울다가도 아무 상관 없는 집 있어도 좋은 집 없어도 좋은 집 처음부터 끝까지 울타리는 없지만 울타리 둘러치고 앉아 담장 밖의 바람 소릴 끌어모으기 아주 편한 집 푹신한 소파에 기대 잠깐 가면을 취해도 햇살 달려..

내가 읽은 시 2026.08.20

아기 앞에서 - 김기택

아기 앞에서 김기택(1957~) 아직 제가 태어나지 않은 것 같은 표정으로 몸이 생겼는지 모르는 것 같은 눈으로 유아차에 앉아 있던 아기가 내 눈과 마주친다, 순간 아기가 다칠 것 같다 내 눈빛에서 튀어 나가는 이빨과 발톱을 어떻게 눈알에 붙들어 매야 하나 난감하다 자신을 방어할 어떤 몸짓도 하지 않고 아기는 편한 자세로 앉아 있다 끊임없이 뭔가를 방어하고 있던 내 두려움도 아기 앞에서 다 들켜버린다 꽉 쥐고 있던 주먹이 풀리고 관절이 연약해지며 내 안에서 조용히 무너지는 것이 있다 혀에 가득한 말들은 발음을 잃고 표정은 뭘 해야 할지 몰라 입 벌리고 멍해진다 -----------------------------------------..

내가 읽은 시 2026.08.18

귀뚜라미가 다시 - 이준관

귀뚜라미가 다시 이준관(1949~ ) 가을에 귀뚜라미가 다시 찾아왔다 울 어머니 다시 찾아왔다 밥은 잘 먹느냐고 아픈 데는 없느냐고 근심 걱정은 없느냐고 울 어머니 귀뚤귀뚤 자꾸 물어본다 어린 시절 한밤중에 깨어보면 찢어지고 해진 내 옷 말없이 꿰매고 있던 울 어머니 이제는 살다가 찢어진 내 마음의 상처 꿰매 주러 와서 어둠 속에서 귀뚤귀뚤 자꾸 물어본다 나는 어렸을 때처럼 힘차게 대답한다 어머니, 걱정 마세요 나, 씩씩하게 잘 살고 있어요 --------------------------------------- 시인은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어머니 생각에 잠긴다. “귀뚤귀뚤” 우는 울음소리에서 어머니의 음성을 듣는다. 왜 하필..

내가 읽은 시 2026.08.17

산당화 필 때 - 최동은

산당화 필 때 최동은 애인은 나를 업고 발끝은 들고 발끝은 들고 징검다리 건너 보리밭으로 가며 겁먹은 내게 “새끼 종달이 한 마리 잡아줄게” 귓속말을 하고 그 말 엿들은 어미 종달새 종달 종달 이 종달…?…? 애인 이름 부르며 아래로 두 번 위로 두 번 날갯짓하며 날아가고 우리는 공연히 쓰러진 보리 일으켜 세우느라 달빛도 없는 밤을 홀딱 새웠네 —사이버문학광장 《문장 웹진》 2026년 8월호 --------------------------------- 최동은 / 경기도 광주 출생. 2002년 《시안》 등단. 시집 『술래』『한 사흘은 수천 년이고』『꽃잎 한 장』.

내가 읽은 시 2026.0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