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사람 숲에서 길을 잃다 - 김해자

공산(空山) 2023. 10. 8. 18:49

   사람 숲에서 길을 잃다

   김해자

 

 

   너무 깊이 들어와 버린 걸까

   갈수록 숲은 어둡고

   나무와 나무 사이 너무 멀다

   동그랗고 야트막한 언덕배기

   천지사방 후려치는 바람에

   뼛속까지 마르는 은빛 억새로

   함께 흔들려본 지 오래

   막막한 허공 아래

   오는 비 다 맞으며 젖어본 지 참 오래

 

   깊이 들어와서가 아니다

   내 아직 어두운 숲길에서 헤매는 것은

   헤매다 길을 잃기도 하는 것은

   아직 더 깊이 들어가지 못한 탓이다

   깊은 골짝 지나 산등성이 높은 그곳에

   키 낮은 꽃들 기대고 포개지며 엎드려 있으리

   더 깊이 들어가야 하리

   깊은 골짝 지나 솟구치는 산등성이

   그 부드러운 잔등을 만날 때까지

   높은 데 있어 낮은, 능선의

   그 환하디환한 잔꽃들 만날 때까지

 

           

   ― 『무화과는 없다』 걷는사람,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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