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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성의 「내 연애」 해설 - 신상조

내 연애   이학성     내가 바라는 연애는 한시라도 빨리 늙는 것   그래서 은발(銀髮)이 되어 그루터기에 앉아   먼 강물을 지그시 바라보는 것   될 수 있다면 죽어서도 살아   실컷 떠돌이구름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르거나   성냥을 칙 그어 시거에 불을 붙이는 것   아니라면 어딘가로 멀리 달아나   생의 꽃술에 입맞춤하는 은나비처럼   한 시절도 그립거나 후회 않노라 고백하는 것   그리하여 누구나의 애인이 되거나   아니 그것도 쉽지 않노라면   그리는 못 되어서 아득하게 잊혀가는 것!     ―시집 『저녁의 신』 (2023)    -----------------------------------    페르소나(persona)는 그리스 어원의 ‘가면’을 나타내는 말로, 칼 융에 따르면 “실제의 ..

해설시 2024.06.02

세상 가장 작은 뼈에게 - 정끝별

세상 가장 작은 뼈에게   정끝별     귓속 고막에서 달팽이관 사이   이소골을 이루는 추골, 침골, 등골이라는 가장 작은 뼈들이 가장 나중까지 듣는다기에   들을 때 속귀의 뼈들이 움직인다기에    임종을 선고한 의사가 나가자   아직 따뜻한 엄마 겨드랑이에 손을 묻고   작은 목소리로 가장 작은 엄마의 뼈들을 어루만지며    엄마 귀에 대고 말했다    엄마,    엄마가 돌아간 시간을 잘 기억할게   엄마도 잘 기억해서 그 시간에 꼭 찾아와야 해                                —계간 《창작과비평》 2023년 겨울호

내가 읽은 시 2024.05.30

노각 - 유종인

노각 유종인(1968~ ) 노각이란 말 참 그윽하지요 한해살이 오이한테도 노년이 서리고 그 노년한테 달셋방 같은 전각 한 채 지어준 것 같은 말, 선선하고 넉넉한 이 말이 기러기 떼 당겨오는 초가을날 저녁에 늙은 오이의 살결을 벗기면 수박 향 같기도 하고 은어(銀魚) 향 같기도 한 아니 수박 먹은 은어 향 같기도 한 고즈넉이 늙어 와서 향내마저 슴슴해진 내 인생에 그대 내력이 서리고 그대 전생에 내 향내가 배인 듯 아무려나 서로 검불 같은 생의 가난이 울릴 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조붓한 집 한 채 지어 건네는 맘 사랑이 그만치는 늙어가야 한다는 말 같지요 노각이라는 말 늡늡하지 않나요 반그늘처럼 늙어 떠나며 외투 벗어주듯 집도 한 채 누군가에게 벗어줄 수 있다는 거 은어 향에 밴 수박 향서껀 늦여름 ..

내가 읽은 시 2024.05.27

신경림의 「먼 데, 그 먼 데를 향하여」 감상 - 나민애

먼 데, 그 먼 데를 향하여   신경림 (1936∼2024)     아주 먼 데,   말도 통하지 않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 먼 데까지 가자고.    어느 날 나는 집을 나왔다.   걷고 타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몇날 몇밤을 지나서.    이쯤은 꽃도 나무도 낯이 설겠지,   새소리도 짐승 울음소리도 귀에 설겠지,   짐을 풀고    찾아들어간 집이 너무 낯익어,   마주치는 사람들이 너무 익숙해.    사람 사는 곳   어디인들 크게 다르랴,   아내 닮은 사람과 사랑을 하고   자식 닮은 사람들과 아옹다옹 싸우다가,    문득 고개를 들고 보니,   매화꽃 피고 지기 어언 십년이다.   어쩌면 나는 내가 기껏 떠났던 집으로   되돌아온 것은 아닐까.   아니, 당초 집을 떠난 일..

해설시 2024.05.26

후남 언니 - 김선향

후남 언니   김선향     견디다 견딜 수는 없어   하루에 다섯 대까지 아편을 맞았다지    일본 군인들이 자신의 몸을 짓밟든 말든   자신의 영혼을 갈가리 찢든 말든   말문이 닫힌, 병든 검은 새는 아편만 찾았다지    쓸모가 없어진 그녀를 일본 군인들은   만주 벌판에 내다버렸다지    낮밤으로 들리던 그녀의 울음은   까마귀 울음과 닮았다지    풀이 보리순처럼 피어오르는 고향의 들판을   엄마가 지어준 검은 뉴똥치마 입은 소녀를   죽어가는 그녀는 떠올렸다지    철조망 너머 까마귀가 날아와 그녀를 파먹었다지   한겨울 만주 벌판의 밤   몇 조각 뼈만 빛났다지    돌아오지 못한 여자를   모질게 살아 돌아온 여자가 기억한다지     ― 『F등급 영화』 삶창, 2020

내가 읽은 시 2024.05.25

월평 「국화」 - 《대구문학》 193호(2024. 5-6월호)

(전략) 목소리가 좋으면 그 시를 다시 쳐다보게 된다. 아니, 오래 귀 기울이게 된다. 목소리는 비유를 통해 형상화된다. 어조語調는 독자를 사로잡기도 하고, 멀어지게도 한다. 차가운 음색이 있는가 하면, 한없이 따뜻한 음성이 있다. 시의 내공은 어조가 결정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체나 객체가 겸손하면, 그 시 주변에 사람이 많이 끓고, 반대로 냉정하거나 직선적이면, 하나 둘 독자가 멀어진다. 물론 성깔이 못된 시를 엄청 좋아하는 젊은 마니아mania 층도 두껍다. 어쨌거나 목소리는 그 시의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은 틀림없다. 김상동의 「국화」는 묘한 목소리를 가졌다. 이런 경우 3개월도 멀다는 거예요 2개월 후에 보도록 합시다 (몇 차례 찬비가 지나가는 동안 기러기 떼는 북국의 긴 밤들을 물고 ..

내가 쓴 시 2024.05.24

일기 - 안도현

일기   안도현     오전에는 깡마른 국화꽃 웃자란 눈썹을 가위로 잘랐다    오후에는 지난여름 마루 끝에 다녀간 사슴벌레에게 엽서를 써서 보내고    고장 난 감나무를 고쳐주러 온 의원에게 감나무 그늘의 수리도 부탁하였다    추녀 끝으로 줄지어 스며드는 기러기 일흔 세 마리까지 세다가 그만 두었다    저녁이 부엌으로 사무치게 왔으나 불빛 죽이고 두어 가지 찬에다 밥을 먹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것 말고 무엇이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

내가 읽은 시 2024.05.19

이스파한 - 정 선

이스파한   정 선     즐거운 오후가 벌레 먹은 장미 같다   구멍 뚫린 꽃잎들이 다리 사이로 빨갛게 떠내려간다                     *    술보다 한 잔의 장미수 몇 모금의 시샤 다섯 번의 푸른 아잔 소리 연지벌레 카펫 몇 장과 베틀 몇 줄의 시와 하페즈 그리고 이름 그대로 ‘세상의 절반’이라는 이스파한   너    이스파한 골목에서 이스파한을 잃었다   가슴속은 두억시니였다   이스파한을 떠올리면 냉동실 냄새와 함께   검은 눈동자가 서리태로 쏟아졌다    이스파한은 질리지 않는 새벽 강   이스파한은 온종일 지루하지 않은 광장    사막 속으로 떠난 이스파한은   모스크도 카주 다리도 자얀데 강의 노을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이맘광장에는 신기루가 없고 사막 속에는 새로운 애인이 ..

내가 읽은 시 2024.0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