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가을 - 게오르그 트라클 거룩한 가을 게오르그 트라클 거칠게 한 해가 끝을 맺는다. 황금빛 포도주와 정원의 열매들로. 둥글게 침묵하는 숲들은 놀랍구나 고독의 동행자들이여. 농부는 말한다, 참으로 평화롭구나. 저녁 종소리는 길고 나직하니 마지막까지 행복감을 선사하고 철새의 무리가 작별인사를 한다. 때는 사랑에게 온화한 시간, 나룻배를 타고 푸른 강물을 흘러가니 풍경과 풍경들이 차례로 아름다워라― 고요와 침묵 속에서 하나하나 사라져간다. ―막스 피카르트 『인간과 말』(1955) 「〔14〕 말과 사물」에서 외국의 시 2025.01.04
마지막 지상에서 - 김현승 마지막 지상에서 김현승(1913~1975) 산까마귀 긴 울음을 남기고 해진 지평선을 넘어간다. 사방은 고요하다! 오늘 하루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의 넋이여, 그 나라의 무덤은 평안한가. ―《현대문학》 1975. 2 내가 읽은 시 2024.12.30
막스 피카르트 『인간과 말』 에서 - 공산 〔1〕 언어의 선험성 1 인간의 기본구조에 속하는 모든 요소는 앞서 주어진 것이다. 인간이 그것을 취하여 사용하기 이전인 태초부터 이미 인간을 위해 마련되어 있었다. 인간에게 앞서 주어진 것 중 하나는 바로 언어다. 빌헬름 폰 훔볼트는 말했다. "내 확신에 의하면, 언어는 인간 내면에 온전히 저장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 언어의 발명이 수천 년 전 혹은 수만 년 전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인간이 한 단어의 말이라도 진실로 이해하려면, 감각으로 터져나오는 소리가 아니라 분명한 개념을 전달할 목적으로 발음된 하나의 어휘로 이해하려면, 이미 인간 안에 언어 전체가 체계를 갖추고 자리 잡은 상태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언어는 인간에게 미리 주어져 있다. 인간이 말을 시.. 고방 2024.12.29
하루 종일 밥을 지었다 - 이화영 하루 종일 밥을 지었다 이화영 엄마는 약을 드시고 계속 잠만 잤다 가끔 머리를 흔들며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악몽을 꾸는 것은 살아 있는 증거라고 말할 수 없었다 자작나무 뼈처럼 창백한 몸에 하루에도 옷을 몇 차례 갈아입히고 고집스럽게 기저귀를 거부해서 바지를 내리는 순간 지린 꽃 피었다 목욕을 시키고 언제 닥칠지 모르는 전투에 완전 복장을 입혔다 시공간을 잊고 사람을 잊고 자신의 정체성까지 잊고 광야에서 홀로 마주한 세상 끝의 얼굴 엄마에게 출구 전략이 있을까 어느 문을 나서고 있는지 비 내리고 춥다 낡은 문갑 위에 이름 모를 분홍 조화 말 없는 꽃은 이쁘다 한 방에 이불을 펴고 눕는다 이불을.. 내가 읽은 시 2024.12.21
오늘밤은 리스본 - 김영찬 오늘밤은 리스본 김영찬 하지만 오늘밤엔 리스본까지만 바르셀로나, 쌩 폴 드방스쯤이야 나중에 품어도 전혀 늦지 않지 북방의 주택가엔 주인 없는 개들만 어슬렁어슬렁 빠리의 쌩 제르맹 뒷골목에 나뒹구는 빈 포도주병들만 습관적인 휘파람 소리를 내더라도 오늘은 오직 리스본까지만, 몰도바 몰디브 몰라도 그만 안 가도 그만 그렇더라도 결국 품 안에 끌어들여 일일이 쓰다듬게 될 무국적의 섬들을 언제까지 방치할 수야 없지 초저녁부터 야심한 밤까지 리스본의 불 꺼진 테라스에 기대어 고즈넉한 밤안개에 끈금없는 칵테일 여행 진한 압생트 쑥 향에 코를 처박고 뜨거운 섬이 하나하나 가슴 복판에 솟구칠 때까지 집에 갈 생각 배낭 메고 딴 길로 .. 내가 읽은 시 2024.12.15
대설 - 김영삼 대설 김영삼 (1959~) 소나무우산살이 부러졌다 전봇대로 나앉아 잔뜩 움츠린 직박구리가 오석 같다 목동처럼 저녁이 와서 흩어진 어둠을 불러 모으는데 감나무 가지에 간신히 몸을 얹은 박새 고갯짓이 조급하다 굴뚝새는 물수제비뜨듯 집집으로 가물가물 멀어져 가고 포롱, 포롱, 포롱… 참새, 멧새, 딱새, 곤줄배기도 부산하다 내가 읽은 시 2024.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