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1954

슬픈 환생 - 이운진

슬픈 환생 이운진 몽골에서는 기르던 개가 죽으면 꼬리를 자르고 묻어준단다 다음 생에서는 사람으로 태어나라고, 사람으로 태어난 나는 궁금하다 내 꼬리를 잘라 준 주인은 어떤 기도와 함께 나를 묻었을까 가만히 꼬리뼈를 만져본다 나는 꼬리를 잃고 사람의 무엇을 얻었나 거짓말 할 때의 표정 같은 거 개보다 훨씬 길게 슬픔과 싸워야 할 시간 같은 거 개였을 때 나는 이것을 원했을까 사람이 된 나는 궁금하다 지평선 아래로 지는 붉은 태양과 그 자리에 떠오르는 은하수 양떼를 몰고 초원을 달리던 바람의 속도를 잊고 또 고비사막의 외로운 밤을 잊고 그 밤보다 더 외로운 인생을 정말 바랐을까 꼬리가 있던 흔적을 더듬으며 모래 언덕에 뒹굴고 있을 나의 꼬리를 생각한다 꼬리를 자른 주인의 슬픈 축복으로 나는 적어도 허무를 얻..

내가 읽은 시 2024.02.22

눈물로 간을 한 마음 - 오탁번

눈물로 간을 한 마음 오탁번 시집 『비백』을 내면서 맨 앞에 ‘시인의 말’을 쓰는데 ‘눈물로 간을 한 미음’이라고 치면 자꾸 ‘미음’이 ‘마음’이 된다 동냥젖으로 눈물로 간을 한 미음으로 어머니가 나를 살리셨다는 사연인데 다시 쳐도 또 ‘마음’이 된다 ‘눈물로 간을 한 마음’? 그렇다마다! 그 미음이 바로 어머니의 마음이라는 걸 노트북은 어찌 알았을까 글자판에 바짝 붙어있는 ㅏ와 ㅣ가 나를 비아냥하는 것도 다 그윽한 뜻 아닐까 몰라 곰곰 생각에 겨워 눈을 감으면 은하수 건너 캄캄한 하늘 희끗희끗 흩날리는 어머니의 백발 —『2022 대한민국예술원 문학분과 연간작품집』2022.

내가 읽은 시 2024.02.18

밤눈 - 오탁번

밤눈 오탁번 박달재 밑 외진 마을 홀로 사는 할머니가 밤저녁에 오는 눈을 무심히 바라보네 물레로 잣는 무명실인 듯 하염없이 내리는 밤눈 소리 듣다가 사람 발소리? 하고 밖을 내다보다 간두네 한밤중에도 잠 못 든 할머니가 오는 밤눈을 내다보네 눈송이 송이 사이로 지난 세월 떠오르네 길쌈 하다 젖이 불어 종종걸음 하는 어미와 배냇짓하는 아기도 눈빛으로 보이네 빛바랜 자서전인 양 노끈 다 풀어진 기승전결 아련한 이야기를 밤 내내 조곤조곤 속삭이네 밤눈 오는 섣달그믐 점점 밝아지는 할머니의 눈과 귀 —『동리⸳목월』2022. 가을

내가 읽은 시 2024.02.18

속삭임 1 - 오탁번

속삭임 1 오탁번 2022년 세밑부터 속이 더부룩하고 옆구리가 아프고 명치가 조여온다 소리를 보듯 한 달 내내 한잔도 못 마시고 그냥 물끄러미 술병을 바라본다 무슨 탈이 나기는 되게 났나 보다 부랴사랴 제천 성지병원 내과에서 위 내시경과 가슴 CT를 찍고 진료를 받았는데 마른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진다 (참신한 비유는 엿 사 먹었다) 췌장, 담낭, 신장, 폐, 십이지장에 혹 같은 게 보인단다 아아, 나는 삽시간에 이 세상 암적 존재가 되는가 보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1초쯤 지났을까 나는 마음이 외려 평온해진다 갈 길이 얼마 남았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가는 것보다야 개울 건너 고개 하나 넘으면 바로 조기, 조기가 딱 끝이라니! 됐다! 됐어! —2023. 01.05 —시집 『속삭임』 2024.2 --------..

내가 읽은 시 2024.02.18

이병률의 「어떤 그림」 평설 - 박남희

어떤 그림 이병률 미술관 두 사람은 각자 이 방과 저 방을 저 방과 이 방을 지키는 일을 했다 두 사람의 거리는 좁혀졌다 사람들에게 그림은 만지지 못하게 하면서 자신들은 서로를 바라보다 만지고 쓰다듬는 일이 중요하단 걸 알았다 두 사람은 각자 담당하는 공간이 있었지만 두 사람은 두 사람만의 합의 하에 새로 정한 임무처럼 항상 방을 나란히 옮겨다녔다 그림이 그 두 사람을 따라다니는 것 같았다 그림 안에 넣겠다고 그림이 두 사람을 따라다니는 것 같았다 ------------------------------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스스로 무수한 공간을 설정하면서 그 속에서 안정을 추구하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공간은 경계를 낳고, 경계는 인간의 본성에 숨어있는 배타성을 발현한다. 그런데 인간의 배타성을 사회..

해설시 2024.02.12

바람 부는 날 - 김종해

바람 부는 날 김종해(1941~ ) 사랑하지 않는 일보다 사랑하는 일이 더욱 괴로운 날, 나는 지하철을 타고 당신에게로 갑니다. 날마다 가고 또 갑니다. 어둠뿐인 외줄기 지하통로로 손전등을 비추며 나는 당신에게로 갑니다. 밀감보다 더 작은 불빛 하나 갖고서 당신을 향해 갑니다. 가서는 오지 않아도 좋을 일방통행의 외길, 당신을 향해서만 가고 있는 지하철을 타고 아무도 내리지 않는 숨은 역으로 작은 불빛 비추며 나는 갑니다. 가랑잎이라도 떨어져서 마음마저 더욱 여린 날, 사랑하는 일보다 사랑하지 않는 일이 더욱 괴로운 날, 그래서 바람이 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 당신에게로 갑니다. ―『바람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 1990

내가 읽은 시 2024.02.12

숲 - 이영광

숲 이영광 나무들은 굳세게 껴안았는데도 사이가 떴다 뿌리가 바위를 움켜 조이듯 가지들이 허공을 잡고 불꽃을 튕기기 때문이다 허공이 가지들의 기합보다 더 단단하기 때문이다 껴안는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무른 것으로 강한 것을 전심전력 파고든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다면 나무들의 손아귀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졌을 리가 없다 껴안는다는 것은 또 이런 것이다 가여운 것이 크고 쓸쓸한 어둠을 정신없이 어루만져 다 잊어버린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이글거리는 포옹 사이로 한 부르튼 사나이를 유심히 지나가게 한다는 뜻이다 필경은 나무와 허공과 한 사나이를, 딱따구리와 저녁바람과 솔방울들을 온통 지나가게 한다는 뜻이다 구멍 숭숭 난 숲은 숲字로 섰다 숲의 단단한 골다공증을 보라 껴안는다는 것은 이렇게 전부를 통과시켜 주고도 ..

내가 읽은 시 2024.02.12

약속의 후예들 - 이병률

약속의 후예들 이병률(1967∼ ) 강도 풀리고 마음도 다 풀리면 나룻배에 나를 그대를 실어 먼 데까지 곤히 잠들며 가자고 배 닿는 곳에 산 하나 내려놓아 평평한 섬 만든 뒤에 실컷 울어나보자 했건만 태초에 그 약속을 잊지 않으려 만물의 등짝에 일일이 그림자를 매달아놓았건만 세상 모든 혈관 뒤에서 질질 끌리는 그대는 내 약속을 잊었단 말인가

내가 읽은 시 2024.0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