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1062

초록 동맹 - 홍일선

초록 동맹   홍일선     세상이 질고로 가득하니   그들은 불임으로 답 주었다   잎새는 무성하였지만   꽃 내놓는 것을 두려워했고   끈달아 열대야가 계속되었고   또 초록별 어디에선 혹한이 일상이었고   세상이 아수라 야수들로 넘칠 때   한 생명은 한 생명을 거부할 수 있는 것    씨앗을 과실을 주지 않겠다는 것은   종족을 퍼트리지 않겠다는 것은   인류세 끝이 가까이 왔다는 선언    미래 세대를 도둑질하지 말라는    그레타 툰베리 소녀의 초록 법설을    그들도 삼가 경청하였던 것   그들은 초록 동맹    강경파 맹원이 된 것이다     ―『초록법설』 시화총림, 2024.

내가 읽은 시 2025.03.12

고고杲杲 - 이자규

고고杲杲    ― 유협 『문심조룡』 물색 편에서   이자규     그것은 높고 깊고 그윽하게 반짝이는 경이    내 눈을 뺏어간 마당은   이미 태양의 간을 발라 피를 뿜는 중이다   내 시신경을 잡고 요요거리는 마당에 이윽고   간밤의 상처가 안경 벗어놓고 사라지기 시작한다    꽃병 없이 낱말도 없이 문장이고 물관인 당신,   자욱하다    바람이 거세되고 기진한 밭이랑을 감싼 흙   산비알에서 온 살점들은 옥토의 추상형   석류꽃들 벌고 오이꽃 피고 긴말 전하지 않아도   푸름으로 알아듣는 남새가 있고   빛과 그늘에 죽고 사는 이파리가 낭자하다    다친 마음은 눈이 밝아서 경물의   기와 운으로 음양을 깃들이고 있는   당신   열린 수정체 너머 내 망막으로 버거운 햇발 노 맞고 서서   이 빛..

내가 읽은 시 2025.03.09

나는 파란고리문어 - 이자규

나는 파란고리문어   이자규     그랬는데 바닷물이 안방까지 밀려왔는데 새끼문어였다   다 커서 생모 찾아 말없이 떠난 막내의 웃는 얼굴   파도야 뒤집어엎어라 쳐라 때려라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도 온몸이 흥건했던    것처럼   수만 꼬리 탐색의 수컷을 만나 단 한 번의 열렬한 사랑인   아무것도 안 먹고 촉수로 바람을 일으킨 어종처럼   잠시도 쉬지 않고 울음보다 강하게 가르친 적을 아는지   마지막 인사인 너    지금은 누가 만지기만 해도 독성이 번지는 살의로 생을 마감하는   파란고리문어의 아픈 blue와 땀나는 波浪 속이다    식후 넘긴 분홍 젤로다 세알이 환각 속 서른 해를 달리고   옹알이처럼 몽실몽실 흰 목덜미를 돌리고 네가 처음 와서   수두로 온 얼굴에 밭죽 뒤집어쓰고 가쁜 숨..

내가 읽은 시 2025.03.09

블랙맘바 - 이자규

블랙맘바   이자규     이제 내 탐지에 걸려들지 마라   나는 네게 내 이빨을 다 주었다    어차피 생은 드러내거나 숨기는 것으로 저무는 것   빠진 눈알을 헹궈 다시 넣는 어미를 지켜보며   外耳에 진동이 자라나고 있는 블랙맘바    엄마, 한밤중에 방문하는 저 모자들이 두려워요   내가 태어날 때 너는 나를 읽어주었단다   그러니까 저들 앞에서 줄타기하고 싶은 걸요    어디선가 너의 이복동생을 물어다 내 등에다 업히고   아버지는 좀 더 높은 쪽에서 하반신이 잘려나갔단다    엄마 내 우주가 대만원이라서 그래요 희미해지는 걸요   돌멩이 위에 침을 흘리고 다니지 마라   집게를 든 손들은 좋아서 발소리를 죽일 것이다   알아요 이제 기척을 듣고도 이빨을 아끼는 걸요    내 둥지 앞에 매해 젊..

내가 읽은 시 2025.03.09

광포리 석화

광포리 석화   이자규     파래 섞은 석화 물회, 하동 광포리 지나   늙을 줄 모르는 달빛만 우수수   노량대첩을 아는 바람이   대교 아래 통통배 왜적 같은 해풍이 거칠다    잘살자는 고속기계문명으로 노쇠해진 닻을 보다   방학 때면 남해군청 앞 할머니 댁으로 갔던 단발머리   노를 저어 건넜던 나룻배도 사라진 지 오래    파도가 센 날은 이쪽 여인숙에서 정유재란을 떠올리며   물별들과 밤을 새웠고   해상봉쇄라는 역사적 기억 속에 들어   한참을 출렁거렸던 바다 울음에 가슴이 아렸다    광포 바닷가에서 따온 석화를 동산처럼 쌓아놓고   하동김을 묶어 냈던 고모는   이젠 녹슨 어구만 닦으며 하는 일이 없다    금오산 허리를 돌아 광양만으로 이어지는 산업차량 행렬이   왜적 풍을 닮았다  ..

내가 읽은 시 2025.03.09

떠도는 자의 노래 - 신경림

떠도는 자의 노래   신경림     외진 별정우체국에 무엇인가를 놓고 온 것 같다   어느 삭막한 간이역에 누군가를   버리고 온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문득 일어나 기차를 타고 가서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좁은 골목을 서성이고   쓰레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린   저잣거리도 기웃댄다   놓고 온 것을 찾겠다고    아니, 이미 이 세상에 오기 전 저 세상 끝에   무엇인가를 나는 놓고 왔는지도 모른다   쓸쓸한 나룻가에 누군가를   버리고 왔는지도 모른다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   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 모른다     —『뿔』 2002

내가 읽은 시 2025.03.03

티끌이 티끌에게 - 김선우

티끌이 티끌에게   -작아지기로 작정한 인간을 위하여   김선우 (1970~)     내가 티끌 한 점인 걸 알게 되면   유랑의 리듬이 생깁니다   나 하나로 꽉 찼던 방에 은하가 흐르고   아주 많은 다른 것들이 보이게 되죠   드넓은 우주에 한 점 티끌인 당신과 내가   춤추며 떠돌다 서로를 알아챈 여기,   이토록 근사한 사건을 축복합니다   때로 우리라 불러도 좋은 티끌들이   서로를 발견하며 첫눈처럼 반짝일 때   이번 생이라 불리는 정류장이 화사해집니다   가끔씩 공중 파도를 일으키는 티끌의 스텝,   찰나의 숨결을 불어넣는 다정한 접촉,   영원을 떠올려도 욕되지 않는 역사는   티끌임을 아는 티끌들의 유랑뿐입니다

내가 읽은 시 2025.02.28

꽃다지 - 서대선

꽃다지   서대선     눈 내린 새벽    남의 집 살러 가는   열두 살 계집아이   등 뒤로    눈 속에 묻히는   작은 발자국    멀리서 대문 닫아거는 소리     -------------------------------   꽃다지는 오이나 가지 등에 맨 처음으로 열리는 열매를 이르는 말입니다. 요즘은 상상할 수도 없지만, 예전 가난하던 시절에는 입 하나 덜기 위해서 식모살이를 보내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제목인 “꽃다지”에 암시되어 있듯이 주로 맏딸이 그런 역할을 했습니다. 시인은 구구절절 긴 설명을 하는 대신 행간의 여백을 사용해 “눈 내린 새벽” 길로 상징되는 차갑고 어두운 세상으로 나가는 “열두 살” 어린 소녀와 “대문 닫아거는 소리”로 상징되는 부모와의 단절을 압축적으로 잘 보여주..

내가 읽은 시 2025.02.08

어두운 등불 아래서 - 오세영

어두운 등불 아래서   오세영(1942~)     한 겨울 밤   정갈한 백지 한 장을 앞에 두고 홀로   네게 편지를 쓴다.   그러나   바람이 문풍지를 울리자   터벅터벅 사막을 건너던 낙타의 고삐 줄이   한 순간 뚝 끊어져버리듯   밤바다를 건너던 돛대의 키가 불현듯 꺾여지듯   무심결에   툭,   부러지는 연필심.   그 몽당연필 하나를 들고   흔들리는 등불 앞에서 내 마음   아득하여라.   내 마음 막막하여라.

내가 읽은 시 2025.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