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잘 가 - 박지웅

공산(空山) 2023. 5. 30. 20:44

   잘 가

   박지웅

   여자의 혀는 정직하고 차가웠다

   입에서 나오는 가장 낮은 온도 잘 가

   마트에서 구입한 제품처럼 건넨 잘 가

   나는 잘 가를 받아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앞뒤 잘린 토막의 말

   잘 가는 피가 빠지는 데 몇 달이 걸렸다

   몇 달째 꿈쩍하지 않는 잘 가

   가끔 이름을 불러보았으나

   잘 가는 선뜻 나오지 않았다

   고깃덩어리로 썩어가는 잘 가를

   꺼내어 몇 번 삼키려 했으나

   오래된 관처럼 입이 열리지 않았다

   냉장고는 온통 사후의 세계

   나는 냉장고에 심장을 넣고 기다린다

   내 혀는 아직 핏물이 덜 빠졌다

 

   ―시집 『나비가면』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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