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찬호 37

봄날을 가는 山徑

봄날을 가는 山徑 송찬호 이그, 저기 가는 저것들 또 산경 가자는 거 아닌가 멧부리를 닮은 잔등 우에 처자를 태우고 또랑물에 적신 꼬리로 훠이 훠이 마른 들길을 쓸고 가고 있는 저 牛公이 어깻죽지 우에 이름난 폭포 한 자락 걸치지도 못한 저 비루먹은 산천이 막무가내로 봄날 산경 가자는 거 아닌가 일자무식 쇠귀에 버들강아지 한 움큼 꽂고 웅얼웅얼 가고 있는 저 풍광이 세상의 절경 한 폭 짊어지지 못하고 春窮을 넘어가는 저 비탈의 노래가 저러다 정말 산경의 진수를 찾아 들어가는 거 아닌가 살 만한 땅을 찾아 저렇게 말뚝에 매인 집 한 채 뿌리째 떠가고 있으니 검은 아궁일 끌어 묻고 살 만한 땅을 찾아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저 신선 가족이 가고 있으니

송찬호 2020.11.01

칸나

칸나 송찬호 드럼통 반 잘라 엎어놓고 칸나는 여기서 노래를 하였소 초록 기타 하나 들고 동전통 앞에 놓고 가다 멈춰 듣는 이 없어도 항상 발갛게 목이 부은 칸나 그의 로드 매니저 낡은 여행용 가방은 처마 아래에서 저렇게 비에 젖어 울고 있는데 그리고 칸나는 해질녘이면 이곳 창가에 앉아 가끔씩 몽롱 한 잔씩 마셨소 몸이 이미 저리 붉어 저녁노을로 타닥타닥 타고 있는데 박차가 달린 무거운 쇠구두를 신고 칸나는 세월의 말잔등을 때렸소 삼나무숲이 휙휙 지나가버렸소 초록 기타가 히히힝, 하고 울었소 청춘도 진작에 담을 넘어 달아나버렸소 삼류 인생들은 저렇게 처마 밑에 쭈그리고 앉아 初老를 맞는 법이오 여기 잠시 칸나가 있었소 이 드럼통 화분에 잠시 칸나가 있다 떠났소 아무도 모르게 하룻밤 노루의 피가 자고 간, ..

송찬호 2018.04.26

17번 홀에서의 무반주 첼로 독주

17번 홀에서의 무반주 첼로 독주 송찬호 첼로 홀로 무대 한가운데 앉아 있다 첼로 연주자와 첼로 악보는 술주정뱅이 음악과 함께 아직 이곳에 도착하지 않았다 세계는 루머로 가득 차 있다 신흥 종교가 발생한 복음의 땅으로 황금 좌변기들이 떼 지어 날아간다 양귀비들은 다시 국경을 넘었다 이제 그 붉은 난민들을 받아줄 곳은 지상 어느 나라도 없다 어느 도시에서는 독특한 시위 방법으로, 정기적으로 창밖 거리로, 일제히 냄비를 집어 던진다 아라비안나이트는 파탄이 났다 양탄자와 요술램프가 전격 이혼을 발표했다 세계는 곧 어두워졌다 객석에 검은 별들이 듬성듬성 박혀 있다 첼로는 여전히 무대에 고적하게 앉아 있다 연미복 첼로 연주자와 양피지 첼로 악보는 비틀거리는 음악을 부축하고 연주회장을 찾기 위해 미친 듯이 골짜기를..

송찬호 2017.11.20

금동반가사유상

금동반가사유상 송찬호 멀리서 보니 그것은 금빛이었다 골짜기 아래 내려가보니 조릿대 숲 사이에서 웬 금동 불상이 쭈그리고 앉아 똥을 누고 있었다 어느 절집에서 그냥 내다 버린 것 같았다 금칠은 죄다 벗겨지고 코와 입은 깨져 그 쾌변의 표정을 다 읽을 수는 없었다 다만, 한 줄기 희미한 미소 같기도 하고 신음 같기도 한 표정의 그것이 반가사유보다 더 오래된 자세라는 생각이 잠깐 들기는 했다 가야 할 길이 멀었다 골짜기를 벗어나 돌아보니 다시 그것은 금빛이었다 —「분홍 나막신」문학과지성사, 2016.

송찬호 2017.09.07

귀신이 산다

귀신이 산다 송찬호 그는 전쟁과 독재 시절의 과거에서 왔다 어느 장의사가 못질을 잘못한 대지의 관을 간신히 빠져나왔다 헝클어진 머리 천 개의 캄캄한 밤을 이미 본 듯한 퀭한 눈 더구나 오래 씻지도 않은 것 같았다 검푸른 이념의 곰팡이가 보기 흉하게 온몸을 덮고 있었다 그는 가끔 누구와 이야기하고 있는 듯 혼자 중얼거렸다 어깨 위 허공으로 바나나와 사과를 건네기도 하였다 한참 거리를 쏘다니다 쇼윈도 거울 앞에 이르러 자신의 어깨가 조금 기우뚱한 걸 알아챈 것 같았다 그는 히죽 웃으며, 오른쪽 어깨 위의 귀신을 왼쪽 어깨로 옮겨 앉혔다

송찬호 2017.09.07

모란이 피네

모란이 피네 송찬호 외로운 홑몸 그 종지기가 죽고 종탑만 남아 잇는 골짜기를 지나 마지막 종소리를 이렇게 보자기에 싸 왔어요 그런데 얘야, 그게 장엄한 사원의 종소리라면 의젓하게 가마에 태워 오지 그랬느냐 혹, 어느 잔혹한 전쟁처럼 그것의 코만 베어 온 것 아니냐 머리만 떼어 온 것 아니냐, 이리 투정하신다면 할말은 없지만 긴긴 오뉴월 한낮 마지막 벙그는 종소리를 당신께 보여주려고, 꽃모서리까지 환하게 펼쳐놓는 모란보자기

송찬호 2017.09.07

냉이꽃

냉이꽃 송찬호 박카스 빈 병은 냉이꽃을 사랑하였다 신다가 버려진 슬리퍼 한 짝도 냉이꽃을 사랑하였다 금연으로 버림받은 담배 파이프도 그 낭만적 사랑을 냉이꽃 앞에 고백하였다 회색 늑대는 냉이꽃이 좋아 개종을 하였다 그래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긴 울음을 남기고 삼나무 숲으로 되돌아갔다 나는 냉이꽃이 내게 사 오라고 한 빗과 손거울을 아직 품에 간직하고 있다 자연에서 떠나온 날짜를 세어본다 나는 아직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분홍 나막신」문학과지성사, 2016. 3.

송찬호 2017.09.07

장미

장미 송찬호 우리가 장미를 기다리는 동안 이 세게에 장미는 먼저 가시를 보내주었다 우리가 오래 장미를 기다리는 동안 이 세계는 조금 더 밝아지거나 어두워지기도 했다 포탄 구덩이에서도 사막의 아들들은 태어나고 대물림해온 악은 더욱 큰 부와 명예로 대물림되었다 보라, 앉은뱅이와 말더듬이가 갑자기 이렇게 많아진 건 장미가 더 가까이 왔음이라, 이 세계의 피가 모두 빠져나간 창백한 저 흰 사원을 우리의 폭력으로 붉게 다시 채워보자 장미를 보기 위하여, 오늘도 누군가 의자에 올라 올가미에 얼굴을 집어넣는다 그러나 단호히 의자를 걷어차지는 못한다 장미는 아주 가까이 왔으나, 아직 이곳에 도착하지는 않았다 —「분홍 나막신」 문학과지성사, 2016. 3.

송찬호 2017.09.07

11월

11월 송찬호 산 너머 사는 사슴들의 천도(遷都)소식이 들린다 이제 사슴의 나라도 한 도읍에서 백 년을 버티지 못하는가 보다 하늘이 소란하다 남쪽을 향해 날던 철새들이 공중을 움푹 파고 거기다 죽은 새를 묻는다 그들은 갈 길이 멀어 지상에 내려와 장례를 치를 시간이 없다 정원을 다스리던 나무의 왕도 열 걸음을 걷지 못한다 그는 늙었다 이제 모든 게 시들었다 지난 여름 수수께끼의 포도 씨앗을 누가 가장 멀리 뱉었는지 모두들 까맣게 잊었다 박태기나무 그늘에 묻혀 있던 녹색 의자도 벌써 치워버렸다 이 소읍의 소문은 빠르다 부도난 은행과 여관이 몰래 도망가다 맹렬한 첫추위에 잡혀 다시 돌아온다는 소식이다 풍속(風俗)이 점점 어두워진다 이제 불을 켜자 —「분홍 나막신」문학과지성사, 2016. 3.

송찬호 2017.09.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