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은 유례없이 긴 장마에다 강수량도 많았고 유난히 더웠다. 아직도 낮에는 33도를 오르내리고 있다. 더위를 피하여 아내와 나는 산가에 머물면서 텃밭 일을 하고 볼일이 있을 때만 가끔 시내에 나오곤 했었다. 어제는 참깨를 쩌서 비닐하우스 안에다 세워 두었고, 지난주에는 김장배추도 모종했다. 익은 고추를 따서 고추 건조용 미니 비닐하우스에다 넣어 두었으므로 며칠은 따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텃밭 일이 좀 한가해졌고 조석으론 제법 서늘해서 어제 시내로 나왔다.
산가에 머무는 동안 자전거를 타지 못해서 탄탄하던 허벅지 근육이 많이 풀린 느낌이다. 지난봄에 함께 자전거를 타다가 팔이 부러진 아내는 이제 많이 나았지만 아직 오른팔을 맘대로 쓰지 못하고 있다. 완치가 된다 해도 앞으로는 겁이 나서 자전거를 타지 못할 것 같다. 그렇지만 나는 계속 탈 것이다. 오는 늦가을쯤엔 자전거를 타고 이곳 대구에서 변산 바닷가까지 두리번거리며 낯선 마을을 기웃거리며 사진도 찍으며 천천히 가볼 생각이다. 함께할 친구가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혼자서 호젓하게 갈 것이다.
어릴적에 내겐 꿈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고향마을에서 저녁노을이 지는 쪽으로 걸어서 서쪽 바닷가까지 가보는 것이었다. 고개를 넘어 강을 건너고 들판을 지나서 서쪽으로 서쪽으로 걸어서 가보고 싶었다. 그 꿈은 아직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젊었을 땐 열차와 시외버스를 타고 대전과 부안을 거쳐 변산해수욕장과 고창 선운사에 한 번 다녀왔었고, 그 후엔 자가용 자동차 시대가 도래하여 차를 몰고 서해 바닷가를 몇 번 다녀왔을 뿐이다. 그래서 더 늙기 전에 자전거를 타고서라도 변산까지 한 번 다녀오고 싶은 것이다. 그러자면 틈틈이 체력단련을 해 두어야 할 것이다.
오늘은 그 체력단련의 일환으로 이른 아침을 간단히 먹고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길을 나섰다. 처음 접해서 생소한 자전거 내비게이션 앱을 테스트해 볼 목적도 있었다. 제법 높은 고개를 넘어야 하는 옻골 한옥마을까지 갔다가 돌아올 작정이었다.
그 '제법 높은 고개'의 이름을 알고 싶어 네이버 지도나 카카오맵을 찾아보았지만 어디에도 이름은 나와 있지 않았다. 자전거길을 따라 불로천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천연기념물 1호인 '도동 측백나무숲'을 지나자마자 오른쪽으로 작은 다리(태봉교)를 건너면 시작되는 것이 이 고개다.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있고 교통량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따로 구분된 자전거길이나 갓길이 없을 뿐만 아니라 중앙선 표시마저 없어서 자전거를 타기엔 위험한 도로다. 그래서 오르막을 오를 땐 뒤쪽에서 다가와 추월하는 자동차에 신경이 무척 쓰이는 것이었다.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걷잡을 수 없는 내리막이라 시원하게 내달릴 수 있었다.
고개를 다 내려가면 예전에 나의 둘째이모가 사시던 둔산마을이 나온다. 지금은 이 마을도 공장이나 창고 같은 건물들이 많이 들어서서 몰라보게 바뀌었다. 어릴적에 이모집에 왔다가 두어 번 이발을 했었던 '둔산이용소'는 페인트로 여러 번 덧칠을 한 간판과 함께 아직도 그 자리에 있었다. 영업중임을 표시하는 회전등이 없는 것으로 보아 폐업을 한 것 같았지만 에어컨 실외기는 설치되어 있었다. 행인이 보이지 않아 물어볼 수도 없어서 나는 중얼거리며 마을을 돌아나왔다. '흐른 세월이 얼마나 많은데 간판이 남아 있는 것만도 놀라울 일이지.'
둔산마을의 이웃동네가 바로 옻골마을이다. 큰길로 조금 돌아가도 되겠지만 나는 일부러 밭 사잇길로 질러갔다. 나팔꽃이 아침인사를 하는 울타리를 지나 경부고속도로 굴다리를 지나 낚싯대를 드리우고 종일 앉아 있어도 좋을 연못을 지나……
이곳 옻골 한옥마을은 전에도 자전거를 타고 다녀간 적이 있었다. 그게 벌써 2년 반 전이다. 그때는 오늘처럼 고갯길을 넘어왔다가 집으로 갈 땐 자전거길도 아닌 편도 2차선의 드넓은 자동차 전용도로를 씽씽 달리며 대여섯 개의 컴컴한 터널을 통과하여 돌아갔었다. '4차 외곽순환도로'가 거의 완공단계였지만 개통은 안 되었을 때였기 때문에 그런 행운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마을 앞의 느티나무와 고풍스런 골목길, 많은 한옥들과 그 한옥들의 좌장격인 '백불고택'은 여전하였다. 능소화 덩굴에 덮인 돌담이 일품이었고 텃밭에서 자라는 에메랄드그린이 복슬강아지처럼 귀여웠다.
이 마을에 산다던 한 사람이 생각났다. 아직도 이곳에 살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느닷없이 전화해서 차 한잔 하자며 불러내어도 좋을 만큼 잘 아는 사이는 아니라서 그냥 마을만 한 바퀴 돌아서 오던 길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오늘 자전거를 탄 거리는 25.5km로 그다지 멀지 않았다. 그동안 사용해 오던 거리계 앱은 작동을 잘 하였지만, 처음 사용해 본 'K맵'의 자전거 내비게이션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다. 지정된 길을 너무 고집하여 거기서 조금만 벗어나면 경로를 재탐색한다는 메시지를 반복할 뿐 지정된 경로로 찾아갈 새로운 경로를 보여주지 않았다. 그리고 더 큰 문제점은 가끔 작동을 멈추어 기록이 단절돼 버리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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