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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눈 - 오탁번

밤눈 오탁번 박달재 밑 외진 마을 홀로 사는 할머니가 밤저녁에 오는 눈을 무심히 바라보네 물레로 잣는 무명실인 듯 하염없이 내리는 밤눈 소리 듣다가 사람 발소리? 하고 밖을 내다보다 간두네 한밤중에도 잠 못 든 할머니가 오는 밤눈을 내다보네 눈송이 송이 사이로 지난 세월 떠오르네 길쌈 하다 젖이 불어 종종걸음 하는 어미와 배냇짓하는 아기도 눈빛으로 보이네 빛바랜 자서전인 양 노끈 다 풀어진 기승전결 아련한 이야기를 밤 내내 조곤조곤 속삭이네 밤눈 오는 섣달그믐 점점 밝아지는 할머니의 눈과 귀 —『동리⸳목월』2022. 가을

내가 읽은 시 2024.02.18

속삭임 1 - 오탁번

속삭임 1 오탁번 2022년 세밑부터 속이 더부룩하고 옆구리가 아프고 명치가 조여온다 소리를 보듯 한 달 내내 한잔도 못 마시고 그냥 물끄러미 술병을 바라본다 무슨 탈이 나기는 되게 났나 보다 부랴사랴 제천 성지병원 내과에서 위 내시경과 가슴 CT를 찍고 진료를 받았는데 마른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진다 (참신한 비유는 엿 사 먹었다) 췌장, 담낭, 신장, 폐, 십이지장에 혹 같은 게 보인단다 아아, 나는 삽시간에 이 세상 암적 존재가 되는가 보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1초쯤 지났을까 나는 마음이 외려 평온해진다 갈 길이 얼마 남았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가는 것보다야 개울 건너 고개 하나 넘으면 바로 조기, 조기가 딱 끝이라니! 됐다! 됐어! —2023. 01.05 —시집 『속삭임』 2024.2 --------..

내가 읽은 시 2024.02.18

이병률의 「어떤 그림」 평설 - 박남희

어떤 그림 이병률 미술관 두 사람은 각자 이 방과 저 방을 저 방과 이 방을 지키는 일을 했다 두 사람의 거리는 좁혀졌다 사람들에게 그림은 만지지 못하게 하면서 자신들은 서로를 바라보다 만지고 쓰다듬는 일이 중요하단 걸 알았다 두 사람은 각자 담당하는 공간이 있었지만 두 사람은 두 사람만의 합의 하에 새로 정한 임무처럼 항상 방을 나란히 옮겨다녔다 그림이 그 두 사람을 따라다니는 것 같았다 그림 안에 넣겠다고 그림이 두 사람을 따라다니는 것 같았다 ------------------------------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스스로 무수한 공간을 설정하면서 그 속에서 안정을 추구하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공간은 경계를 낳고, 경계는 인간의 본성에 숨어있는 배타성을 발현한다. 그런데 인간의 배타성을 사회..

해설시 2024.02.12

바람 부는 날 - 김종해

바람 부는 날 김종해(1941~ ) 사랑하지 않는 일보다 사랑하는 일이 더욱 괴로운 날, 나는 지하철을 타고 당신에게로 갑니다. 날마다 가고 또 갑니다. 어둠뿐인 외줄기 지하통로로 손전등을 비추며 나는 당신에게로 갑니다. 밀감보다 더 작은 불빛 하나 갖고서 당신을 향해 갑니다. 가서는 오지 않아도 좋을 일방통행의 외길, 당신을 향해서만 가고 있는 지하철을 타고 아무도 내리지 않는 숨은 역으로 작은 불빛 비추며 나는 갑니다. 가랑잎이라도 떨어져서 마음마저 더욱 여린 날, 사랑하는 일보다 사랑하지 않는 일이 더욱 괴로운 날, 그래서 바람이 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 당신에게로 갑니다. ―『바람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 1990

내가 읽은 시 2024.02.12

숲 - 이영광

숲 이영광 나무들은 굳세게 껴안았는데도 사이가 떴다 뿌리가 바위를 움켜 조이듯 가지들이 허공을 잡고 불꽃을 튕기기 때문이다 허공이 가지들의 기합보다 더 단단하기 때문이다 껴안는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무른 것으로 강한 것을 전심전력 파고든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다면 나무들의 손아귀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졌을 리가 없다 껴안는다는 것은 또 이런 것이다 가여운 것이 크고 쓸쓸한 어둠을 정신없이 어루만져 다 잊어버린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이글거리는 포옹 사이로 한 부르튼 사나이를 유심히 지나가게 한다는 뜻이다 필경은 나무와 허공과 한 사나이를, 딱따구리와 저녁바람과 솔방울들을 온통 지나가게 한다는 뜻이다 구멍 숭숭 난 숲은 숲字로 섰다 숲의 단단한 골다공증을 보라 껴안는다는 것은 이렇게 전부를 통과시켜 주고도 ..

내가 읽은 시 2024.02.12

약속의 후예들 - 이병률

약속의 후예들 이병률(1967∼ ) 강도 풀리고 마음도 다 풀리면 나룻배에 나를 그대를 실어 먼 데까지 곤히 잠들며 가자고 배 닿는 곳에 산 하나 내려놓아 평평한 섬 만든 뒤에 실컷 울어나보자 했건만 태초에 그 약속을 잊지 않으려 만물의 등짝에 일일이 그림자를 매달아놓았건만 세상 모든 혈관 뒤에서 질질 끌리는 그대는 내 약속을 잊었단 말인가

내가 읽은 시 2024.02.05

난 아주 단순한 글을 쓰고 싶어

난 아주 단순한 글을 쓰고 싶어 메리 올리버 난 아주 단순한 글을 쓰고 싶어, 사랑에 대해 고통에 대해 당신이 읽으면서 가슴으로 느낄 수 있도록, 글을 읽는 내내 가슴으로 느낄 수 있도록, 내 글은 나만의 유일한 것이지만 당신의 마음으로 들어갈 테고 그리하여 결국 당신은 생각하겠지, 아니, 깨닫게 되겠지, 그동안 내내 당신 자신이 그 단어들을 배열하고 있었음을, 그동안 내내 당신 자신이 당신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이야기하고 있었음을.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식』 2009

메리 올리버 2024.02.03

김상옥의 「어느 날」 감상 - 최형심, 나민애

어느 날 김상옥(1920~2004) 구두를 새로 지어 딸에게 신겨주고 저만치 가는 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 생애 사무치던 일도 저리 쉽게 가것네 ------------------------------------------- 결과만 놓고 본다면 모든 삶은 다 비극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위대한 인간의 삶도 종국에는 죽음으로 끝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키우는 일도 생각해보면 비슷합니다. 아무리 예뻐하고 애지중지 키워도 언젠가는 제 짝을 찾아 새로운 가정을 이루고 우리 곁을 떠나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생도 아이 키우는 일도 끝을 생각하면 한없이 허무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삶도 육아도 결과가 아닌 과정이 핵심이자 전부라는 것을요. 그래서 소멸할 것을, 떠날 ..

해설시 2024.02.03

흑백 무지개 - 강나무

흑백 무지개 강나무(1971~) 요구르트, 그 다디단 것은 한 줄짜리 만화처럼 금방 바닥이 났다 언니는 아침마다 사라지고 엄마는 밥때가 아니면 미싱을 멈추지 않았다 창고 속에서 여자들이 실밥을 머리에 가득 얹고 노루발을 밀어 면장갑을 만들었다 흰 손바닥들이 언덕을 이루면 미끄럼을 타고 싶었다 심심하면 불을 질러야 했지만 성냥불 불꽃마저 희어서 재미가 없을 것 같았다 일부러 길을 잃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누군가 나를 안아 들고 대문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의자처럼 마당에 앉아 있다가 문득 방으로 가 손거울을 놓고 들여다본 아랫도리는 종일 입에 물고 있어 늘어진 검은 고무 꽈리 같았다 아무나 쓰러지기를 바랐다 아니면 죽거나 그때 내게 옜다, 새빨간 거짓말이라도 누가 던져 주었다면 맴돌던 좁은 마당에서 노란 돌..

내가 읽은 시 2024.0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