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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원이의 대구 나들이

라원이가 그저께 제 부모와 함께 열차를 타고 대구 할머니네에 와서 하룻밤을 자고 어제 오후에 돌아갔다. 추석 연휴에 접어들면 교통이 복잡해질 것이기 때문에 한 주 앞당겨 미리 할머니 할아버지를 뵈러 왔다가 간 것이다. 그저께 오후 2시 반경에 동대구역에서 만났는데, 할머니집에 밤을 따러 가고 싶다고 하여 바로 팔공산 산가로 갔었다. 텃밭에서 아직 덜 익은 밤과 감, 키위를 제 손으로 따고 고구마와 땅콩도 캐 보았다. 그밖에도 참깨를 털어 보고, 호두, 콩, 팥, 대추, 수박, 가지, 토마토, 고추 등도 직접 따며 무척 즐거워했다. 그렇게 딴 것들을 소중히 봉지에 담아 집에 와선 저녁에도 다시 꺼내 보며 놀았다. 열매들뿐만 아니라 그는 공원에서 주운 낙엽 한 장이라도 가볍게 버리는 법이 없었다. 낮에 놀 ..

텃밭 일기 2026.09.18

특급 인생 - 조 은

특급 인생 조 은 (1960~ ) 내 인생은 특급 슬픔도 특급 고통도 특급 초특급이었을 행복 한 입도 맛보지 못하고 묘혈 속에 누워본다 나 일찍부터 두 다리를 여기 넣고 살았나 여기서 움트고 꽃을 피웠나 수없이 기웠던 희망 달큰한 열매인 줄 알았나 가물가물한 기억 속 특급 하늘이 다가온다 뻐근한 허리를 받쳐준다 처음 맛보는 빈틈없는 일체감!

내가 읽은 시 2026.09.13

김성찬 첫사랑 감상 - 최창일

첫사랑 김성찬 복지관 헬스장 유리창 너머 눈부신 매화를 피워내던 가지가 바로 너였던가 매실이 매화의 열매라니 하도 희고 고와 매화는 꽃으로만 살다 가는 줄 알았다 첫사랑도 꽃 진 자리에 살찐 매실 하나 매달려 있다 ----------------------------------- 복지관 헬스장이라는 평범한 일상의 공간에서 출발한 시선은 유리창 너머의 매화나무를 거쳐, 마침내 삶과 첫사랑에 대한 깊은 사유로 확장된다. 김성찬 시인은 붉은 땀을 흘리며 운동을 하다가 문득 창밖을 내다본다. 그곳에는 눈부시게 하얀 꽃을 피워내던 매화나무 가지가 서 있다. 화려하고 고운 모습에 매료되어 그저 꽃으로만 피었다가 스러지는 존재인 줄로만 알았던 매화가, 꽃이..

해설시 2026.09.13

계절을 거스를 줄 아는 배롱나무

배롱나무는 석달 열흘을 꽃피우는 나무라지만, 그래서 본명이 '백일홍'이지만, 이곳 대구 바닥에서는 꽃의 절정을 이루는 시기가 보통 7월 중순부터 8월 중순까지다. 8월 중순이 지나면 꽃보다 열매가 많아져서 꽃이 그다지 소담스럽게 보이지 않는 것이다. 올해는 그 절정 시기에 꽃을 많이 피운 나무가 눈에 많이 띄지 않았는데, 유난히 긴 가뭄 탓이라 생각되었다. 그런데, 지난 8월 하순에 비가 몇 차례 흠뻑 내리고부터는 배롱나무의 꽃들이 뒤늦게 다시 피어나고 있었다. 아마도 배롱나무는 그동안 꽃 피우기를 많이 참고 있다가 뒤늦게 활짝 터트리는 것 같았다. 9월도 중순에 접어들어 쌀쌀한 오늘 아침, 자전거를 타고 불로동 고분군 앞을 지나가다가 흐드러진 꽃을 사진 찍었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 - 신동옥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 신동옥(1977~ ) 이 시는 비금도 왕소금 같은 별이 뜨는 보드랍고 너른 개펄처럼 끝없는 이야기 우리는 GPS도 지름길도 없는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헤매기 시작했으니까 돌아갈 생각도 없고 어딘가로 가겠다는 것도 아냐 갈기다 만 낙서처럼 내팽개쳐진 하늘에 제멋대로 모양을 바꾸어가며 흔들리는 구름을 봐 그러니 우리가 배를 뒤집고 드러눕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나 네가 사는 세상에도 바다가 있니 빛과 공기를 가려 마시고 이따금 정신을 차리고 바다로 나아가는 고래가 있니 우리도 상어처럼 먹을 걸 찾아 지느러미를 흔들자 겨드랑이에 날개라도 돋친 듯 교차로를 맴돌다가 신호등 너머 허공에서 미끄러지는 메아리 이제 막 죽어가는 내 곁에서 이제 막 태어난 당신이 눈을 뜨..

내가 읽은 시 2026.09.07

달항아리 놓을 곳 - 유계영

달항아리 놓을 곳 유계영 우유 한 방울을 소에게 돌려주려면 비가 좀 와야 해 상한 우유 한 컵 싱크대에 쏟아버리고 오후 내내 수도꼭지를 열어두는 어린이의 마음을 나무랄 순 없어​ 에너지의 차원에서​ 고양이가 책상 끄트머리에 아슬아슬 놓인 물컵을 밀어 메아리 듣는 일에도 까닭은 있어 벼룩시장에서 산 달항아리를 안고 공원을 지날 때 싸움판이 벌어진 노인정에 앳된 경찰이 와서 하는 말을 들었어​ 내 잘못이다 내 잘못이다 하셔야 해요​ 대추 한 봉지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 의논하다 생긴 일이라는데 누가 누구의 소실이냐 나는 엄연히 재혼이다 그런 말 오가더니 할머니들 울었어​ 대추를 나무에게 돌려주려면 비가 좀 와야 좋고 대추는 ..

해설시 2026.08.29

김희준의 「일랑일랑」 감상 - 임종명

일랑일랑 김희준 어린 묘목을 사왔다​ 8월이 살찌고 햇살이 과수원으로 긴 숨을 불어넣던 날 줄무늬 수박이 계절의 한가운데를 가르면 눈물 많은 복숭아가 먼저 생겨 제 울음을 토해내던 날 1,630마일을 건너 신부를 데려왔다​ 늙은 삼촌은 새장가를 갔다 데려온 신부는 맨발이었다 뿌리 휑한 신부는 과수원에 자주 들락거렸다 발이 큰 삼촌이 무서웠는지 맨발인 자기 발이 부끄러웠는지​ 심장이 붉은 토마토가 온점을 찍는 날이 늘어갔다 낯선 곳에서 매미가 울었다 알 수 없는 곳으로 울음이 흘러가고 곳곳에 여름의 문장으로 환한 날이었다​ 여물지 못한 안부가 이국의 단어로 속살거리는 저녁 어둠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스며든다 신부는 설익은 잠을 잤다 곯은 자두는 단내가 심했다 복숭아가 ..

해설시 2026.0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