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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엽의 「산문시 1」 평설 - 신형철

산문시 1 신동엽 스칸디나비아라던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 묻은 책 하이데거 러셀 헤밍웨이 장자(莊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소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 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남해에서 북강까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갯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군가 불리우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트럭을 두대씩이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 이름..

해설시 2023.10.23

황지우의 「나는 너다 44」 평설 - 신형철

나는 너다 44 황지우 1980년 5월 30일 오후 2시. 나는 청량리 지하철 플랫폼에서 지옥으로 들어가는 문을 보았다. 그 문에 이르는 가파른 계단에서 사람들은 나를 힐끗힐끗 쳐다만 보았다. 가련한지고, 서울이여. 너희가 바라보는 동안 너희는 돌이 되고 있다. 화강암으로 빚은 위성도시衛星都市여, 바람으로 되리라. 너희가 보고만 있는 동안, 주주의는 죽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웁시다. 최후의 일인까지! 내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내 소리를 못 듣느냐? 아, 갔구나, 갔어. 석고로 된 너희 심장을 내 꺼내리라. 나에게 대들어라. 이 쇠사슬로 골통을 패주리라. 왜 내가 너희의 임종을 지켜야 하는지! 잘 가라, 잘 가라. 문이 닫히고 나는 칼이 쏟아지는 하늘 아래로 갔다. 파란 유황불의 화환花環 속에서 나는..

해설시 2023.10.17

고구마 캐기

수년 동안 들깨와 참깨, 마늘과 양파, 콩 등을 심던 밭의 일부에 돌려짓기 하여 올해는 고구마를 세 이랑 반 심었다. 자색고구마, 밤고구마, 꿀고구마 등 세 종류의 고구마를 각각 100여 포기씩 심었었다. 그때가 지난 5월 중순, 자전거 사고로 아내가 입원해 있을 때였다. 자색 고구마 모종은 내가 직접 싹을 키운 것이었고 밤고구마와 꿀고구마 모종은 불로5일장에서 산 것이었다. 고구마는 이종 동생들을 불러 함께 캐었다. 매제와 조카도 함께 했다. 밭에 가득 얽힌 고구마 덩굴들을 낫으로 베어 걷어내고 멀칭 비닐까지 걷아낸 다음, 호미와 삽과 포크로 이랑에 돋우어진 북을 파헤쳐 고구마를 캐었다. 작업인원이 많아서 한결 쉬웠다. 그런데, 고구마를 캐어 보니 달린 숫자는 많았으나 크기는 대체로 잘았다. 유례없이 ..

텃밭 일기 2023.10.13

이영광의 「사랑의 발명」 평설 - 신형철

사랑의 발명 이영광 살다가 살아보다가 더는 못 살 것 같으면 아무도 없는 산비탈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누워 곡기를 끊겠다고 너는 말했지 나라도 곁에 없으면 당장 일어나 산으로 떠날 것처럼 두 손에 심장을 꺼내 쥔 사람처럼 취해 말했지 나는 너무 놀라 번개같이,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네 ―『나무는 간다』(2013) ------------------------------------------ “사랑은 재발명되어야 한다.” 많은 이들이 랭보의 이 구절을 인용할 때 이 문장이 포함돼 있는 다음 대목 전체에 찬성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난 여자들을 사랑하지 않아. 모두 알다시피 사랑은 재발명되어야 해. 여자들은 안전한 자리를 바랄 수밖에 없어. 일단 그것을 얻고 나면 마음이니 아름다움이니 하는 것은 내..

해설시 2023.10.13

김수영의 「봄밤」 평설 - 신형철

봄밤 김수영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業績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行路와 비슷한 回轉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人生이여 災殃과 不幸과 격투와 청춘과 千萬人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節制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靈感이여 —합동시집 『平和에의 證言』 (1957) --------------------..

해설시 2023.10.10

사람 숲에서 길을 잃다 - 김해자

사람 숲에서 길을 잃다 김해자 너무 깊이 들어와 버린 걸까 갈수록 숲은 어둡고 나무와 나무 사이 너무 멀다 동그랗고 야트막한 언덕배기 천지사방 후려치는 바람에 뼛속까지 마르는 은빛 억새로 함께 흔들려본 지 오래 막막한 허공 아래 오는 비 다 맞으며 젖어본 지 참 오래 깊이 들어와서가 아니다 내 아직 어두운 숲길에서 헤매는 것은 헤매다 길을 잃기도 하는 것은 아직 더 깊이 들어가지 못한 탓이다 깊은 골짝 지나 산등성이 높은 그곳에 키 낮은 꽃들 기대고 포개지며 엎드려 있으리 더 깊이 들어가야 하리 깊은 골짝 지나 솟구치는 산등성이 그 부드러운 잔등을 만날 때까지 높은 데 있어 낮은, 능선의 그 환하디환한 잔꽃들 만날 때까지 ― 『무화과는 없다』 걷는사람, 2022.

내가 읽은 시 2023.10.08

나무 믹담 - 김상환

나무 믹담* ―부인사 김상환 겨울 산사를 찾았다 부인은 없고 부인과 함께 바라본 느티가 묻는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지? 그럴 땐 나를 봐 무를 봐, 라고 곁에 선 왕벚이 거든다 나무에 새겨진 칼날의 허 공에는 마침내의 도가 있다 한쪽 귀가 깨진 서탑 풍경과 바람과 석등의 비밀이 부인에 있다 대웅전 지붕 끝 치미가 하늘을 오르다 말고 산신각 앞에 내려와 앉는다 흠도 티도 없는 절집 아침 마당과 마음을 돌고 도는 나는 포도나무 잎 진 자리 떨켜를 생각한다 저잣거리로 내려가는 길 눈의 흰 그림자 -------------------------------------- * 히브리어(מכתם, Michtam). 조각에 새겨 놓은 금언이나 지혜의 말씀. ―『왜왜』서정시학, 2023. 8. ■ 2023. 9. 25. ..

내가 읽은 시 2023.10.04

코스모스

코스모스 김사인(1956~ ) 누구도 핍박해본 적 없는 자의 빈 호주머니여 언제나 우리는 고향에 돌아가 그간의 일들을 울며 아버님께 여쭐 것인가 ------------------------------------- 소설가 이태준의 수필 중에 ‘가을꽃’이라는 짧은 글이 있다. 거기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가을꽃들은 아지랑이와 새소리를 모른다. 찬 달빛과 늙은 벌레 소리에 피고 지는 것이 그들의 슬픔이요 또한 명예이다.’ 갑자기 가을꽃이 짠하면서도 거룩하게 느껴진다. 이태준이 말한 것은 비단 꽃만은 아닐 것이다. 그가 짚어낸 가을꽃의 속성에서는 사람의 태도라든가 인생 같은 것이 떠오르기도 한다. 이렇게 우리는 꽃 하나를 놓고도 세월이라든가 우리네 삶까지 읽을 수 있다. 김사인의 이 시도 가을꽃을 제목으로 삼..

김사인 2023.1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