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동균 33

여행자 - 전동균

여행자 전동균(1962∼) 일찍이 그는 게으른 거지였다 한 잔의 술과 따뜻한 잠자리를 위하여 도둑질을 일삼았다 아프리카에서 중국에서 그리고 남태평양의 작은 섬에서 왕으로 법을 구하는 탁발승으로 몸을 바꾸어 태어나기도 하였다 하늘의 별을 보고 땅과 사람의 운명을 점친 적도 있었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눈먼 떠돌이 악사가 되어 온 땅이 바다고 사막인 이 세상을 홀로 지나가고 있으니 그가 지친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흐름을 멈추고 다시 시작하는 저 허공의 구름들처럼 말 없는 것들, 쓸쓸하게 잠든 것들을 열애할 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전동균 2022.03.30

살아 있는 것보다 더 곧게

살아 있는 것보다 더 곧게 전동균 (1962~ ) 잣눈을 지고도 끄떡없는, 더 새파란 그늘을 펼친 주목 옆에 고사목 하나 모가지 부서지고 어깨가 깨졌지만 살아 있는 것보다 더 곧게 죽음 속에서 죽음을 넘어 마지막 큰 가지를 북대 쪽으로 가라, 너는 네 길을 가라 혼자서 가라, 거기에 아무것 없을지라도 굶주린 멧돼지와 피투성이 삵과 통곡하듯 번쩍이는 빙벽들의 그믐밤을 부르며

전동균 2019.07.24

예(禮)

예(禮) 전동균 한밤에 일어나 세수를 한다 손톱을 깎고 떨어진 머리카락을 화장지에 곱게 싸 불사른다 엉킨 숨을 풀며 씻은 발을 다시 씻고 손바닥을 펼쳐 손금들이 어디로 가고 있나, 살펴본다 아직은 부름이 없구나 더 기다려야겠구나, 고립을 신처럼 모시면서 침묵도 아껴야겠구나 흰 그릇을 머리맡에 올려둔다 찌륵 찌르륵 물이 우는 소리 들리면 문을 조금 열어두고 흩어진 신발을 가지런히 놓고 불을 끄고 앉아 나는 나를 망자처럼 바라본다 초록이 오시는 동안은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과 함께」창비

전동균 2019.07.16

약속이 어긋나도

약속이 어긋나도 전동균 칸나꽃 피어나고 흰곰들은 부서지는 빙판을 걸어가요 내가 새매라고, 예티라고, 부들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저를 무엇이라고 생각할까요 그들의 형제인 나를 왜 내게는 소리 없이 소낙비를 뚫고 가는 날개가 없을까요 어떻게 나는 인간의 육신과 마음을 얻었을까요 구겨진 종이 같은 재를 내뿜는 거울 같은 약속은 어긋나고 예언은 늘 빗나갔어요 맨발의 지팡이들은 오래전에 추방되었어요 잠들기 전에 내 무덤을 환하게 여는 눈빛을 주세요 무덤에 절을 할 거예요 돌에 물을 뿌릴 거예요 조금씩 달라지는 별들의 표정을 지켜볼 거예요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과 함께」2019. 6.

전동균 2019.06.28

벙어리 햇볕들이 지나가고

벙어리 햇볕들이 지나가고 전동균 아프니까 내가 남 같다 도로를 무단 횡단하는 취객 같다 숨소리에 휘발유 냄새가 나는 이 봄날 프록시마b 행성의 친구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이들도 혼밥을 하고 휴일엔 개그콘서트나 보며 마음 달래고 있을까 돌에겐 돌의 무늬가 있고 숨어서 우는 새가 아름답다고 배웠으나 그건 모두 거짓말 두어 차례 비가 오면 여름이 오겠지 자전거들은 휘파람을 불며 강변을 달리고 밤하늘 구름들의 눈빛도 반짝이겠지 그러나 삶은 환해지지 않을 거야 여전히 나는 꿈속에서 비누를 빨아 먹을 거야 나무는 그냥 서 있는 게 아니고 물고기도 그냥 헤엄치는 게 아니라지만 내가 지구에 사람으로 온 건 하찮은 우연, 불의의 사고였어 그걸 나는 몰랐어 으으, 으 으으 입 벌린 벙어리 햇볕들이 지나가고 취생몽사의..

전동균 2019.06.28

1205호

1205호 전동균 수리를 하긴 했지만 좀 낡았답니다 이 갈색 탁자는 아버지가 만드신 것 마른 꽃들이 꽂힌 작은 항아리는 어머니가 아끼시던 거예요 제 것은 별로 없어요 맞아요, 그림 속의 저 나귀는 잠 씨*의 농장에서 도망친 거죠 오후 세 시만 되면 어디론가 사라지곤 해요 물통을 지고 마루가 삐걱거려도 무시하세요 소심한 것들은 원래 그래요 창문들은 늘 말이 없지요 매를 맞고 자란 전갈좌의 남자처럼 오래 살아남기 위해서는 침묵이 유일한 무기란 걸 잘 알고 있는 거죠 쉿, 저 구석방의 문은 열지 마세요 거긴 온종일 지구를 도는 열차가 달리고 있고 수염이 허옇게 얼어붙은 채 끊임없이 주문을 외는 촛불이 살고 있어요 가까이 다가가면 크르렁, 시뻘건 이빨을 번뜩이며 울부짖죠 자폭하겠어!세상을 다 날려버리겠어! 여긴..

전동균 2018.11.29

마른 떡

마른 떡 전동균 살아남기 위해 옆구리에 상처를 내는 산짐승이다 잠들어서도 떨고 있는 눈꺼풀이다 저녁 눈 위에 쌓이는 밤눈, 첫 잔에 숨이 확 타오르는 독작의 찬 술이다 순장을 당하듯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웅크려야 간신히 잠드는 날들 객사 창틀에 놓여 얼다 녹다 얼다 녹다 곰팡이가 슨 저것은 파문하라, 나를 파문하라 소리치는 보름달빛이다 그 달빛과 싸우다가 스윽, 제 배를 가르는 오대천 상류의 얼음장이다 아니다, 신성한 경전이고 흑싸리 껍데기고 밤마다 강릉 콜라텍 가는 도깨비 스님이다 가방 속의 가발이다 멀리 있을수록 뜨거운 여자의 살, 살 냄새의 늪이며 이무기의 울음이며 너의 민낯이다, 혀를 차면서도 이 시를 읽고 있는 ⸺「미네르바」 2018, 여름

전동균 2018.10.21

동행

동행 전동균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는 사람을 보았네 콩밭에 엎드린 머릿수건들과 탁 탁 신발을 터는 흙빛 손과 경운기 짐칸에 덜컹대는 첩첩능선들과 목이 잠긴, 목이 잠겨 가라앉는 시냇물 속에 낯선 별이 하나 떠오르고 팔월의 동서남북이 사라지고 한껏 부푼 덤불들의 더는 깊어지지 않는 웅덩이들의 떨림, 떨림들 발바닥을 핥는 털북숭이 개와 연신 쫑긋대는 귀와 빨래들의 펄럭임과 밝아졌다 흐려졌다 멀어지듯 다가오는 것들을 보았지 그들을 맞이하듯 넓은 이파리를 펼치는 오동나무와 들끓는 달리아 꽃빛들과 거미들의 춤과 순식간에 지나가는 비, 망혼 같은 빗방울들을 —「현대시」2014. 5월호

전동균 2018.03.31

눈은 없고 눈썹만 까만

눈은 없고 눈썹만 까만 전동균 쩌억 입 벌린 악어들이 튀어나오고 있어 물병의 물들이 피로 변하고 접시들은 춤추고 까악 깍 울고 표범들이 담을 뚫고 달려오고 있어 뭐 이런 일이 한두 번이냐, 봄밤은 건들건들 슬리퍼를 끌고 지나가는데 덜그럭 덜그럭 텅 빈 운동장 트랙을 돌고 있는 유골들 통곡도 뉘우침도 없이 작년 그 자리에 피어나는 백치 같은 꽃들 누가 약에 취해 잠든 내 얼굴에 먹자(墨字)를 새기고 있어 도둑놈, 개새끼, 사기꾼 인둣불을 지지고 있어 눈은 없고 눈썹만 까만 것이 생글생글 웃는 것이 --「창작과비평」2016년 여름호

전동균 2018.03.17

눈사람

눈사람 전동균 세한도를 볼 적마다 나는 총알 퀵써비스 기사가 되어서 젠장맞을, 여긴 왜 아직 이 모양이람! 얼어붙은 마당을 뚫고 들어가 소리치는 거야 누구 안 계세요 아무도 안 계세요 외창마저 닫고서는 진종일 눈물과 웃음이 함께 솟는 묵선이나 긋고 있던 늙은 완당이 밑천 털린 노름꾼처럼 부스스 오줌 누러 나올 때까지 마냥 기다리고 있는 거야 뜨끈뜨끈 할망곰탕 한 그릇 들고 서 있어야 하는 거야 그릇 밑엔 울트라파워 비아그라 몇 알 숨겨놓고 ㅡ「우리처럼 낯선」창비, 2014. 6.

전동균 2017.0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