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철 38

바이칼

바이칼 신대철 1. 은빛 물빛 큰 소나무 위에서 품속으로 돌아온 아이들 산 능선 걸치고 잠들어가면 할머니는 먼 곳을 향해 웃으셨습니다. 잔잔한 할머니 눈가에 잡히던 은빛 물빛 바람에 눈빛승마에 반짝이던 은빛 물빛 할머니 돌아가신 뒤에는 먼 곳으로 번져갔던 웃음이 숨결을 타고 아내의 눈가로 돌아왔습니다. 눈 날리고 해 저물고 아이들이 전자사막에서 헤매다 돌아와도 아내는 모래와 흙과 먼지에 뒤덮인 채 먼 곳을 보고 조용히 웃었습니다. 은빛 물빛 할머니의 할머니의 머나먼 할머니를 향해 2. 바이칼에선 누구나 한 영혼? 숨결 흐르는 대로 흘러가는 길 광활한 평원을 가로질러 숨 부드러워지는 곳에서 우리는 잠시 길을 멈추었습니다. 백두대간을 타고 가면 한자리에 잔상으로 스치던 솜다리와 엉겅퀴와 민들레가 길언덕에 한..

신대철 2020.02.28

첫 목도리

첫 목도리 신대철 바람 부냐? 아뇨. 누가 왔다 갔냐? 아뇨. 머리맡 물그릇에 얼음 잡히는 밤, 아랫동네에는 객지로 나간 아이들 다 돌아온다고 살쾡이보고 오소리 너구리보고 혼잣말을 하시는 할머니. 할머니는 눈이 가매지도록 벽에 기대어 뜨개질만 하신다. 눈 맑히는 눈 왔다 가고 귀 트이는 눈 왔다 가고 조금씩 눈발이 굵어진다. 품속에 숨긴 털목도리 아시는 듯 불빛 등진 채 홑이불로 어깨 감싸고 뜨개질 하시는 할머니 천장에 기어드는 별빛 보고 천지사방으로 돌아눕다 납작한 몸 벽에 붙이고 주무신다. 내린 눈 쌓이지 않고 소리 내며 날아다닌다. 할머니 잠든 사이 눈 다시 내리고 나는 삼거리로 내려간다. 물푸레 숲속에서 주운 털목도리, 나무하러 갈 때 몰래 쓰고 품에 넣고 다닌 목도리, 사람 소리만 스쳐도 목줄기..

신대철 2018.01.20

마지막 그분

마지막 그분 신대철 7부 능선에서 개활지로 강가로 내려오던 밤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지만 앞선 순서대로 이름 떠올리며 일렬로 숨죽이며 헤쳐가던 길 그분은 맨 끝에 매달려 왔다 질퍽거리는 갈대숲에서 몇번 수신호를 보내도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깜깜한 어둠 속을 한동안 응시하다가 군사분계선을 넘어갔다 함께 가자 위협하지도 않고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작전에 돌입하기 직전 손마디를 하나하나 맞추며 수고스럽지만 하다가 다시 만나겠지요 하던 그분 숨소리 짜릿짜릿하던 그 순간에 무슨 말을 하려다 그만두었을까 그게 그분의 마지막 말일 수도 있는데 나는 왜 가만히 듣고만 있었을까 창 흔들리다 어두워지고 천장에 달라붙은 천둥 번개 물러가지 않는다 ―『누구인지 몰라도 그대를 사랑한다』창비시선, 2005.

신대철 2016.05.29

흰나비를 잡으러 간 소년은 흰나비로 날아와 앉고

흰나비를 잡으러 간 소년은 흰나비로 날아와 앉고 신대철 죽은 사람이 살다 간 南向을 묻기 위해 사람들은 앞산에 모여 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 소년들은 잎 피는 소리에 취해 山 아래로 천 개의 시냇물을 띄웁니다. 아롱아롱 山울림에 실리어 떠가는 물빛, 흰나비를 잡으러 간 소년은 흰나비로 날아와 앉고 저 아래 개나리꽃을 피우며 활짝 핀 누가 사는지? 조금씩 햇빛은 물살에 깍이어 갑니다. 우리 살아 있는 자리도 깎이어 물 밑바닥에 밀리는 흰 모래알로 부서집니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 흰 모래 사이 피라미는 거슬러 오르고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 그대를 위해 사람들은 앞산 양지쪽에 모여 있습니다.

신대철 2016.03.01

<무인도를 위하여> 해설 - 김현

신대철 해설 꿈과 현실 -신대철의 시 김현 낮은 산도 깊어진다 비안개에 젖어 무수히 피어나는 속잎 연하디연한 저 빛깔 사이에 섞이려면 인간의 말의 인간을 버리고 지난 겨울 인간의 무엇을 받아들이지 않아야 했을까? -- 시집을 읽으면 그가 그를 둘러싼 환경과 어떻게 싸우고 성장했는가를 비교적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그가 제일 먼저 부딪친 환경은, 이 시집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를 따라다니고 있는 산이다. 산골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만날 수 있는 친숙한 산이다. 그 산 속에서 자연과 평화롭게 교감한, 자연 속의 나로서, 혹은 내 속의 자연으로서 갈등 없이 교감한 시인의 유년 시절이 점차적으로 도시로서 표상될 수 있는 반자연적인 인위적 환경에 의하여 침해되기 시작하여, 마침내는 그것의 대립 ..

신대철 2015.12.24

고리섬

고리섬 신대철 방앗간 탱자나무 울타리 밑으로 불어오던 들바람 소리, 방죽에서 흘러들던 비릿하고 후끈한 물냄새, 개구멍만 남은 동네 뒷문이 열리면서 황황히 들길로 사라지던 쫓기는 발자국 소리, 멀리 따가운 햇볕과 거칠게 흔들리는 보리밭 물결 위로 언뜻 떠오르다 가라앉던 검은 뒷모습, 그날 우리는 탱자를 따다 영문도 모르고 쫓겨갔던가, 비행기 소리 들리고 쫓길수록 달아날수록 앞지르던 공포, 공포, 숨도 고르지 않고 우리는 들 한가운데에 그냥 서 버렸고 느티나무에 올라앉아 사방을 둘러보았던가, 뜸, 뜸, 뜸부기 소리 희미하게 들리면서 봉긋하게 무덤 하나 부풀어 있었고 거기 웬 아저씨가 봉분 아래 깜부기 같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보리 물결이 눈 주름에 깊게 일렁이고 있었다, 지리산으로 들어간다는 아저씨는 우릴..

신대철 2015.12.24

七甲山 1

七甲山 1 신대철 소년들이 모이는 밤은 보름달이 물가 청머루 덩굴 숲 속에서 기다립니다. 소년들은 달을 따라 馬峙里에서 제일 높아 보이는 꾀꼬리봉에 꼬불꼬불한 산길을 놓습니다. 上峰에 올라서면 또 上峰, 칠갑산은 정말 아흔아홉 봉우립니다. 아흔아홉 골짜기엔 다른 山에서 흘러 들어온 온갖 잡새가 떠돌고 합대나무골 철이 아버님처럼 코를 골며 이빨 갈며 잠 험히 자는 숱한 산울림 소문들, 아득한 백마강 쪽에서 불어오는 강바람은 넓은 떡갈나무잎에 느닷없이 달빛을 뿌립니다. 저게 계룡산? 저게 오서산? 장곡사는 어디? 까치내는? 참, 邑內는? 아아, 달빛에 반사되어 달이 되는 호기심 호기심이 소년들을 홀려 上峰에서 上上峰으로 밤새도록 끌고 다닙니다.

신대철 2015.12.24

본래적 자아를 찾아 떠도는 유랑의 섬-신대철론 - 박남희

본래적 자아를 찾아 떠도는 유랑의 섬-신대철론 박 남 희 신대철 시인을 만나 뵈려고 국민대를 찾은 날은 공교롭게도 현대시 송년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나와 함께 시산맥 동인으로 있는 배홍배 시인(사진 담당)과 국민대 앞에서 오후 3시에 만나기로 약속했지만 배홍배 시인이 초행길이라 30분 정도 늦게 도착했다. 북악관 15층으로 올라가니 연구실의 문이 열려있고 연구실 안의 수많은 책들 사이에서 신대철 시인이 우리들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저녁햇빛 사이에서 온화한 북악산을 보는 듯 그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사실 나는 신대철 시인을 그 날 처음 보았다. 자연 친화적인 시인의 자연 친화적인 모습은 맑고 겸손했다. '고려대학교 장서'라는 검은 도장이 찍혀있는 두 권의 시집을 무책임하게(?) 들고 있는 나를 보고 신..

신대철 2015.1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