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26

미역국

미역국 김수영 미역국 위에 뜨는 기름이 우리의 역사를 가르쳐준다 우리의 환희를 풀 속에서는 노란 꽃이 지고 바람소리가 그릇 깨지는 소리보다 더 서걱거린다 우리는 그것을 영원의 소리라고 부른다 해는 청교도가 대륙 동부에 상륙한 날보다 밝다 우리의 재(災), 우리의 서걱거리는 말이여 인생과 말의 간결 우리는 그것을 전투의 소리라고 부른다 미역국은 인생을 거꾸로 걷게 한다 그래도 우리는 삼십대보다는 약간 젊어졌다 육십이 넘으면 좀더 젊어질까 기관포나 뗏목처럼 인생도 인생의 부분도 통째 움직인다 우리는 그것을 빈궁(貧窮)의 소리라고 부른다 오오 환희여 미역국이여 미역국에 뜬 기름이여 구슬픈 조상(祖上)이여 가뭄의 백성이여 퇴계든 정다산이든 수염 난 영감이면 복덕방 사기꾼도 도적놈 저주라도 좋으니 제발 순조로워라..

김수영 2021.02.01

여름 아침

여름 아침 김수영 여름 아침의 시골은 가족과 같다 햇살을 모자같이 이고 앉은 사람들이 밭을 고르고 우리 집에도 어저께는 무씨를 뿌렸다 원활하게 굽은 산등성이를 바라보며 나는 지금 간밤의 쓰디쓴 취각과 청각과 미각과 통각마저 잊어버리려고 한다 물을 뜨러 나온 아내의 얼굴은 어느 틈에 저렇게 검어졌는지 모르나 차차 시골 동리 사람들의 얼굴을 닮아간다 뜨거워진 햇살이 산 위를 걸어 내려온다 가장 아름다운 이기적인 시간 우에서 나는 나의 검게 타야 할 정신을 생각하며 구별을 용서하지 않는 밭고랑 사이를 무겁게 걸어간다 고뇌여 강물은 도도하게 흘러내려 가는데 천국도 지옥도 너무나 가까운 곳 사람들이여 차라리 숙련이 없는 영혼이 되어 씨를 뿌리고 밭을 갈고 가래질을 하고 고물개질을 하자 여름 아침에는 자비로운 하늘..

김수영 2021.01.29

金星 라디오

金星라디오 김수영(1921~1968) 金星 라디오 A 504를 맑게 개인 가을날 일수로 사들여온 것처럼 五백원인가를 깎아서 일수로 사들여온 것처럼 그만큼 손쉽게 내 몸과 내 노래는 타락했다 헌 기계는 가게로 가게에 있던 기계는 옆에 새로 난 쌀가게로 타락해가고 어제는 카시미롱이 들은 새 이불이 어젯밤에는 새 책이 오늘 오후에는 새 라디오가 승격해 들어왔다 아내는 이런 어려운 일을 어렵지 않게 해치운다 결단은 이제 여자의 것이다 나를 죽이는 여자의 유희다 아이놈은 라디오를 보더니 왜 새 수련장은 안 사왔느냐고 대들지만

김수영 2019.01.11

孔子의 生活難

孔子의 生活難 김수영 꽃이 열매의 上部에 피었을 때 너는 줄넘기 作亂을 한다 나는 發散한 形象을 구하였으나 그것은 作戰같은 것이기에 어려웁다 국수―伊太利語로는 마카로니라고 먹기 쉬운 것은 나의 反亂性일까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事物과 事物의 生理와 事物의 數量과 限度와 事物의 愚昧와 사물의 明晳性을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김수영 2017.08.07

나의 가족

나의 가족(家族) 김수영 고색이 창연한 우리 집에도 어느덧 물결과 바람이 신선한 기운을 가지고 쏟아져들어왔다 이렇게 많은 식구들이 아침이면 눈을 부비고 나가서 저녁에 들어올 때마다 먼지처럼 인색하게 묻혀가지고 들어온 것 얼마나 장구한 세월이 흘러갔던가 파도처럼 옆으로 혹은 세대를 가리키는 지층의 단면처럼 억세고도 아름다운 색깔― 누구 한사람의 입김이 아니라 모든 가족의 입김이 합치어진 것 그것은 저 넓은 문창호의 수많은 틈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겨울바람보다도 나의 눈을 밝게 한다 조용하고 늠름한 불빛 아래 가족들이 저마다 떠드는 소리도 귀에 거슬리지 않는 것은 내가 그들에게 전영(全靈)을 맡긴 탓인가 내가 지금 순한 고개를 숙이고 온 마음을 다하여 즐기고 있는 서책은 위대한 고대 조각의 사진 그렇지만 구차..

김수영 2017.07.31

여름 뜰 - 김수영

여름 뜰 김수영 무엇 때문에 부자유한 생활을 하고 있으며 무엇 때문에 자유스러운 생활을 피하고 있느냐 여름 뜰이여 나의 눈만이 혼자서 볼 수 있는 주름살이 있다 굴곡이 있다 모오든 언어가 시에로 통할 때 나는 바로 일순간 전의 대담성을 잊어버리고 젖 먹는 아이와 같이 이즈러진 얼굴로 여름 뜰이여 너의 광대한 손을 본다 「조심하여라!자중하여라!무서워할 줄 알아라!」하는 억만의 소리가 비 오듯 나리는 여름 뜰을 보면서 합리와 비합리와의 사이에 묵연히 앉아있는 나의 표정에는 무엇인지 우스웁고 간지럽고 서먹하고 쓰디쓴 것마저 섞여있다 그것은 둔한 머리에 움직이지 않는 사념일 것이다 무엇 때문에 부자유한 생활을 하고 있으며 무엇 때문에 자유스러운 생활을 피하고 있느냐 여름 뜰이여 크레인의 강철보다도 더 강한 익어..

김수영 2017.07.03

긍지의 날 - 김수영

긍지의 날 김수영 너무나 잘 아는 순환(循環)의 원리(原理)를 위하여 나는 피로(疲勞)하였고 또 나는 영원(永遠)히 피로(疲勞)할 것이기에 구태여 옛날을 돌아보지 않아도 설움과 아름다움을 대신하여 있는 나의 긍지 오늘은 필경 긍지의 날인가 보다 내가 살기 위하여 몇개의 번개같은 환상(幻想)이 필요(必要)하다 하더라도 꿈은 교훈(敎訓) 청춘(靑春) 물 구름 피로(疲勞)들이 몇배의 아름다움을 가(加)하여 있을 때도 나의 원천(源泉)과 더불어 나의 최종점(最終點)은 긍지 파도(波濤)처럼 요동(搖動)하여 소리가 없고 비처럼 퍼부어 젖지 않는 것 그리하여 피로(疲勞)도 내가 만드는 것 긍지도 내가 만드는 것 그러할 때면은 나의 몸은 항상 한치를 더 자라는 꽃이 아니더냐 오늘은 필경 여러가지를 합한 긍지의 날인가 ..

김수영 2017.06.10

어느 날 古宮을 나오면서

어느 날古宮을 나오면서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王宮 대신에 王宮의 음탕 대신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越南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삼십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第十四野戰病院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 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

김수영 2017.02.10

하…… 그림자가 없다

하…… 그림자가 없다 김수영 우리들의 敵은 늠름하지 않다 우리들의 敵은 카크 다글라스나 리챠드 위드마크 모양으로 사나웁지도 않다 그들은 조금도 사나운 惡漢이 아니다 그들은 善良하기까지도 하다 그들은 民主主義者를 假裝하고 자기들이 良民이라고도 하고 자기들이 選良이라고도 하고 자기들이 會社員이라고도 하고 電車를 타고 自動車를 타고 料理집엘 들어가고 술을 마시고 웃고 雜談하고 同情하고 眞摯한 얼굴을 하고 바쁘다고 서두르면서 일도 하고 原稿도 쓰고 치부도 하고 시골에도 있고 海邊가에도 있고 서울에도 있고 散步도 하고 映畵館에도 가고 愛嬌도 있다 그들은 말하자면 우리들의 곁에 있다 우리들의 戰線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들의 싸움을 이다지도 어려운 것으로 만든다 우리들의 戰線은 당게르크도 놀만디도 延禧高地..

김수영 2017.0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