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 13

관심 - 이영광

관심   이영광     아프지도 않으면서 전화로 휴강시키고   우히히히, 베개를 끌어안고   뒹구는 사람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사람   금방 거짓말이 될 비밀들이   가슴속에 가득한 사람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혼자가 되는 사람   휴대폰과 인터넷과 디스커버리 채널의   정글 너머에   어쩌다 출몰하는 사람   사람이 되란 말이 가장 무서운 사람   사람인 듯 사람인 듯한 사람   나는 이 사람이 이상하다   나는 요즘 오직 이 사람한테 관심이 있다                    —『직선 위에서 떨다』 창비 2003.

내가 읽은 시 2024.08.30

빗소리 - 전동균

빗소리   전동균     빈집 처마 끝에 매달린 고드름을 사랑하였다   저문 연못에서 흘러나오는 흐릿한 기척들을 사랑하였다   땡볕 속을 타오르는 돌멩이, 그 화염의 무늬를 사랑하였다    나는 나를 사랑할 수 없어   창틀에 낀 먼지, 깨진 유리 조각, 찢어진 신발,   세상에서 버려져   제 슬픔을 홀로 견디는 것들을 사랑하였다    나의 사랑은   부서진 새 둥지와 같아   내게로 오는 당신의 미소와 눈물을 담을 수 없었으니    나는   나의 후회를   내 눈동자를 스쳐간 짧은 빛을 사랑하였다                        —『한밤의 이마에 얹히는 손』 2024

내가 읽은 시 2024.08.28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 나희덕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나희덕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나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흰꽃과 분홍꽃을 나란히 피우고 서 있는 그 나무는 아마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   멀리로 멀리로만 지나쳤을 뿐입니다    흰꽃과 분홍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   눈부셔 눈부셔 알았습니다    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은 그 나무는   그래서 외로웠을 것이지만 외로운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 여러 겹의 마음을 읽는 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   조금은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복숭아나무 그늘에서   가만히 들었습니다 저녁이 오는 소리를   ..

내가 읽은 시 2024.08.16

심재휘의 「어느덧나무」 감상 나민애

어느덧나무 심재휘(1963~ ) 작고 붉은 꽃이 피는 나무가 있었다 어김없이 꽃이 진다고 해도 나무는 제 이름을 버리지 않았다 어김없이 어느덧 흐릿한 뒤를 돌아보는 나무 제가 만든 그늘 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어느덧나무 어느덧나무 제 이름을 나지막하게 불러보는 나무를 떠나간 사랑인 듯 가지게 된 저녁이 있었다 출가한 지 오래된 나무여서 가까이할 수 있는 것은 이름밖에 없었다 -------------------------------------- 옛적에, 내가 가보지도 않았고 살지도 않았던 시절에 ‘무엇’이 살았다. 이런 첫 문장은 항상 기대된다. 책을 펼친다면 그 시작은 항상 이런 문장 때문이었다. 내가 살아 보지 못한 인생이 하는 말이 궁금해서 남의 글을 읽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작고 붉은 꽃이 피..

해설시 2024.08.13

황유원의「루마니아 풍습」감상 - 김지율

루마니아 풍습   황유원     루마니아 사람들은 죽기 전 누군가에게   이불과 베개와 담요를 물려준다고 한다   골고루 배인 살냄새로 푹 익어가는 침구류   단단히 개어놓고 조금 울다가   그대로 간다는 풍습    죽은 이의 침구류를 물려받은 사람은   팔자에 없던 불면까지 물려받게 된다고 한다   꼭 루마니아 사람이 아니더라도   죽은 이가 꾸다 버리고 간 꿈 냄샐 맡다 보면   너무 커져버린 이불을, 이내 감당할 수 없는 밤은 오고   이불 속에 불러들일 사람을 찾아 낯선 꿈 언저리를   간절히 떠돌게 된다는 소문    누구나 다 전생을 후생에   물려주고 가는 것이다, 물려줘선 안 될 것까지   그러므로 한 이불을 덮고 자던 이들 중 누군가는 분명   먼저 이불 속에 묻히고    이제는 몇 사람이..

해설시 2024.08.13

이태수의 「풀잎 하나」 감상 - 문태준

풀잎 하나 이태수(1947~ ) 깊은 산골짜기 밀림에 깃들면 찰나와 영원이 하나같다 지나간 시간도 다가오는 시간도 함께 어우러져 있는 것만 같다 울창한 나무 그늘에서 흔들리는 나는 조그만 풀잎 하나 꿈꾸다 꿈속에 든 풀잎 하나 ---------------------------------- 심곡심산(深谷深山)의 산림(山林)을 더러 만나게 되지만 대개는 능선과 높은 산봉우리와 깊은 계곡을 눈으로 살피게 된다. 그런데 시인은 큰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산에 들어가서 작은 풀잎에 눈이 간다. 나무가 드리운 그늘 속에서 가만가만히 흔들리는 풀잎에 관심을 둔다. 산림은 하나의 생명 세계로서 순간과 영원,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한데 조화돼 한 덩어리를 이루면서 섞여 있는 곳인데, 시인은 거기서 하나의 개체로서의 풀..

해설시 2024.08.13

최정례의 「참깨순」 감상 - 박소란

참깨순          ―병실에서   최정례     오년 생존율 오십오 프로란 무슨 뜻인가요?   별거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간호간병 시스템4인실의 조무사들은   내 모든 오줌의 무게를 잰다   오줌 누면 달려가서 재고 기록하고   어린애처럼 나는 오줌 마렵다고 고해야 한다    옆 침대 아주머니는 수박 오천통을 밭떼기로   실어 보내고 왔단다   아이구 나 좀 살려줘요   검사 받다 죽을 거 같애   밤새도록 앓다가   아침에 남편에게 전화해서   참깨순 나왔어? 묻는다    항암제, 면역억제제 매달린   창 너머로 하늘이 펼쳐져 있다   그곳을 가로질러 작은 것들이 날아다닌다   파리인가 눈 감았다 뜨니 잠자리다   잠자리일까 새일까    관련 마커가 죄다 음성이네요   이런 경우 진단이 ..

해설시 2024.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