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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풀 - 이기인

밥풀 이기인 (1967~ ) 오늘 밥풀은 수저에서 떨어지지 않네 오늘 밥풀은 그릇에서 떨어지지 않네 오늘 밥그릇엔 초저녁 별을 빠뜨린 듯 먹어도 먹어도 비워지지 않는 환한 밥풀이 하나 있네 밥을 앞에 놓은 마음이 누룽지처럼 눌러앉네 떨그럭떨그럭 간장종지만한 슬픔이 울고 또 우네 수저에 머물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이 저녁의 어둠 이 저녁의 아픈 모서리에 밥풀이 하나 있네 눈물처럼 마르고 싶은 밥풀이 하나 있네 가슴을 문지르다 문지르다 마른 밥풀이 하나 있네 저 혼자 울다 웅크린 밥풀이 하나 있네

내가 읽은 시 2023.12.07

별천지에 다녀오다

날이 많이 풀려서 어제는 자전거를 함께 타려고 아침에 몇몇 친구들에게 전화를 했다. 봉환은 오전에 볼일이 있어서 오후에 타자고 했고, 태용은 부인과 함께 마트에 가기로 해서 안 되겠다고 하였고, 재현은 좋다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창수 형님에게 전화하여 오랜만에 점심을 함께 하기로 하고, 장소는 그 형님의 집 부근인 노변동蘆邊洞의 한 삼계탕집으로 정하였다. 봉환과 재현에게도 오후 1시까지 그 식당으로 자전거를 타고 오라고 했다. 봉무동에서 자전거를 타고 그곳까지 왕복해야 하는 내게는 충분한 운동이 되지만, 두 친구는 거기서 가까운 사월동沙月洞과 정평동正坪洞에 살기 때문에 점심을 먹은 후에 함께 금호강 자전거길을 좀더 탈 생각이었다. 창수 형님은 옛 직장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이자 선배인데, 오랜만에 만났다..

텃밭 일기 2023.12.07

그냥 쓰세요 - 구순희

그냥 쓰세요 ― 경상도 사투리 2 구순희 공중분해된 사투리를 불러들여 근처 수선집으로 갔다 ㅆ과 ㅅ의 발화는 수선 불가라며 돌려보내기에 몇 번 헛바퀴 돌다가 경상도라고 적힌 간판 속으로 쑥 들어갔다 그 집 주인은 벽에 붙은 된소리 몇 개를 읽어 보라고 한다 경기도는 겡기도, 경상도는 겡상도, 결혼은 게론, 나는은 나넌, 들은 덜로 읽고 쌀집은 살집, 쌍문동은 상문동, 썰매는 설매, 은행은 언행, 음악은 엄악, 의사는 이사, 형님 은 헹님이라고 하니 제대로 잘 읽었다고 한다 ㅆ은 ㅅ, 모음 ㅡ는 ㅓ로 발음하는 건 지역 특성상 어쩔 수 없는 발화법이라며 된소리의 높은 고개는 수선이 안 된다고 다른 사람들도 왔다가 못 고치고 돌아갔으니 그냥 아껴서 잘 쓰라고 한다 ― 『월간 시인』, 2023.11.

내가 읽은 시 2023.12.03

아홉 개의 피가 섞인 시 - 정철훈

아홉 개의 피가 섞인 시 정철훈 모스크바-페테르부르크행 야간열차 4인용 침대칸 한쪽은 러시아 노부부 다른 한쪽은 릴리와 나 릴리는 나를 배려한다며 위 칸으로 올라갔고 나는 아래 칸에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모스크바 근교를 벗어날 즈음 들려온 릴리의 목소리 창밖을 내다봐요, 석양이 지고 있어요 나는 카자흐인도 러시아인도 아니지요, 내 혈관에 몇 개의 피가 섞여 흐르는지 나도 몰라요 어머니 말로는 원래 러시아 혈통이었는데 카자흐, 집시, 투르크, 위구르, 아비시니야, 몽골, 카르키스, 그리고 아버지의 혈통인 한민족까지 모두 아홉 개의 피가 섞였다고 하더군요 그 밖에 내가 모르는 수십 개의 피가 섞여 있는지 누가 알겠어요? 나는 손을 위로 뻗어 릴리의 손을 잡았다 수십 개의 피가 섞이고 수십 번의 죽음을 거쳐 ..

내가 읽은 시 2023.12.01

푸앵카레의 우측 - 정숙자

푸앵카레의 우측 정숙자 행성들이 둥글 수밖에 없는 이유. 과일들이 모서리를 잃어버린 이유. 그게 다 바람과 천둥과 벼락에 스치다 그리된 것이다. 사철 두고 대신 울어주는 폭포며 풀벌레며 새들이… 흰 살 드러내고 찢어지는 설해목의 울음을… 새끼를 빼앗긴 개와 고양이와 염소와 종마의 울음을… 갑자기 당한 실패와 좌절 앞에 끓어오르는 인간의 울음을… 누군가 어디선가 울어주고 있다. 아름~답다~고 말하는 들꽃들이 구름과 돌멩이와 모래알이 둥근 이유는 인간보다 앞서 울었기 때문이다 인간보다 앞서 인간이 태어나기 이전에 벌써 그들은 자신의 울음을 끝낼 만큼 둥글어 졌다 그리고 ‘사물화’ 되었지만 아는 것이다. 둥긂 속에 버려진 것, 버려야 할 것, 그러나 버려지지 않은 최초의~ 최후의 그 눈물의 형태 둥긂이 뭔가를..

내가 읽은 시 2023.11.29

가을 전차 - 서대경

가을 전차 서대경 가을이 내 목을 조르는 듯하였다. 육교도 천변도 천변에 피어 있는 코스모스도 내 목을 조르는 듯하였다. 퇴근을 해도 갈 곳이 없는 나는 낡고 허름한 상가 골목을 쏘다니다가 양복 입은 흡혈귀 소설가와 마주쳐도, 백반집에서 혼자 밥 먹는 서대경 씨가 소리쳐 불러도 대답하지 않았다. 가을 햇살 부서져 내리는 고가도로 아래서, 가을 전차에 오르는 내 마음은 쓸쓸하기만 하였다. 하늘이 너무 파래요. 거리의 웃음이 너무 커요. 내 옆에 앉은 굴뚝의 기사가 자기 머리를 양손으로 붙들고 중얼거리는 동안에도, 종을 딸랑이며, 빨랫줄에 걸린 색색의 옷들 단풍처럼 나부끼는 좁은 골목을 가을 전차가 달려가는 동안에도, 내 마음은 몹시 아득하기만 하였 다. 나는 답답한 가을 넥타이 풀어헤치고, 철공소 앞 가을..

내가 읽은 시 2023.11.29

초록 풀잎 하나가 - 안도현

초록 풀잎 하나가 안도현 초록 풀잎 하나가 옆에 있는 풀잎에게 말을 건다 뭐라 뭐라 말을 거니까 그 옆에 선 풀잎이 흔들린다 흔들리는 풀잎이 또 앞에 선 풀잎의 몸을 건드리니까 또 그 앞에 선 풀잎의 몸이 흔들린다 흔들리는 것들끼리 한꺼번에 흔들린다 초록 풀잎 하나가 뭐라 뭐라 말 한 번 했을 뿐인데 한꺼번에 말이 번진다 들판의 풀잎들에게 말이 번져 들판은 모두 초록이 된다 ― 안도현 동시집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몰라』

내가 읽은 시 2023.11.27

병뚜껑 - 천수호

병뚜껑 천수호 사방에 병(病)이 있다 알록달록한 뚜껑들. 파랑뚜껑 빨강뚜껑 주황뚜껑 어느 병이 잡히나? 나무젓가락을 퉁겨 맥주병을 따던 여릿한 손목의 그녀처럼 통쾌하게, 내장이 줄줄 흐르는 꽃게 등딱지 따듯 조심스럽게, 병의 맛은 풍부하고 목이 탄다 꽉 찬 듯 모자란 용량의 말이 출렁이는 병들. 언니가 갓 딴 병 앞에 앉아있다 탄산 안개에 휘감긴 병, 언니는 병 주둥이가 안보여 웃고 나는 병의 눈알이 안보여 운다 운명은 병 하나 앞에 놓고 입과 눈을 멋대로 놀리는 것! 귀가 얇아진 이쪽 끝에서 코가 무뎌진 저쪽 끝, 숱한 병들이 손목 앞에서 깝죽거린다

내가 읽은 시 2023.11.27

권박의 「폭우」 감상 - 최형심

폭우 권박 뼈가 쏟아진다. 전생의 일이다. 왜 뼈가 지금도 쏟아지는가. 왜 나는 아직도 맞고 있는가. ------------------------------------ 권박 시인이 페미니즘 시를 쓰는 작가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이 작품의 행간에서 가정폭력에 대한 뉘앙스를 읽어 내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마지막 행 “왜 나는 아직도 맞고 있는가.”라는 문장과 마주하자 폭우와 가정폭력이 많은 면에서 유사하다는 걸 문득 깨닫게 되었습니다. 매 맞는 사람은 항상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의 얼굴이 어두워지지 않는지 살펴야 합니다. 마치 우리가 먹구름이 끼지는 않는지 하늘을 살피는 것처럼 말입니다. 때로 폭력은 천둥이나 번개처럼 한 번에 폭발적인 에너지를 분출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 피해자는 빗발치듯 쏟아지는 폭력을 맨..

해설시 2023.11.20

김종해의 「항해일지·1」 - 서범석

항해일지·1 김종해 을지로에서 노를 젓다가 잠시 멈추다. 사라져 가는 것, 떨어져 가는 것, 시들어 가는 것들의 흘러내림 그것들의 부음訃音 위에 떠서 노질을 하다. 아아, 부질없구나 그물을 던지고 낚시질하여 날것을 익혀 먹는 일 오늘은 갑판위에 나와 크게 느끼다. 오늘 하루 집어등集魚燈을 끄고 남몰래 눈물짓다. 손이 부르트도록 날마다 을지로에서 노를 젓고 저음이여 수부水夫의 청춘을 다 바쳐 찾고자 하는 것 삭풍 아래 떨면서 잠시 청계천 쪽에 정박하다. 헛되고 헛되도다, 무인도여 한 잔의 술잔 속에서도 얼비치는 저 무인도를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다. 그러나 눈보라 날리는 엄동嚴冬 속에서도 나의 배는 가야 한다. 눈을 감고서도 선명히 떠오르는 저 별빛을 향하여 나는 노질을 계속해야 한다. ―『시현실』, 202..

해설시 2023.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