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와바 쉼보르스카 33

나에게 던진 질문

나에게 던진 질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1923~2012) 미소 짓고, 손을 건네는 행위, 그 본질은 무엇일까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순간에도 홀로 고립되었다고 느낀 적은 없는지? 사람이 사람으로부터 알 수 없는 거리감을 느끼듯, 첫 번째 심문에서 피고에게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내는 엄정한 법정에 끌려나온 듯, 과연 내가 타인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을까? 책을 펼쳤을 때 활자나 삽화가 아닌 그 내용에 진정 공감하듯이, 과연 내가 사람들의 진심을 헤아릴 수 있을까? 그럴듯하게 얼버무리면서 정작 답변은 회피하고, 손해라도 입을까 겁에 질려 솔직한 고백 대신 번지르르 농담이나 늘어놓는 주제에, 참다운 우정이 존재하지 않는 냉혹한 세상을 탓하기만 할 뿐, 우정도 사랑처럼 함께 만들어야 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혹독한 ..

여기

여기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다른 곳은 어떤지 잘 모르겠어. 하지만 여기 지구에서는 모든 것이 꽤나 풍요로워. 여기서 사람들은 의자와 슬픔을 제조하지. 가위, 바이올린, 자상함, 트랜지스터, 댐, 농담, 찻잔 들을. 어쩌면 다른 곳에서는 모든 게 더욱 풍족할 수도 있어. 단지 어떤 사연에 의해 그림이 부족하고 브라운관과 피에로기*, 눈물을 닦는 손수건이 모자랄 뿐. 여기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장소와 그 주변 지역들이 있어. 그중 어떤 곳은 네가 특별히 좋아해서 거기에 고유한 이름을 붙이고, 위해(危害)로부터 그곳을 지켜내고 있는지도 몰라. 어쩌면 다른 곳에도 여기와 비슷한 장소가 있지 않을까, 단지 거기서는 아무도 그곳을 아름답다고 여기지 않을 뿐. 어쩌면 다른 어느 곳과도 달리, 혹은 거의 대부분의 여느 ..

사슬

사슬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무더운 여름날, 개집 그리고 사슬에 묶인 개 한마리, 불과 몇 발자국 건너, 물이 가득 담긴 바가지가 놓여 있다. 하지만 사슬이 너무 짧아 도저히 닿질 못한다. 이 그림에 한 가지 항목을 덧붙여보자. 훨씬 더 길지만,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우리의 사슬, 덕분에 우리는 자유롭게 서로를 지나칠 수 있다. ―「 충분하다」문학과지성사(최성은 역), 2016.

십대 소녀

십대 소녀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십대 소녀인 나? 그 애가 갑자기, 여기, 지금, 내 앞에 나타난다면, 친한 벗을 대하듯 반갑게 맞이할 수 있을까? 나한테는 분명 낯설고, 먼 존재일 텐데. 태어난 날이 서로 같다는 지극히 단순한 이유만으로 눈물을 흘려가며, 그 애의 이마에 입맞춤할 수 있을까? 우리 사이엔 다른 점이 너무나 많다, 단지 두개골과 안와(眼窩), 그리고 뼈들만 동일할 뿐. 그 애의 눈은 아마도 좀더 클 테고, 속눈썹은 더욱 길 테고, 키도 좀더 크겠지, 육체는 잡티 하나 없는 매끄러운 피부로 견고하게 싸여 있겠지. 친척들과 지인들이 우리를 연결해주는 건 분명하지만, 그 애의 세상에서는 거의 모두들 살아 있겠지. 내가 사는 곳에서는 함께 지내온 무리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이 거의 없는데. 우린 이..

이혼

이혼 쉼보르스카 아이들에겐 첫번째 세상의 종말. 고양이에겐 새로운 남자 주인. 개에겐 새로운 여자 주인의 등장. 가구에겐 계단과 쿵광거림, 차량과 운송. 벽에겐 그림을 떼고 난 뒤 드러나는 선명한 네모 자국. 이웃들에겐 이야깃거리, 잠시 따분함을 잊게 해주는 휴식. 자동차에겐 만약 두 대였다면 훨씬 나은 상황. 소설책과 시집들에겐 좋아, 당신이 원하는 걸 맘대로 가져가. 문제는 백과사전과 비디오 플레이어, 그리고 맞춤법 교본이다. 앞으로 두 사람의 이름을 나란히 쓸 때 어떡하면 좋을지 적혀 있을텐데 접속사 '그리고'로 연결해야 하는지, 아니면 두 이름을 분리하기 위해 마침표를 사용해야 하는지.

박물관

박물관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접시들은 있지만, 식욕은 없어요. 반지는 있지만, 이심전심은 없어요. 최소한 삽백 년 전부터 쭉. 부채는 있는데 ― 홍조 띤 빰은 어디 있나요? 칼은 있는데 ― 분노는 어디 있나요? 어두운 해질 녘 류트를 퉁기던 새하얀 손은 온데간데없네요. 영원이 결핍된 수만 가지 낡은 물건들이 한자리에 다 모였어요. 진열장 위에는 콧수염을 늘어뜨린 채 곰팡내 풀풀 풍기는 옛날 파수꾼이 새근새근 단잠을 자고 있어요. 쇠붙이와 점토, 새의 깃털이 모진 시간을 견디고 소리 없이 승리를 거두었어요. 고대 이집트의 말괄량이 소녀가 쓰던 머리핀만이 킬킬대며 웃고 있을 뿐. 왕관이 머리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어요. 손은 장갑에게 굴복하고 말았어요. 오른쪽 구두는 발과 싸워 승리했어요. 나는 어떨까요, 믿어..

고문

고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육신은 고통을 느낀다. 먹고, 숨쉬고, 잠을 자야 한다. 육신은 얇은 살가죽을 가졌고, 바로 그 아래로 찰랑찰랑 피가 흐른다. 꽤 많은 개수의 이빨과 손톱. 뼈는 부서지기 쉽고, 관절은 잘 늘어난다. 고문을 하려면 이 모든 것에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몸은 여전히 떨고 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로마 건국 이전이나 이후, 예수 탄생 이전이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0세기 또한 마찬가지. 고문은 여전히 행해지고 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땅덩이만 줄었을 뿐, 그 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마치 벽 하나 사이에 둔 듯 가까이서 일어난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인구만 증가했을 뿐 해묵은 규칙 위반이 발생하면, 현실적이면서 타성에..

죽은 자들과의 모의

죽은 자들과의 모의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당신이 어떤 환경에 처했을 때 주로 죽은 사람들이 꿈에 나타납니까? 잠들기 전에 종종 그들을 생각하나요? 누구 얼굴이 제일 먼저 떠오르죠? 매번 같은 사람인가요? 이름은? 성은? 묘지명은? 사망 날짜는? 그들은 주로 무엇에 관해 이야기합니까? 오래된 우정? 혈연관계? 아니면 조국에 대해서? 그들이 어디서 왔다고 밝히던가요? 그들 배후에 누가 있는지, 당신 말고 또 누구의 꿈에 모습을 드러내는지 말하던가요? 그들의 얼굴은 사진과 똑같았습니까?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그들도 늙었습니까? 그들은 건강해 보였나요, 아니면 안색이 창백했나요? 살해당한 자들은 예전의 치명적인 상처를 깨끗이 회복했나요? 누가 자기들을 죽였는지 여전히 기억하던가요? 손에는 무엇을 들고 있었습니까?..

끝과 시작

끝과 시작 쉼보르스카 모든 전쟁이 끝날 때마다 누군가는 청소를 해야 하리. 그럭저럭 정돈된 꼴을 갖추려면 뭐든 저절로 되는 법은 없으니. 시체로 가득 찬 수레가 지나갈 수 있도록 누군가는 길가의 잔해들을 한옆으로 밀어내야 하리. 누군가는 허우적대며 걸어가야 하리. 소파의 스프링과 깨진 유리 조각, 피 묻은 넝마 조각이 가득한 진흙과 잿더미를 헤치고. 누군가는 벽을 지탱할 대들보를 운반하고, 창에 유리를 끼우고, 경첩에 문을 달아야 하리. 사진에 근사하게 나오려면 많은 세월이 요구되는 법. 모든 카메라는 이미 또 다른 전쟁터로 떠나버렸건만. 다리도 다시 놓고, 역도 새로 지어야 하리. 비록 닳아서 누더기가 될지언정 소매를 걷어붙이고. 빗자루를 손에 든 누군가가 과거를 회상하면, 가만히 듣고 있던 다른 누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