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악 27

강가

강가 이용악(1914∼1971) 아들이 나오는 올 겨울엔 걸어서라도 청진으로 가리란다 높은 벽돌담 밑에 섰다가 세 해나 못 본 아들을 찾아오리란다 그 늙은인 암소 따라 조밭 저쪽에 사라지고 어느 길손이 밥 지은 자췬지 그슬린 돌 두어 개 시름겹다 ---------------------- 시집 ‘오랑캐꽃’에는 이용악이 1939년부터 1942년까지 쓴 시들이 수록돼 있다. ‘강가’는 그중 하나다. 1939년이면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해이고, 독일의 동맹국이었던 일본이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해 전쟁이 태평양으로 확대된 때가 1941년 말. 그러니까 전쟁은 나라 밖에서 벌어졌지만 식민지에 대한 수탈이 극도로 치닫기 시작한 시기에 쓰인 시다. 노인은 암소한테 물을 먹이러 강가..

이용악 2020.06.03

하나씩의 별

하나씩의 별 이용악(1914~1971) 무엇을 실었느냐 화물열차의 검은 문들은 탄탄히 잠겨졌다 바람 속을 달리는 화물열차의 지붕 우에 우리 제각기 들어누워 한결같이 쳐다보는 하나씩의 별 두만강 저쪽에서 온다는 사람들과 쟈무스*에서 온다는 사람들과 험한 땅에서 험한 변 치르고 눈보라 치기 전에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남도 사람들과 북어 쪼가리 초담배 밀가루 떡이랑 나눠서 요기하며 내사 서울이 그리워 고향과는 딴 방향으로 흔들려 간다 푸르른 바다와 거리거리를 서름 많은 이민 열차의 흐린 창으로 그저 서러이 내다보던 골짝 골짝을 갈 때와 마찬가지로 헐벗은 채 돌아오는 이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헐벗은 나요 나라에 기쁜 일 많아 울지를 못하는 함경도 사내 총을 안고 뽈가**의 노래를 불르던 슬라브의 늙은 병정은 잠이 ..

이용악 2016.02.25

항구

항구 이용악 태양이 돌아온 기념으로 집집마다 카렌다아를 한 장씩 뜯는 시간이면 검누른 소리 항구의 하늘을 빈틈없이 흘렀다 머언 海路를 이겨낸 기선이 항구와의 인연을 사수하려는 검은 기선이 뒤를 이어 입항했었고 상륙하는 얼굴들은 바늘 끝으로 쏙 찔렀자 솟아나올 한 방울 붉은 피도 없을 것 같은 얼굴 얼굴 희머얼건 얼굴뿐 부두의 인부꾼들은 흙은 씹고 자라난 듯 꺼머틱틱했고 시금트레한 눈초리는 푸른 하늘을 쳐다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 가운데서 나는 너무나 어린 어린 노동자였고-― 물 위를 도롬도롬 헤어다니던 마음 흩어졌다도 다시 작대기처럼 꼿꼿해지던 마음 나는 날마다 바다의 꿈을 꾸었다 나를 믿고자 했었다 여러 해 지난 오늘 마음은 항구로 돌아간다 부두로 돌아간다 그날의 羅津이여

이용악 2016.02.04

병 이용악 말 아닌 말로 病室의 전설을 주받는 흰 壁과 하아얀 하얀 벽 花甁에 시들은 따알리야가 날개 부러진 두루미로밖에 그렇게밖에 안 뵈는 슬픔-― 무너질 성싶은 가슴에 숨어드는 차군 입김을 막어다오 실끝처럼 여윈 思念은 회색 문지방에 알 길 없는 손톱그림을 새겼고 그 속에 뚜욱 떨어진 황혼은 미치려나 폭풍이 헤여드는 내 눈앞에서 미치려는가 너는 시퍼런 핏줄에 손가락을 얹어보는 마음-― 손 끝에 다앟는 적은 움직임 오오 살아 있다 나는 확실히 살아 있다

이용악 2016.02.04

만추(晩秋)

만추(晩秋) 이용악 노오란 은행잎 하나 호리호리 돌아 호수에 떨어져 소리 없이 湖面을 미끄러진다 또 하나-― 조이삭을 줍던 시름은 요즈음 낙엽 모으기에 더욱더 해마알개졌고 하늘 하늘을 쳐다보는 늙은이 뇌리에는 얼어죽은 친지 그 그리운 모습이 또렷하게 피어오른다고 길다란 담뱃대의 뽕잎 연기를 하소에 돌린다 돌개바람이 멀지 않아 어린것들이 털 고운 토끼 껍질을 벗겨 귀걸개를 준비할 때 기름진 밭고랑을 가져 못 본 부락민 사이엔 지난해처럼 또 또 그 전해처럼 소름 끼친 대화가 오도도오 떤다

이용악 2016.02.04

天痴의 江아

天痴의 江아 이용악 풀쪽을 樹木을 땅을 바윗덩이를 무르녹이는 열기가 쏟아져도 오직 너만 냉정한 듯 차게 흐르는 강아 天痴의 江아 국제철교를 넘나드는 武裝列車가 너의 흐름을 타고 하늘을 깰 듯 고동이 높은 때 언덕을 자리잡은 砲臺가 호령을 내려 너의 흐름을 선지피를 흘릴 때 너는 초조에 너는 공포에 너는 부질없는 전율밖에 가져본 다른 동작이 없고 너의 꿈은 꿈을 이어 흐른다 네가 흘러온 흘러온 山峽에 무슨 자랑이 있었더냐 흘러가는 바다에 무슨 영광이 있으랴 이 은혜롭지 못한 꿈의 향연을 전통을 이어 남기려는가 강아 天痴의 江아 너를 건너 키 넘는 풀 속을 들쥐처럼 기어 색다른 국경을 넘고자 숨어다니는 무리 맥풀린 백성의 사투리의 鄕閭를 아는가 더욱 돌아오는 실망을 墓標를 걸머진 듯한 이 실망을 아느냐 江岸..

이용악 2016.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