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너 마리아 릴케 8

제1비가

제1비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 내가 소리 내어 부르짖는다면, 천사의 반열에서 누가 그것에 답할 것인가? 천사 하나 갑자기 가슴에 나를 당겨 안는다면, 그 강한 존재로 하여 나는 사라져버릴 것이다. 아름다움은 우리가 겨우 견디어내는 두려움의 시작일 뿐. 경이로운 것은 우리를 우습게 보아 부숴버리지 않는 것이리. 천사는 모두 두려운 존재, 그리하여 나는 스스로 삼가고 어두워가는 흐느낌의 유혹을 참고 삼킨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를 쓸 것인가? 천사도 안 돼, 사람도 안 돼. 의미있는 세계에 우리가 편하게 거주하지 않음을 영리한 동물은 눈치로 안다. 어쩌면 남는 것은 날마다 보게 되는 비탈에 선 어떤 나무, 어제의 길거리, 가지 않고 남아 있는 어떤 습관의 비틀린 충심(忠心). 아, 밤이여, 세계 공간으로 가득..

저녁때(Abend)

저녁때(Abend)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저녁은 서서히 옷을 바꾸어 입는다. 오래된 나무가 그 한 끝을 잡고 있었다. 그대는 본다. 토지들이 둘로 갈라지는 것을, 하나는 하늘을 향하고 다른 하나는 떨어지고. 그대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아, 말없는 집처럼 어둡기만 하지도 않고, 밤마다 별이 되어 오르는 어떤 것처럼, 틀림없는 영원함을 약속하지도 않고. 말로 할 수 없게 풀어주면서도 그대의 삶을 불안하게, 엄청 크게, 성숙하게 하여 경계를 지으면서, 한껏 거머쥐면서, 그대의 삶은 그대 안에서 돌이 되고 별이 된다. --「형상집(Das Buch der Bilder)」

어느 4월에

어느 4월에 라이너 마리아 릴케 숲에는 다시 향기가 부유한다. 높이 나르는 종달새들이 어깨 위로 무겁게 우리를 내리누르던 하늘을 들어올린다. 가지들 사이로 낮을 보기는 했지, 그 공허함을. 그러나 오래 오래 나리는 비의 오후 끝에 이윽고 금빛 햇빛 내리쬐는 새로운 시간이 온다. 그에 이어 먼 곳의 집들의 전면의 상처 받은 창문들이 조심스럽게 날개를 친다. 그리고는 정적(靜寂), 가늘어진 비가 내린다. 고요히. 조금씩 어두워지며 빛나는 돌 위로. 시끄러웠던 소리들이 잦아든다. 나뭇가지 위의 반짝이는 싹 안으로.

들어가기(Eingang)

들어가기(Eingang) 라이너 마리아 릴케 그대가 누구이든지, 저녁때면 모든 것 잘 알고 있는 방에서 나오라; 그대의 집은 먼 곳의 가장자리. 그대가 누구이든지, 그대의 눈으로, 이제 익숙하고 닳아버린 문지방에서 아무래도 풀려나지 못하고 있는 그대, 눈을 들어 서서히 검은 나무를 올리라. 하늘 앞에, 훤칠하게 홀로 서 있게. 그대는 세계를 만들었느니. 크게, 언어처럼--침묵 속에 익어가는 언어처럼. 그 뜻을 거머쥐는 그대의 의지, 그대의 눈으로 하여금 세계를 부드러이 풀게 하라. --「형상집(Das Buch der Bilder)」서두(序頭)의 시

영양(羚羊)

영양(羚羊) 라이너 마리아 릴케 무슨 요술인가? 말 두 마디 고르면, 두 말이 어떻게 하나의 운(韻)으로 울리는가? 어떻게 마음에 신호를 울리다 사라지는가? 이마에 나뭇잎 솟고, 현금(弦琴)이 나오고. 그대의 모든 것이 비유가 되어 사랑의 노래가 된다. 읽기를 멈춘 눈, 잠깐 감은 눈꺼풀 위로 말들이 장미꽃잎들로 살포시 내리고, 다시 보자. 한편으로 치켜 올린 발, 뛰어오름으로 발길 가득 차 있건만, 잠깐의 정지, 쏘아냄을 멈추어 선 듯, 세운 목, 머리 귀 기울임에 집중한다. 숲 속에 멱 감던 여인 멈추어 고개 돌린 얼굴 숲 속의 호수 비추는 듯. --열린 연단, 김우창 '사물에서 존재로' 릴케 읽기

사랑의 노래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사랑의 노래 라이너 마리아 릴케 내 마음을 당신의 마음에 닿지 않게 하려면 내 마음을 어떻게 가누면 좋을까. 당신 너머에 있는 다른 사물들에게 내 마음을 어떻게 닿게 하면 좋을까. 아, 이 마음을 어딘가 어둠 속에 서 있는 그 무엇의 그늘에 감출 수 있다면. 당신 마음의 깊은 바닥에서 떨고 있는 것이 금세 전달되지 않는 어딘가 낯설고 고요한 곳에. 그러나 우리에게 와닿는 모든 것이 우리를, 당신과 나를 이내 하나로 결합시켜 버린다. 두 현(絃)에서 하나의 소리를 끌어내는 바이올린의 활과도 같이. 우리는 어떤 악기에 달려 있는 현일까. 어떤 연주자가 우리를 켜고 있을까. 아, 아름다운 노래. ---------------------------- 라이너 마리아 릴케 : 1875년 12월 4일, 당시 오스트리아..

가을날 - 라이너 마리아 릴케

가을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길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십시오. 들에다 많은 바람을 놓으십시오. 마지막 과실들을 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그들을 완성시켜,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하십시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이 후도 오래 고독하게 살며 잠자지 않고 읽고 그리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바람에 불려 나뭇잎이 날릴 때, 불안스러이 이리저리 가로수길을 헤맬 것입니다.

눈 쌓인 숲을 지나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눈 쌓인 숲을 지나 라이너 마리아 릴케 눈 쌓인 그윽한 숲을 지나 저녁은 먼 저쪽에서 온다. 그리고는 귀를 기울이며 창문마다 차가운 볼을 갖다 댄다. 모든 집이 조용해진다. 노인들은 안락의자에 묻혀 생각에 잠기고, 어머니들은 모두 여왕님 같다. 아이들은 더 놀려고 하지 않고 소녀들은 이제 실을 잣지 않는다. 저녁은 집안으로 귀를 기울이고 안에서는 바깥으로 귀를 기울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