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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중매(雪中梅) - 안상학

설중매(雪中梅) 안상학 ​ ​ 지금 여기서 내가 눈 속에서 꽃을 피우든지 꽃으로 피어서 눈을 맞든지 ​ 나는 꽃으로 향기로울 때 잎이 없음을 서러워하지 않았다 ​ 나는 잎으로 푸르를 때 꽃이 없음을 서러워하지 않았다 ​ 나는 금빛 열매를 달았을 때 향기가 없음을 서러워하지 않았다 ​ 나는 나목으로 동토에 섰을 때 그 모든 것이 없음을 서러워하지 않았다 ​ 나는 꽃이었고 향기였고 잎이었고 열매였고 나목이었고 또 나는 꽃이었다가 향기였다가 잎이었다가 열매였다가 나목이었다가 또 나는 꽃이었으니 ​ 나는 지금 내게 없는 기쁨을 노래한 적 없다 나는 지금 내게 없는 슬픔을 노래한 적 없다 ​ 나목이 나목을 잃고 꽃이 꽃을 잃고 열매가 열매를 잃고 잎이 잎을 잃고 향기가 향기를 잃을 때에도 ​ 꽃에 앞서 잎을 내세..

내가 읽은 시 2023.07.24

덩굴손 - 염창권

덩굴손 염창권(1960~ ) 어린 딸의 하루하루를 맡겨두는 이웃집 구석진 벽으로 가서 덩굴손을 묻고 울던 걸 못 본 척 돌아선 출근길 종일 가슴이 아프더니 담 벽을 타고 넘어온 포도 넝쿨 하나 잎을 들추니 까맣게 타들어 간 덩굴손 해종일 바지랑대를 찾는 안타까운 몸짓 저물어서야 너를 찾아 집으로 돌아가는구나 촉촉한 네 눈자위를 꼬옥 부여잡고 걸으면 "아침에 울어서 미안해요" 아빠를 위로하는구나.

내가 읽은 시 2023.07.24

사랑의 전집 - 배한봉

사랑의 전집 배한봉 당신의 꽃밭에는 영원히 지지 않을 꽃들만 가득합니다. 아침에 보드라운 햇살이 내리고 숲의 새들은 향기에 전율하였습니다. 눈을 뜬 내가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아장거리면 뽀오얗게 젖가슴을 내어 기다리시던 당신은 지금도 꽃밭을 일구고 계십니다. 꽃이 피는 만큼 당신은 동공이 생긴 밑동처럼 검게 파이고 수없이 씨앗들을 땅에 뿌린 꽃나무는 파리한 웃음을 지으며 잎들만큼 무성한 지난날을 가만히 바라보십니다. 당신은 꽃밭 너머 꽃밭에 계십니다. 꽃과 나비가 만든 문 너머에서 환하십니다. 오랜 세월 당신의 길을 기억하는 어린 꽃나무가 아무 일 없다는 듯 울창한 숲을 이루었습니다. 당신이 그리울 때마다 꽃밭에 놓인 꿈의 시간을 하늘에 압정으로 하나씩 눌러 박아 놓았습니다. 숲 위에 별이 총총 뜹니다...

내가 읽은 시 2023.07.18

상실의 기술 - 정성환

상실의 기술 정성환(1967~ ) 팔월의 유일한 결말이 구월이라도 누군가의 팔월이 되었다 돌아가는 팔월의 등을 봅니다 추억은 얼마나 구체적이던가요 민어회 떠주던 광안리 횟집에서 술 취해 사랑한다던 말 여름밤 덩굴지던 능소화의 환한 미소 밑줄 치듯 손가락 가리키며 읽어주던 시 한 줄 깊어갈수록 더 외로워진다는 고백 하나씩 온 길 되짚어 어디로 돌아갈까요 뜨거운 맹세도 헤어짐도 없이 어찌 구월이 올까요

내가 읽은 시 2023.07.10

감자를 캐며

나의 폰에 내장된 캘린더 앱의 3월 19일자엔 ‘감자 및 완두 파종’이라고 메모되어 있다. 완두는 이미 열흘 전에 수확이 끝나 그 자리에 옥수수 2차 파종을 하였다. 물론 그 무렵에 파종했던 옥수수는 지금 내 키보다 훨씬 더 자라 꽃이 한창 피어 있다. 오늘은 장마가 주춤한 틈을 타 감자를 캐었다. 감자는 그다지 길지 않은 이랑에 흰 감자와 붉은 감자를 한 이랑씩 심었었다. 감자를 심을 때 이랑에다 가마솥 아궁이의 재를 퍼다가 듬뿍 뿌려준 데다 봄 가뭄이 심하지 않아서 그런지 알이 제법 굵다. 호미와 손으로 파헤치는 흙 속에서 포기마다 네댓 개씩 감자가 뛰어나온다. 다친 팔이 아직 다 낫지 않아 밤에는 많이 아프다는 아내도 옆에서 거들며 감탄사를 연발한다. 내가 어릴 적에는 이 산골에까지 고구마는 아직 ..

텃밭 일기 2023.06.29

여세실의 「이제와 미래」 감상 - 양경언

이제와 미래 여세실 분갈이를 할 때는 사랑할 때와 마찬가지로 힘을 빼야 한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장마였다 올리브나무가 죽어가고 있었다 나는 무엇을 잡아두는 것에는 재능이 없고 외우던 단어를 자꾸만 잊어버렸다 잎이 붉게 타들어간 올리브나무는 방을 정화하는 중이라고 했다 흙에 손가락을 넣어보면 여전히 축축한, 죽어가면서도 사람을 살리고 있는 나무를 나는 이제라고 불러본다 흙을 털어낸다 뿌리가 썩지 않았다면 다시 자랄 수 있을 거라고 이제야, 햇볕이 든다 생생해지며 미래가 되어가는 우리는 타고나길 농담과 습기를 싫어하고 그 사실을 잊어보려 하지만 이미 건넜다 온 적 있지 뿌리를 넘어 줄기를 휘감아 아주 날아본 적 양지를 찾아다녔다 산에서 자라는 나무의 모종 하나를 화분에 옮겨 심으면 야산의 어둠이 방 안에 ..

해설시 2023.06.27

젖은 편지를 찢다 - 노태맹

젖은 편지를 찢다 노태맹(1962~ ) 어떤 사랑도 오래 머물지 못했네 푸른 칼은 녹슬어 붉게 부스러지고 검은 팽나무 아래 내 젖은 손은 그대가 빠져나간 둥근 흔적의 가장자리만 더듬네 마을은 비어 있고 탱자나무 가시 울울한 내 마음의 자리엔 어떤 사랑도 오래 머물지 못했네 검은 팽나무 아래 내 젖은 편지를 찢네 오 내 검게 번져 읽을 수 없는 나날들을 찢네

내가 읽은 시 2023.06.26

친애하는 언니 - 김희준

친애하는 언니 김희준(1994~2020) 유채가 필 준비를 마쳤나봐 4월의 바람은 청록이었어 손가락으로 땅에 글씨를 썼던가 계절의 뼈를 그리는 중이라 했지 옷소매는 죽어버린 절기로 가득했고 빈틈으로 무엇을 키우는지 알 수 없었어 주머니에 넣은 꽃잎을 모른 체 했던 건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박음질이 풀릴 때 알았지 실로 재봉된 마음이었다는 걸 의사는 누워 있으라 했지만 애초에 봄은 흐린 날로 머무는 때가 많았지 벚꽃과 유채가 엉킨 들판에 어린 엄마와 어린 언니가 있어 놀이기구가 안개 속에 숨어 있었던 거야 숨바꼭질을 좋아하던 언니가 이불과 옥상과 돌담 그리고 유채꽃과 산새와 먹구름 속으로 달려가는 한때 비가 내리고 물의 결대로 살 수 없다면 늙지 않은 그곳으로 가자 소매 안에 훔쳤던 ..

내가 읽은 시 2023.06.25

제페토의 숲 - 김희준

제페토의 숲 김희준(1994~2020) 거짓일까 바다가 격자무늬라는 말, 고래의 내장에서 발견된 언어가 촘촘했다 아침을 발명한 목수는 창세기가 되었다 나무의 살을 살라 말을 배웠다 톱질 된 태양이 오전으로 걸어왔다 가지 마, 나무가 되기 알맞은 날이다 움이 돋아나는 팔꿈치를 가진 인종은 초록을 가꾸는 일에 오늘을 허비했다 숲에는 짐승 한 마리 살지 않았다 산새가 궤도를 그리며 날았다 지상의 버뮤다는 어디일까 숲에서 나무의 언어를 체득한다 목수는 톱질에 능했다 떡갈나무가 소리 지를 때 다른 계절이 숲으로 숨어들었다 떡갈나무 입장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목수는 살목범殺木犯이었으므로 진짜일까 피노키오, 피노키오 떡갈나무 피노키오 개구쟁이 피노키오 피노키오, 피노키오 귀뚜라미 떡갈나무 요정은 피노키오를 도와주지..

내가 읽은 시 2023.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