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욤 아폴리네르 12

빨강머리 예쁜 여자

빨강머리 예쁜 여자   기욤 아폴리네르     나 이제 모든 사람들 앞에 섰다 지각(sens)으로 가득 찬 한 사나이   삶을 알고 있으며 죽음에 대해서도 산 자가 알 만한 것을 알고 있으며   사랑의 고통과 기쁨을 체험했으며   때로는 제 생각들을 강요할 줄 알았으며   몇 개의 언어를 알고 있으며   적잖이 여행을 했고   포병대와 보병대에서 전쟁을 겪었으며   머리에 부상을 입고 클로로포름을 둘러쓰고 수술을 받았으며   저 몸서리치는 전투에서 가장 훌륭한 친구들을 잃어버린   나는 낡은 것과 새로운 것 그 두 가지를 한 인간이 알 만큼은 알고 있다   나는 오늘 친구들이여 우리들끼리의 또 우리를 위한   이 전쟁을 두려워함도 없이   전통과 발명의 저 긴 싸움을 판정한다              저 ..

사냥의 뿔나팔

사냥의 뿔나팔   기욤 아폴리네르     우리의 이야기는 고귀하고 비극적이다   어느 폭군의 가면처럼   아슬아슬하거나 신기하거나 그 어느 드라마도   하잘것없는 그 어떤 세부도   우리의 사랑을 비장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그리하여 토머스 드퀸시는   그 아편 다정하고 정결한 독을 마시며   저의 불쌍한 안(Anne)을 꿈꾸고 꿈꾸었다   가자 가자 모든 것이 지나가기에   나는 자주 뒤돌아보리라    추억은 사냥의 뿔나팔   그 소리 바람 속에 잦아든다     ― 『사랑받지 못한 사내의 노래』 민음사, 황현산 옮김, 2016.

라인란트

라인란트(Rhénanie)                     기욤 아폴리네르     라인 강의 밤    내 잔은 가득하다 불꽃처럼 떨리는 포도주로   사공의 느린 노랫소리를 들어라   달빛 아래 일곱 여자를 보았다 하네   발끝까지 닿는 푸른 머리칼 틀어 올리더라네    일어서라 원무를 추며 더욱 높이 노래하라   사공의 노래가 이제 그만 들리도록   그리고 내 곁에 데려와 다오 의연한 눈동자   머리타래 접어 올린 저 금발의 처녀들을 모두    라인 강 포도밭이 물에 비쳐 라인 강은 취했다   밤의 모든 황금은 쏟아져 떨며 강에 어린다   목소리는 숨 넘어갈 듯 여전히 노래한다   여름을 호리는 푸른 머리칼의 요정들을    내 잔은 부서졌다 쏟아지는 웃음처럼     종소리    미남 집시야 내 애인아..

가을

가을   기욤 아폴리네르     안개 속으로 멀어진다 안짱다리 농부와   암소 한 마리 느릿느릿 가을 안개 속에   가난하고 누추한 동네들 숨어 있다    저만치 멀어지며 농부는 흥얼거린다   깨어진 반지 찢어진 가슴을 말하는   사랑과 변심의 노래 하나를    아 가을 가을은 여름을 죽였다   안개 속으로 회색 실루엣 두 개 멀어진다    ― 『사랑받지 못한 사내의 노래』 민음사, 황현산 옮김, 2016.

곡마단

곡마단   기욤 아폴리네르                                       루이 뒤미르에게     들판에 가뭇 광대패들이   멀어진다 채마밭길 따라   회색 여관 문전을 지나   교회 없는 이 마을 저 마을을 지나    어린애들이 앞장을 서고   어른들은 꿈꾸며 뒤따른다   저 멀리서 그들이 신호를 하면   과일나무는 저마다 체념한다    북이며 금빛 굴렁쇠며   그들의 짐은 둥글고 모나고   곰과 원숭이 영리한 짐승들은   가는 길에 푼돈을 구걸한다

앙드레 살몽의 결혼식에서 읊은 시

앙드레 살몽의 결혼식에서 읊은 시                                        1909년 7월 13일   기욤 아폴리네르     오늘 아침 수많은 깃발을 보고 내가 혼자 뇌까린 말은   저기 가난한 사람들의 풍요로운 의상이 널려 있구나, 가 아니다   민주주의 수줍음이 내게 그 고통을 감추려 하는구나, 도 아니고   저 이름 높은 자유의 사주를 받아 이제 오 식물의 자유   오 지구상의 유일한 자유 나뭇잎을 흉내 내는구나, 도 아니고   사람들이 떠나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기에 집들이 불타고 있구나,도 아니고   저 흔들리는 손들이 내일 우리 모두를 위해 일해 주겠지, 도 아니고   삶을 이용할 줄 모르는 자들을 목 메달아 놓았구나, 조차 아니고   바스티유를 다시 점령함으로써..

마리

마리   기욤 아폴리네르     소녀여 그대는 저기서 춤추었지   할머니가 되어서도 춤추려나   그것은 깡충거리는 마클로트 춤   모든 종들이 다 함께 울리련만   도대체 언제 돌아오려나 그대 마리    가면들은 조용하고   음악은 하늘에서 들려오듯   저리도 아득한데   그래 나는 그대를 사랑하고 싶다오 그러나 애타게 사랑하고 싶다오   그래서 내 고통은 달콤하지요    털 송이 은 송이   암양들이 눈 속으로 사라지고   병정들이 지나가는데 내겐 왜 없는가   내 것인 마음 하나 변하고   또 변하여 내 아직도 알 수 없는 그 마음    네 머리칼이 어디로 갈지 내가 아는가   거품 이는 바다처럼 곱슬거리는   네 머리칼이 어디로 갈지 내가 아는가   우리의 맹세 위에도 흩날리는   가을 잎 네 손이..

나그네

나그네   기욤 아폴리네르     울며 두드리는 이 문을 열어 주오    인생은 에우리포스만큼이나 잘도 변하는 것    그대는 바라보았지 외로운 여객선과 함께   미래의 열기를 향해 내려가는 구름장을   그리고 이 모든 아쉬움 이 모든 회한을 그대 기억하는가    바다 물결 활처럼 구부러진 물고기들 해상의 꽃들   어느 날 밤바다였지   강물이 그리 흘러들고 있었지    나는 그걸 기억한다네 아직도 기억한다네    어느 날 저녁 나는 스산한 여인숙으로 내려갔다네   뤽상부르 근처   홀 안쪽에 그리스도 하나가 날고 있었지   누구는 족제비 한 마리를   또 누구는 고슴도치 한 마리를 가지고 있었지   카드 노름을 하고 있었지   그리고 그대는 그대는 나를 잊어버리고 있었네    정거장과 정거장 그 긴 고..

행렬 - 기욤 아폴리네르

행렬   기욤 아폴리네르                                    레옹 바이비 씨에게    조용한 새 뒤집혀 나는 새야   허공에 깃을 트는 새야   우리의 땅이 벌써 빛을 내는 그 경계에서   네 두 번째 눈까풀을 내리감아라 네가 고개 들면   너는 지구가 눈에 부시다    그리고 나도 그렇다 가까이에서 나는 어둡고 흐리다   방금 등불을 가린 안개 한 자락   갑자기 눈앞을 가로막는 손 하나   너희들과 모든 빛 사이에 둥근 지붕 하나   그리하여 어둠과 줄지어 선 눈들 한가운데서   사랑스런 별들로부터 나는 멀어지며 빛나리라    조용한 새 뒤집혀 나는 새야   허공에 깃을 트는 새야   내 기억이 벌써 빛을 내는 그 경계에서   네 두 번째 눈까풀을 내리감아라   태양 때문이..

아니(ANNIE) - 기욤 아폴리네르

아니(ANNIE)     기욤 아폴리네르      모빌과 갈베스톤 사이    텍사스의 해안에   장미 가득한 큰 정원 하나 있다   정원에는 빌라 한 채도 들어 있으니   그것은 커다란 장미 한 송이    한 여자가 그 정원을 홀로   자주 거닐고   보리수 늘어선 한길로 내가 지나갈 때면   우리는 서로 눈이 마주친다    그 여자는 메논교도(ménnonite)   그녀의 장미나무에도 그녀의 옷에도 단추가 없다   내 저고리에도 단추 두 개가 모자란다   그 부인과 나는 거의 같은 전례를 따른다     (1912년)    ― 『사랑받지 못한 사내의 노래』 민음사, 황현산 옮김, 2016. 요즘 트위터 페이스북 더보기 싸이월드 미투데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