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시 98

주향숙 시 「집시」 감상 - 장예원

시인은 자기가 창작한 시의 첫 독자이다. 시를 쓰지 않았다면 시가 말하는 바를 자신이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깨닫지는 못했을 수도 있다.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주변의 사물들을 혹은 자신 안에 있지만 불분명한 존재들을 그냥 흘려보내거나 무심히 대하지 않는다면 시인은 그들과 서로 주고받은 교류를 작품으로 남길 수 있고 그것 자체가 그가 보낸 시간의 기록물이자 내 고독의 친구가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사람이 없는 풍경은/기대어 서고 앉아도 보고 말을 걸면/의미가 생기”듯 “열리지 않는 문고리”도 “말을 걸면 화분이 되”고 “풍경”(「구례」)으로 다시 태어난다. 여기에서 얻는 만족과 기쁨이 창작의 절박함 때문에 받는 괴로움을 상쇄한다면 시인은 어떤 식으로든 구원받는다. 이 시집에는 앙리 루소의 그림 〈잠자는 집..

해설시 2025.05.10

[자작시 해설] 집에 가자 - 이화은

집에 가자   이화은     우는 아이에게 집에 가자고 하면 뚝 울음을 그친다   집은 울지 않아도 되는 곳인 줄 아이는 알았을까     전학해 온 지 한 달 된 학교   앞에 놓은 시험지는 깜깜하고 깊었다   심해 물고기들이 유유히 헤엄쳐 다니고 있었다    집에 가고 싶었다    빈 시험지 위에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선생님이   그래 눈물만한 답은 없지    내 시는 아직도 눈물만한 답을 얻지 못해 헤매고 또 헤맨다    객짓밥이 유난히 시린 날은 집에 가고 싶었다   집에 가자 집에 가자   이 말을 두텁게 덥고 잠들곤 했다    신접살림 집에 딸을 두고 돌아서며 어머니는 몇 번이나   이제는 여기가 네 집이다 못을 박았다   그래도 나는 자주 집에 가고 싶었다   우는 아이 손을..

해설시 2025.03.18

장옥관 「노래의 눈썹」 해설 - 김상환

새의 발가락보다 더 가난한 게 어디 있으랴 지푸라기보다 더 가는 발가락 햇살 움켜쥐고 나뭇가지에 얹혀 있다 나무의 눈썹이 되어 나무의 얼굴을 완성하고 있다 노래의 눈썹, 노래로 완성하는 새의 있음 배고픈 오후, 허기 속으로 새는 날아가고 가난하여 맑아지는 하늘 가는 발가락 감추고 날아가는 새의 자취 좇으며 내 눈동자는 새의 메아리로 번져나간다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장옥관 시집, 문학동네 2022) 이 한 편의 시 「노래의 눈썹」(A Song's Eyebrows)은 ‘아심토트’(Asymptote. 영어권을 비롯한 세계적인 번역문학저널 플랫폼)에 소개된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이 시는 기본적으로 몸과 언어의 공능(功能)을 은유의 방식을 통해 구현하고 있다. 은유는 ‘하나의 패턴’으로 서로 다른 것들의 ..

해설시 2024.10.31

한강의 「북향 방」 감상 - 유희경

북향 방   한강     봄부터 북향 방에서 살았다    처음엔 외출할 때마다 놀랐다   이렇게 밝은 날이었구나    겨울까지 익혀왔다   이 방에서 지내는 법을    북향 창 블라인드를 오히려 내리고   책상 위 스탠드만 켠다    차츰 동공이 열리면 눈이 부시다   약간의 광선에도    눈이 내렸는지 알지 못한다   햇빛이 돌아왔는지 끝내   잿빛인 채 저물었는지    어둠에 단어들이 녹지 않게   조금씩 사전을 읽는다    투명한 잉크로 일기를 쓰면 책상에 스며들지 않는다   날씨는 기록하지 않는다    밝은 방에서 사는 일은 어땠던가   기억나지 않고   돌아갈 마음도 없다    북향의 사람이 되었으니까    빛이 변하지 않는    ----------------------------------  ..

해설시 2024.10.20

한강의 「저녁 잎사귀」 감상 - 이설야

저녁 잎사귀   한강 (1970~ )     푸르스름한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밤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찾아온 것은 아침이었다    한 백 년쯤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내 몸이   커다란 항아리같이 깊어졌는데    혀와 입술을 기억해내고   나는 후회했다    알 것 같다    일어서면 다시 백 년쯤   볕 속을 걸어야 한다   거기 저녁 잎사귀   다른 빛으로 몸 뒤집는다 캄캄히   잠긴다                  —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 2013.      ------------------------------------------   소설가 이전에 시인이었던, 그녀가 ‘심장을 문지르’며 쓴 언어의 창고로 들어간다. 그 창고에서 오래된 가구의 서랍을 하나둘씩 ..

해설시 2024.10.15

론 파젯의 「한 소절」 감상 - 송재학

한 소절 론 파젯 흘러간 노래가 있다 할아버지가 흥얼거리시던 노래 이런 질문이 나온다, "아니면 차라리 물고기가 될래?" 같은 노래에 같은 질문이 나온다 노새와 돼지로 단어만 바꾼 그런데 종종 내 머릿속에 맴도는 소절은 물고기 부분이다 딱 그 한 소절만 "차라리 물고기가 될래?" 마치 노래의 나머지는 노래 속에 없어도 되는 것처럼 ------------------------------ 뉴저지의 작은 도시 패터슨에 사는 시인 패터슨의 일상을 소재로 한 영화 〈패터슨〉은 짐 자무시의 연출작이다. 영화에서 공개되는 7편의 시는 짐 자무시의 친구인 뉴욕파의 시인 론 파젯이 영화를 위해 작업한 것이다. 주인공 패터슨은 늘 같은 생활을 반복하면서, 어린 시절 할아버지에게 들었던 노래 중에 "차라리 물고기가 될래?"..

해설시 2024.10.07

허수경의 「공터의 사랑」 감상 - 박준

공터의 사랑   허수경(1964~2018)      한참 동안 그대로 있었다   썩었는가 사랑아    사랑은 나를 버리고 그대에게로 간다   사랑은 그대를 버리고 세월로 간다    잊혀진 상처의 늙은 자리는 환하다   환하고 아프다    환하고 아픈 자리로 가리라   앓는 꿈이 다시 세월을 얻을 때    공터에 뜬 무지개가   세월 속에 다시 아플 때    몸 얻지 못한 마음의 입술이   어느 풀잎자리를 더듬으며   말 얻지 못한 꿈을 더듬으리라     ―『혼자 가는 먼 집』1992.    ---------------------------------------   태어난 지 200일 무렵부터 아이에게는 영속성이라는 감각이 발달하게 됩니다. 영속성은 대상이 눈앞에서 사라진다고 해서 그것이 없어졌다고 생각하..

해설시 2024.09.10

정우신의 「메카닉」 감상 - 박소란

메카닉   정우신     삼촌은 기계를 잘 다뤘다 아픈 사람도 기계로 고쳤다   비가 오거나 스님이 시주를 오는 날이면 톱날을 교체하곤 했다   삼촌은 언제 뭉툭해졌더라   몇 번째 톱날이었더라   기계가 삼촌을 오랫동안 만지던 날   우리는 기름이 떠다니는   미숫가루를 마시며   철판을 옮겼다     ―『미분과 달리기』2024.6    ----------------------------------------   수리공, 기계공 등의 뜻을 지닌 “메카닉(mechanic)”은 속어로 살인 청부업자를 이르기도 한다고. 당연히 시인은 이 모든 의미를 두루 염두에 두고 제목을 지었을 것이다.그런 만큼 시에는 어떤 섬뜩함이 있다. “삼촌은 기계를 잘 다뤘다”로 시작해 “기계가 삼촌을 오랫동안” 만졌다에 이르는 ..

해설시 2024.09.10

조해주의 「밤 산책」 감상 - 나민애

밤 산책   조해주(1993~ )     저쪽으로 가 볼까    그는 이쪽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얇게 포 뜬 빛이   이마에 한 점 붙어 있다    이파리를    서로의 이마에 번갈아 붙여 가며   나와 그는 나무 아래를 걸어간다     ―『가벼운 선물』     ---------------------------------   만약 이 시인이 화가라면, 이 시가 그림이라면, 나는 이 그림을 꼭 갖고 싶다. 돈을 모으고 낯선 화랑에 가서 ‘이 그림을 살게요’라고 말하고 싶다. 방에 걸어 두고 내 마음에 걸어 둔 듯 바라보고 싶다. 시인이 말하듯 그려 놓은 밤 산책을 나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과 나란히 걷는 그 시간이 나도 소중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너무 좋지 않은가. ‘얇게 포 뜬 빛..

해설시 2024.09.10

박성우의 「매우 중요한 참견」 감상 - 문태준

매우 중요한 참견   박성우 (1971~)   호박 줄기가 길 안쪽으로 성큼성큼 들어와 있다   느릿느릿 길을 밀고 나온 송앵순 할매가   호박 줄기 머리를 들어 길 바깥으로 놓아주고는   짱짱한 초가을 볕 앞세우고 깐닥깐닥 가던 길 간다    ------------------------------   참견한다는 것은 쓸데없이 끼어들어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이다. 자신과 별로 관계가 없는 남의 일에 공연스레 나서서 개입하는 것이다. 호박 줄기가 하필 길의 위로 기어가는 것을 본 할머니는 넝쿨을 들어서 뻗어갈 방향을 돌려놓는다. 참견하는 일이더라도 참 잘한, 요긴한 참견이라고 하겠다. 이 시를 흥미롭게 하는 것은 호박 줄기가 기어가는 기세는 ‘성큼성큼’이라고 표현하고, 할머니의 발걸음 속도는 ‘느릿느릿’이라..

해설시 2024.0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