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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루플의 「어두운 구석」 - 나희덕

어두운 구석 메리 루플 Mary Ruefle(1952~ ) 물건을 넣어두려고 빈 서랍을 청소하고 있었다. 거기엔 별게 없었다ㅡ 죽은 파리 한 마리, 거뭇한 동전 한 닢, 시침핀 하나, 뒤쪽 구석의 먼지. 핀을 집으려고 손가락을 오그렸을 때 시 하나가 내게 왔다. 말하자면, 그것은 내 마음속에서 한 단어 한 단어 나타났다. 그게 어떻게 서랍 속에 들어갔을까? 얼마나 오래 기다렸을까? 내가 거기 넣어두었던가, 보관해 두려고? 그건 파리의 것이었나? 그가 어느 외로운 높이에서 이 부스러기들의 놀이터 위로 그걸 떨어뜨렸나, 난데없이 찾아온 자기 자신의 죽음을? ----------------------------- 한국 독자..

해설시 2026.09.23

도강록渡江錄 - 우대식

도강록渡江錄 우대식 5월의 해거름 수박 모종을 심어놓고 다독이니 어두워진다 물 건너 집으로 가려다 뒤를 돌아본다 수박 모종의 머리가 납작 엎드려 있다 낯설다 낯설다 속으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밭머리 짚가리에 앉아 맑고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느 날 나도 뼛가루가 된 채 이방의 땅에서 몇 날을 보낼 것이다 낯설다 중얼거릴 때 풀꽃들이 쳐다보고 새가 다녀가고 당신을 닮은 당신과 나를 닮은 내가 밤을 건너 물가에 다다를 때, —계간 《미네르바》 2026 가을호 ------------------------------------ 우대식 / 1965년 강원도 원주 출생.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늙은 의자에 앉아 바..

우대식 2026.09.22

금강초롱 - 신중신

금강초롱 신중신愼重信(1941~2025) 상원사 가까운 산기슭서 초롱꽃 세 낱을 층층으로 피워 올린 한 줄기 여린 꽃대와 마주치다. 저토록 깨끗한 모양을 빚어내기 위해서 몇 철을 내내 밤이슬에 씻겨야 하고 세상 어디에도 없던 색감과 향기를 뿜어내기까지 얼마나 새벽 범종 소리를 들어야 했던 걸까? 높이 날면 미래를 바라보려니 하는 기대와 빨라야만 행운을 움켜쥐리라는 사람 마음에 샘물 한 모금 내밀 듯 금강초롱 한 층이 무량정천無量淨天 석탑 한 층과 무에 다르며 사뿐히 내걸린 저 같은 가벼움인들 우리가 이승에서 감당하는 무게와 어찌 다르랴. 잡목림 우거진 산길을 오른 참에 샛말간 생김새 그대로 꽃송이를 매단 물빛 금강초롱꽃을 보..

내가 읽은 시 2026.09.20

라원이의 대구 나들이

라원이가 그저께 제 부모와 함께 열차를 타고 대구 할머니네에 와서 하룻밤을 자고 어제 오후에 돌아갔다. 추석 연휴에 접어들면 교통이 복잡해질 것이기 때문에 한 주 앞당겨 미리 할머니 할아버지를 뵈러 왔다가 간 것이다. 그저께 오후 2시 반경에 동대구역에서 만났는데, 할머니집에 밤을 따러 가고 싶다고 하여 바로 팔공산 산가로 갔었다. 텃밭에서 아직 덜 익은 밤과 감, 키위를 제 손으로 따고 고구마와 땅콩도 캐 보았다. 그밖에도 참깨를 털어 보고, 호두, 콩, 팥, 대추, 수박, 가지, 토마토, 고추 등도 직접 따며 무척 즐거워했다. 그렇게 딴 것들을 소중히 봉지에 담아 집에 와선 저녁에도 다시 꺼내 보며 놀았다. 열매들뿐만 아니라 그는 공원에서 주운 낙엽 한 장이라도 가볍게 버리는 법이 없었다. 낮에 놀 ..

텃밭 일기 2026.09.18

물가에 호랑이 - 엄원태

물가에 호랑이 엄원태 ​ 강변 자전거 길에서 밤마다 어슬렁거리는 저 사내는, 어둠 속 처절한 고라니 울음소리엔 별 반응 없다가도 한 번씩 우두커니 멈춰 서서 건너편 버드나무 아래쪽 더 어두운 지점을 노려보곤 했다. 거기 호랑이가 있다고,​ 밤 산책길에 마주칠 때마다 내게 아낌없는 경고를 마다하지 않았기에, 나도 그 시선을 따라 그곳을 바라보곤 한다.​ 거기 정말 호랑이가 있다.​ 산그림자 불거진 근육질 윤곽만 컴컴할 뿐, 산과 강의 구분도 안 되는 흑암 덩어리 건너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우리는 잠시,​ 누군가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아무것도 안 보이는 물가에서​ 우리를 지켜보는 호랑이를 노려볼 때가 있다. ​ 평생..

내가 읽은 시 2026.09.18

성유림의 「웃는올빼미 깃털 뽑기」 - ChatGPT

웃는올빼미 깃털 뽑기 성유림 어떤 밤은 완전한 밤이 되어도 어두워지지 않았다 배드민턴장의 사람들이 사라질 때까지 마지막 버스가 종점으로 돌아갈 때까지 집으로 돌아온 내가 패딩을 벗고 새장 문을 열 때까지도 올빼미가 수북한 깃털을 남기고서 밖으로 떠나버렸을 때 나는 분명 발가벗은 몸이었고 텅 빈 새장의 부끄러움을 알 것 같았다 부드러운 깃털을 쓰다듬는다 도망친 새들이 모여든다는 숲을 알고 있어 어두워지지 않는 밤과 가까워지지 않는 숲을 사이에 두고 텅 빈 몸을 휘젓는 바람이 불었다 나뭇잎이 얼룩덜룩 그늘지는 바닥은 빛보다 어둠이 더 많았고 빛나지 않기 위해 서로 엉겨 붙어 있는 그림자들을 보고 있으면 빛이 끔찍한 무언가라는 생각이..

해설시 2026.09.15

특급 인생 - 조 은

특급 인생 조 은 (1960~ ) 내 인생은 특급 슬픔도 특급 고통도 특급 초특급이었을 행복 한 입도 맛보지 못하고 묘혈 속에 누워본다 나 일찍부터 두 다리를 여기 넣고 살았나 여기서 움트고 꽃을 피웠나 수없이 기웠던 희망 달큰한 열매인 줄 알았나 가물가물한 기억 속 특급 하늘이 다가온다 뻐근한 허리를 받쳐준다 처음 맛보는 빈틈없는 일체감!

내가 읽은 시 2026.09.13

김성찬 첫사랑 감상 - 최창일

첫사랑 김성찬 복지관 헬스장 유리창 너머 눈부신 매화를 피워내던 가지가 바로 너였던가 매실이 매화의 열매라니 하도 희고 고와 매화는 꽃으로만 살다 가는 줄 알았다 첫사랑도 꽃 진 자리에 살찐 매실 하나 매달려 있다 ----------------------------------- 복지관 헬스장이라는 평범한 일상의 공간에서 출발한 시선은 유리창 너머의 매화나무를 거쳐, 마침내 삶과 첫사랑에 대한 깊은 사유로 확장된다. 김성찬 시인은 붉은 땀을 흘리며 운동을 하다가 문득 창밖을 내다본다. 그곳에는 눈부시게 하얀 꽃을 피워내던 매화나무 가지가 서 있다. 화려하고 고운 모습에 매료되어 그저 꽃으로만 피었다가 스러지는 존재인 줄로만 알았던 매화가, 꽃이..

해설시 2026.0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