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나이에 자전 소설自傳小說을 써 퓰리처상을 받은 프랭크 매코트를 나는 얼마 전에 우연히 알게 되었다. 김루시아의 훌륭한 번역으로 문학동네가 출판한 그의 책『안젤라의 재』를 사려고 검색을 해보았지만 이미 절판된 지 오래되어 파는 곳이 없었다. 마침 이웃 동네의 ‘작은도서관’에 책이 있다고 검색되어서 자전거를 타고 가 빌려 와서 틈틈이 읽었다. 가난 속에서 지독한 술주정꾼인 아빠, 난로 속의 식은 재만 바라보는 불쌍한 엄마, 그리고 여러 동생들과 함께 굶주리며 어린 시절을 보낸 저자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이야기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는 1930년생이니까 1921년생, 1926년생인 나의 부모님과 거의 동시대에 살았다. 나는 그보다 한 세대 뒤에 태어났으니 그렇게 힘들게 어린 시절을 보내진 않았지만, 나의 부모님 세대는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저자만큼이나 힘들게 살았을 것을 생각하면 더 공감이 되는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니 저자가 살았던 아일랜드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여서 그즈음의 우리나라 상황과도 많이 닮은 것 같다.
이 책을 나는 두 번 읽었다. 이 감동을 오래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프랭크 매코트라는 한 인간의 처절했던 삶을 내 가슴속에서나마 오래 기리기 위해 인상적인 부분을 대강이라도 발췌해 두기로 한다. 필요하면 나는 발췌한 부분의 앞뒤의 맥락을 조금 설명하거나, 책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나의 추억담도 곁들여 두기로 한다.
먼저, 책의 속표지에 수록되어 있는 저자의 생애를 아래에 그대로 옮겨둔다.
프랭크 매코트 Frank McCourt
아일랜드계 미국인 교육자, 에세이스트. 나이 예순여섯 살에 펴낸 첫 책 『안젤라의 재』로 퓰리처 상, 전미 도서 비평가상, LA 타임스 도서상, 애비 어워드 등을 휩쓸고, <뉴욕 타임스>, <타임>, <보스턴 글로브>, <엔터테인먼트 위클리>, <피플 매거진>, <베니티 페어> '올해의 책'에 선정된 작가.
1930년 8월 19일, 대공황이 한창이던 미국 브루클린에서 아일랜드계 이민자인 말라키 매코트와 안젤라 시언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 뒤를 이어 남동생 말라키와 쌍둥이 남동생 유진과 올리버, 여동생 마거릿이 태어나지만, 마거릿이 생후 몇 주만에 죽고 도저히 생활을 꾸려갈 수 없을 지경에 이르자 그의 부모는 고향인 아일랜드로 돌아간다.
그러나 영국의 식민지에서 독립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일랜드에서도 가족은 궁핍한 생활을 벗어날 수 없었다. 영국이 제2차 세계대전의 포화에 휩쓸리자 아버지는 군수공장에 일하러 떠나고, 십대 소년 프랭크는 열세 살에 정규교육을 중단하고, 굶주리는 세 남동생과 어머니를 위해 우편배달, 신문배달, 협박편지 대필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한다. 그리고 근근이 돈을 모아 드디어 열아홉 살이 되던 해, 미국으로 가는 배에 홀로 몸을 싣는다.
뉴욕의 빌트모어 호텔에 취직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이어 군인이 되어 한국전에 파견되고, 갖은 고생을 겪은 후에 독일로 보내진다. 군복무를 마친 후에는 뉴욕대에서 중단했던 학업을 이어간다. 이후 뉴욕 지역의 여러 고등학교와 뉴욕 시립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쳐왔다.
1997년부터 <뉴욕타임즈>에 이민자 어머니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경험에 관한 에세이를 기고하기 시작했고, 같은 해에 아일랜드인 특유의 유머와 가슴 찡한 정서를 담은 『안젤라의 재』를 출간한다. 이 책은 1999년 알란 파커 감독 연출, 에밀리 웟슨, 로버트 칼라일 등 연기파 배우들의 주연으로 영화화되면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후 발표한, 뉴욕에서의 이민 생활을 담은 『그렇군요』와 열정적이고 유머러스한 교사로서의 체험을 그린 『선생 노릇』 역시 연이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2007년 마지막 작품인 동화 『안젤라와 아기 예수』를 발표하고, 2009년 맨해튼에서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책머리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나의 남동생, 말라키, 마이클, 알폰서스에게 이 책을 바친다. 너희에게 많은 걸 배웠다. 너희를 존경한다. 그리고 사랑한다.
이제 본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뉴욕에 그대로 눌러 앉았어야 했다. 당신네들이 만나고 결혼하고 나를 낳았던 바로 그 도시에. 하지만 두 사람은 내가 네 살, 남동생 말라키가 세 살, 쌍둥이 올리버와 유진이 첫 돌이 채 안 되고, 여동생 마거릿은 죽고 없을 때 아일랜드로 되돌아갔다.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내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그저 놀랍기만 하다. 물론 내 어린 시절은 비참했다. 행복한 어린 시절 따윈 어차피 별 재미도 없잖은가. 보통의 불행한 어린 시절보다 훨씬 더 고약한 게 아일랜드인의 어린 시절이라면, 그보다 더 고약한 게 가톨릭계 아일랜드인의 어린 시절이다.
어릴 적 고생을 떠올리며 우는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지만, 나의 아일랜드 판 고생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거다. 가난, 무능한데다 수다스럽고 술에 찌든 아버지, 삶에 좌절하여 난롯가에 앉아 탄식하던 신앙 깊은 어머니, 거만한 신부, 윽박지르는 선생, 영국인들과 팔백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이들이 우리에게 행한 끔찍한 일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늘 젖어 있었다.
대서양 바깥에 모여든 거대한 비구름들은 느릿느릿 섀넌강 상류까지 밀고 올라오다가 마침내 리머릭에 자리잡았다. 도시는 예수할례축일(1월 1일)부터 새해 전날까지 비로 축축하게 젖었고, 잔기침 소리, 기관지에서 갈그랑갈그랑 가래 끓는 소리, 천식환자들의 쌔근대는 숨소리, 폐병환자들의 목쉰 소리가 뒤섞인 불협화음은 그칠 날이 없었다. 코는 마르지 않는 샘이었고, 폐는 세균이 득실대는 스펀지였다.
나의 아버지 말라키 매코트는 앤트림 주州 툼의 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아버지도 거칠게 자랐고, 영국인이나 아일랜드인, 혹은 양쪽 모두와 껄끄러운 사이였다. 구舊 IRA에 입단해서 싸우던 아버지는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바람에 끝내는 머리에 현상금이 걸린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결혼 전에 안젤라 시언이라 불리던 나의 어머니는 자신의 어머니, 오빠인 토머스와 패트릭, 언니 애그니스와 함께 리머릭의 빈민촌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태어나기 몇 주 전에 호주로 도망가버려 평생 보지 못했다.
나는 시소에서 내린다. 말라키가 내려간다. 시소가 땅바닥에 쿵 찧더니 동생이 비명을 지른다.동생은 손을 입에 대고 있고 거기에 피가 난다. (...)개 머리통 주위에 피가 흥건하다. 말라키의 입에서 나온 피와 똑같은 색깔이다. 말라키는 개의 피를 가졌고 개는 말라키의 피를 가졌나 보다. 나는 매커도리 아저씨의 손을 잡아당긴다. 아저씨, 말라키가 개랑 똑같은 피를 가졌어요.
오, 그렇다마다, 프랜시스. 고양이도 마찬가지야. 그리고 에스키모도 모두 똑같은 피란다.
미니 아줌마가 말한다. 그만해요, 댄. 애를 헷갈리게 하지 말아요. 프랜시스, 이 불쌍한 작은 개는 차에 치였어. 죽기 전에 길 한복판에서부터 여기까지 기어왔단다. 집에 가고 싶었던 게지. 불쌍한 작은 짐승 같으니라고.
아빠가 일자리를 구하면 엄마는 기분이 좋아서 노래를 부른다.
누구나 다 알 수 있어요. 왜 내가 당신의 키스를 원했고
또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를. 그 이유는 이렇답니다
당신 같은 이가 나를 사랑한다니, 나를 사랑한다니
정말 믿기 힘든 얘기잖은가요?*
*프랑스 가수 겸 영화배우 모리스 슈발리에의 대표곡 <루이즈>의 한 소절.
아빠가 첫 주 봉급을 가져온 날, 엄마는 식료품 가게의 친절한 이탈리아 남자에게 외상값을 갚을 수 있고, 그래서 다시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있게 돼 기뻐한다. 누군가에게 빚을 지고 신세를 지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은 없기 때문이다. 엄마는 부엌을 청소하고, 머그컵과 접시를 설거지하고, 식탁에서 음식 부스러기를 말끔히 쓸어내고, 아이스박스를 깨끗이 비워낸 다음, 또다른 이탈리아 사람에게 새로 얼음 덩어리를 주문한다. 또 엄마는 우리가 복도 끝에 있는 변소에서 쓸 수 있도록 화장지를 사면서, <데일리 뉴스> 헤드라인으로 애들 똥구멍을 시커멓게 만드는 것보단 낫겠지, 라고 말한다. 또 난로에 물을 끓여 커다란 양철통에 붓고는 우리 셔츠와 양말, 쌍둥이의 기저귀, 두 채밖에 없는 이불, 세 장밖에 없는 수건을 하루 온종일 빤다. 엄마가 아파트 건물 뒤켠의 빨랫줄에 빨래를 몽땅 내다널면 우리는 빨래가 바람과 햇볕 속에서 춤추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무슨 빨래를 했는지 이웃 사람들이 훤히 아는 건 물론 싫지만, 햇볕에 말린 옷의 향긋한 냄새만 한 건 없다고 엄마는 말한다.
아빠가 금요일 밤 첫 주 봉급을 집으로 가져오면 우리는 신나는 주말이 되리라는 것을 안다. 토요일 밤, 엄마는 난로에 물을 끓여서 커다란 양철통에 우리를 넣어 씻기고, 아빠는 물기를 닦아준다. 말라키가 뒤로 돌아서서 엉덩이를 보여주면 아빠는 놀란 척하고, 우리는 모두 한바탕 웃는다. 엄마는 뜨거운 코코아를 만들어주고, 우리는 늦도록 자지 않고 아빠가 지어낸 얘기를 들을 수 있다. 매커더리 아저씨든 같은 층에 사는 라이보비츠 아저씨든 이름만 말하면, 아빠는 이 두 아저씨들이 브라질에서 배를 저어 강을 올라가고 그 뒤를 녹색 코에 갈색 어깨를 한 인디언들이 뒤쫓게 만든다. 이런 밤이면 우리는 까무룩 잠이 들면서도 다음날 아침엔 계란, 프라이드 토마토, 튀긴 빵에 설탕과 우유를 듬뿍 넣은 차를, 그리고 오후 느지막이는 으깬 감자, 콩, 햄, 그리고 셰리주를 적신 스펀지케이크 위에 과일을 겹겹이 쌓고 따뜻하고 맛깔스러운 커스터드를 끼얹은, 엄마가 손수 만든 트라이플이 나오는 진수성찬을 받으리란 걸 안다.
아빠가 첫 주 봉급을 집으로 가져오고 날씨도 화창하면 엄마는 우리를 데리고 놀이터로 나간다. 엄마는 벤치에 앉아 미니 매커도리 아줌마에게 리머릭 괴짜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미니 아줌마도 벨파스트 괴짜들 얘기를 한다. 아일랜드엔 북부건 남부건 재미있는 사람들도 참 많다고 둘이 깔깔대고 웃는다. 그러다 두 사람은 서로 슬픈 노래들을 가르쳐주고 말라키와 나는 그네와 시소를 타다 말고 그 곁에 가서 벤치에 앉아 함께 노래를 부른다.
위의 글 중에 '엄마는 우리가 복도 끝에 있는 변소에서 쓸 수 있도록 화장지를 사면서, <데일리 뉴스> 헤드라인으로 애들 똥구멍을 시커멓게 만드는 것보단 낫겠지, 라고 말한다.'라는 부분이 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유럽의 선진 문명권에 인접한 곳이라서 그때 벌써 화장지라는 것이 있었구나 싶었다. 나의 어린 시절에는 뒤를 닦는 화장지라는 것이 있는 줄도 몰랐었다. 뒷간의 한쪽 구석에는 으레 볏짚 다발이나 건초 뭉치가 놓여 있었는데, 그건 뒤를 닦는 데 쓰기 위한 것이었다. 신문지나 헌책을 찢어서 사용하게 된 것은 세월이 한참 더 지난 뒤의 일이었다.
참고로, 미국과 영국에서 최초로 화장지가 만들어진 것은 1857년과 1879년경이었고, 우리나라에서는 1971년에 유한킴벌리가 화장지를 처음 생산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시골에까지 전파되는 데는 많은 세월이 필요했을 것이다. 나의 기억으로는, 1980년대 초반까지도 시골 대부분의 변소에서는 두루마리 화장지 대신 신문지 조각이 비치되어 있었다.
일한 지 삼 주째로 접어들면서 아빠는 봉급을 집으로 가져오지 않는다.(...) 어머니가 밤늦게까지 부엌 식탁에 앉아 아, 이젠 어째야 하나 푸념하고 있으면 그제야 아빠는 로디 매컬리의 노래를 부르며 계단을 올라와 문을 밀어젖히고 큰소리로 우리를 찾는다. 내 군대는 어디에 있나? 네 명의 용사들은 어디에 있어?
엄마가 말한다. 애들 좀 가만히 내버려둬. 배가 고파서 잠자리에 들었어. 왜냐, 당신이 배터지게 위스키를 마셨거든. 아빠가 침실 문 쪽으로 온다. 기상, 제군들, 기상! 아일랜드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고 약속하는 모든 사람에게 오 센트짜리 동전을 주겠어.
캐나다 깊은 숲에서 만난 우리는
찬란한 섬에서 날아온 사람들
우리가 밟고 있는 땅도 위대하지만
우리의 가슴은 조국에 있다네.
기상, 제군들, 기상! 프랜시스, 말라키, 올리버, 유진! 붉은 가지 기사단, 페니어 결사대, IRA, 기상!
엄마는 부엌 식탁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다. 눈물로 뒤범벅된 얼굴에 축축한 머리칼이 붙어 있다. 애들 좀 가만히 두지 못해? 예수님, 마리아님, 요셉님, 주머니에 동전 한 푼 없이 집에 온 걸로 모자라서 거기다가 애들까지 바보짓을 시키는 거야?
엄마가 와서 말한다. 침대로 돌아가라.
애들이 일어나 있어야 해. 아빠가 말한다. 섬 중앙에서 바다까지 아일랜드가 전부 해방될 그날을 위해 준비시켜야 한단 말이야
아빠가 일하러 나간 지 네 번째 되는 금요일 아침에 엄마가 묻는다. 오늘밤 봉급을 집으로 가져올 거야, 아니면 한밤중에 <케빈 배리>며 온갖 청승맞은 노래들을 죄다 불러젖히면서 주머니에 돈 한 푼도 없이 들어올 거야?
아빠는 모자를 고쳐 쓰고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넣고 천장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쉰다. 아까 말했잖아. 곧장 집으로 올 거라고.
그날 오후 엄마는 우리에게 옷을 입힌다. 우리는 쌍둥이를 유모차에 태우고서 브루클린의 기나긴 거리들을 지나간다. 이따금 엄마 곁에서 총총걸음을 하던 말라키가 지치면 엄마는 말라키를 유모차에 앉힌다. 그리고 내게 이렇게 말한다. 넌 유모차를 타기엔 너무 크구나. 물론 나도 엄마를 따라잡느라 다리가 아프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어머니가 노래를 부르지 않기 때문에 오늘 같은 날은 다리 아프다고 말해선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우리는 큰 대문 앞에 도착한다. 사방에 유리창이 달린 초소 안에 한 남자가 서 있다. 엄마가 그 남자한테 말을 건다. 엄마는 남자들이 급료를 받는 곳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 거기에 가면 아빠가 술집에서 돈을 다 쓰지 못하게 봉급의 일부를 엄마가 받아갈 수 있는지 알고 싶어한다. 남자는 고개를 젓는다. 미안합니다, 부인. 하지만 그렇게 하면 브루클린에 사는 부인네들 절반이 밀어닥칠 겁니다. 술 문제가 있는 남자들이 수두룩합니다만, 멀쩡하게 나타나서 일을 하는 데야 우리도 어쩔 도리가 없지요.
우리는 길 건너편에서 기다리고 있다. 엄마는 나더러 벽을 등지고 인도에 앉아 있으라고 한다. 그러고는 쌍둥이에게 설탕물이 든 젖병을 물린다. 하지만 말라키와 나는 엄마가 아빠한테서 돈을 탈 때까지 기다려야만 한다. 그래야 차와 빵, 계란을 사러 이탈리아 사람에게 갈 수 있다.
5시 반에 호루라기 소리가 나자 모자에 작업복을 입은 남자들이 우르르 문을 빠져나온다. 작업하느라 모두 얼굴과 손이 새까맣다. 엄마는 길 건너편이 잘 보이지 않는다며 우리더러 아빠가 나오는지 잘 보라고 한다. 엄마는 그 정도로 눈이 나쁘다. 처음엔 수십 명이 나오더니 이내 몇 명으로 줄고, 나중엔 아무도 없다. 엄마는 울면서 말한다. 왜 아빠를 보지 못했어. 니들 눈이 먼 거니 뭐니.
엄마는 초소에 있는 남자에게로 다시 간다. 안에 남자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은 거 확실해요?
그렇소, 부인. 모두 다 나왔어요. 남편이 어떻게 부인을 지나쳤는지는 모르겠군요.
우리는 아까 왔던 브루클린의 그 기나긴 거리들을 되짚어 걸어간다. 쌍둥이는 젖병을 치켜들고 설탕물을 더 달라고 울어댄다. 말라키가 배가 고프다고 하자 엄마가 말한다. 조금만 기다리렴. 아빠한테 돈을 타면 맛있는 저녁밥을 먹자. 이탈리아 사람에게 가서 계란을 사고, 난롯불로 토스트도 구워서 그 위에 잼을 발라먹자. 아무렴, 그러고말고. 그러면 우리 모두 기분도 좋아지고 몸도 따뜻해질 거야.
애틀랜틱 가는 깜깜하지만 롱아일랜드 기차역 주변의 술집들은 모두 휘황찬란하고 시끄럽다. 우리는 이 술집 저 술집을 돌아다니면서 아빠를 찾아 헤맨다. 엄마는 우리에게 유모차를 맡기고 직접 술집 안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나를 대신 들여보내기도 한다. 시끄럽게 떠드는 남자들이 우글거리고 있다. 시큼한 술냄새에 위스키 냄새를 풍기며 집으로 돌아오는 아빠가 생각난다.
엄마의 소원이 이루어진다. 얼마 안 있어 작은 여자애가 태어나고 사람들이 그 애를 마거릿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모두 마거릿을 사랑한다. 엄마처럼 검은 곱슬머리에 푸른 눈을 지닌 마거릿은 고사리 같은 작은 손을 흔들면서 클래슨 가 가로수의 새들처럼 운다. 라이보비츠 아줌마도 한 마디 거들었다. 어쩜, 이런 눈, 이런 미소, 이런 행복한 아기는 처음 봐. 마거릿을 보면 춤이 절로 나온다니까.
아빠는 일자리를 찾아다니다가 집에 돌아오면 마거릿을 안고 노래 부른다.
엄마는 미니 매커도리 아줌마에게 말한다. 저 아이와 함께 있으면 그이는 천국이 따로 없는가봐요. 마거릿이 태어난 후론 술은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다니까요. 진작 딸아이를 가질걸 그랬지 뭐예요.
그러나 마거릿은 알 수 없는 병으로 죽었고, 엄마는 그 충격과 슬픔으로 하루의 대부분을 침대에 누워 벽만 바라보고 있고, 아빠는 다시 술을 마신다. 엄마의 사촌인 필로미나와 딜리어가 찾아와 실정을 보고는 외할머니에게 편지를 써준다. 외할머니가 부쳐준 뱃삯으로 뉴욕을 떠난 프랭크 가족이 일주일 후에 아일랜드 드니골 주의 모빌에 도착—벨파스트—앤트림 주의 툼으로 버스를 타고 이동하여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사는 집으로 가지만, 수두룩한 고모들의 냉대와 아일랜드는 미국보다 사정이 더 나쁘다는 할머니의 말을 듣는다. 그들은 다시 더블린의 IRA 사무실을 찾아 도움을 요청하지만 그곳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눈에 핑크색 안대를 한 남자가 대답한다. 제대로 찾아왔구려. 찰스 헤가티는 14번지에 살고 있소. 천벌을 받을 놈이지. 보아하니 당신도 복무했던 사람이구려. 아빠가 대답한다. 아, 그랬었죠. 그러자 남자가 말한다. 나 역시 그랬소만, 그래서 얻은 거라곤 애꾸눈과 카나리아 밥도 못 줄 연금뿐이라오.
하지만 아일랜드가 독립했잖아요. 아빠가 말한다. 그게 대단한 거죠.
독립이라 엿이나 먹으라 하쇼. 난 우리가 영국 치하에 있을 때가 형편이 더 나았다고 생각하니까. 어쨌든 행운을 빌겠소. 형씨, 당신이 여기 왜 왔는지 내 알 것 같으니 말이오.
(...)헤가티 씨는 아빠의 이름을 묻더니 책상 위에 있는 큰 책의 책장을 넘기다가 고개를 내젓는다. 없어요, 여긴 당신 복무기록이 없네요.
아빠가 일장연설을 한다. 헤가티 씨에게 자기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싸웠고, 또 어떻게 하다가 자기 머리에 걸린 현상금 때문에 아일랜드에서 몰래 도망쳐야 했는지, 자기 아들들을 어떻게 아일랜드를 사랑하는 아이들로 키우고 있는지 얘기한다.
헤가티 씨는 미안하지만 복무를 했다고 주장하면서 떠돌아다니는 모든 뜨내기들에게 다 돈을 내줄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러자 아빠가 내게 말한다. 기억해라, 프랜시스. 이게 바로 새로운 아일랜드다. 소인배들이 작은 의자에 앉아서 종이쪼가리들이나 만지작거리는 곳, 이곳이 바로 사람들이 목숨을 바친 아일랜드다.
수중에 돈 한 푼 없이 더블린에서 날은 저물고, 주정뱅이와 창녀들이 우글대는 경찰서 바닥에서 하룻밤을 신세진다. 경사 부인이 리머릭 행 기찻삯을 모금해 주었고, 외할머니에게 전보를 쳐서 리머릭으로 프랭크 가족들을 마중나오게 해주었다. 그리고 외할머니는 함께 살 공간이 없다며 방을 하나 얻어주며 2주에 10실링 하는 집세도 내주었다. 외할머니는 또 약간의 음식 살 돈과 주전자, 냄비, 프라이팬, 나이프 몇 개, 숟가락 몇 개와 머그잔으로 쓸 잼 병 몇 개, 그리고 담요 한 장과 베개 한 개를 빌려주면서 자기가 해줄 수 있는 전부라고 말한다. 아빠가 일자리를 얻든지, 실업수당으로 살든지, ‘성 빈첸시오 바오로 회’에 가서 구호품을 받든지 해야만 할 거라고 했다. 당장 벼룩과의 전쟁은 시작되고...
그때 유진이 일어나 앉더니 비명을 지르며 온몸을 쥐어뜯었다. 아, 아, 엄마, 엄마, 아빠가 일어나 앉았다. 뭐? 무슨 일이냐? 얘야. 유진은 계속 울었다. 아빠가 침대에서 뛰어내려 가스등을 켜자 벼룩들이 우리 살에 붙어서 폴짝폴짝 뛰는 게 보였다. 우리는 손바닥으로 치고 또 쳤지만 벼룩들은 이 몸에서 저 몸으로 껑충껑충 뛰어다니면서 물어뜯었다. 우리는 침대에서 뛰어내리고 쌍둥이들은 울고 엄마는 한탄했다. 오, 예수님, 우리에게 휴식은 없나이까! 아빠는 잼 병에 물과 소금을 넣고 녹여서 그걸 물린 데 발라주었다. 소금 때문에 덴 것처럼 따가웠지만 아빠는 곧 괜찮아질 거라고 말했다.(...) 자전거를 타고 가던 한 남자가 멈춰서더니 아빠가 왜 매트리스를 때리고 있는지 물었다. 맙소사, 내 그런 벼룩 퇴치법은 들어본 적이 없소.
벼룩과 이는 내가 어릴 적에도 많았다. 그런데 벼룩의 습성에도 동양과 서양에 차이가 있는지는 몰라도 우리 집의 벼룩은 주로 개나 고양이의 털 속에 많았고, 사람에겐 벼룩보다 이가 많았다. 저녁마다 호롱불에 다가앉아 뒤집은 내복의 봉제선에 숨어 있는 이를 손톱으로 눌러 터뜨려 죽이는 것이 일과 중의 하나였다. 지금처럼 여분의 옷이 많았으면 식구들이 한꺼번에 옷을 갈아입은 뒤 벗은 옷을 삶으면 해결되었을 텐데, 그럴 여유마저 없었던 것이다.
아빠가 엄마에게 좀 나갔다 돌아오겠다고 말하지만, 엄마는 말라키와 유진을 무릎에 앉히고 침대에 앉아서 고개를 돌리지도 않는다. 아빠는 나를 데리고 리머릭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이 가게 저 가게로 들어간다. 아빠는 한 해 동안 자식 둘을 잃은 가족에게 줄 수 있으면 음식이든 뭐든 주십사고 사정한다. 한 자식은 미국에서, 또 한 자식은 리머릭에서 죽었는데 먹고 마실 것이 없어서 남은 세 자식도 잃을 끔찍한 지경입니다. 대부분 가게 주인들이 내젓는다. 딱한 사정이오만 빈첸시오 회에 가보든지 정부 보조금을 받든지 하시오.
아빠가 리머릭에 예수 정신이 살아 있는 모습을 보니 기뻐 죽겠다고 쏘아댄다. 그러자 그 사람들이 아빠에게 소리친다. 북부 말투로 예수님을 들먹이는 댁 같은 사람들은 필요 없수. 어린애를 사방에 끌고 다니면서 천한 거지나 떠돌이, 폐마 도살업자처럼 굴다니,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몇몇 가게 주인들은 빵과 감자, 콩 통조림을 내준다. 아빠가 말한다. 집에 가자. 이제 니들 뭣 좀 먹을 수 있겠다.
이런 와중에도 아빠의 술주정은 계속되었다. 올리버를 묻은 다음날 아침, 아빠는 직업안정국에서 주는 일주일치 실업수당인 19실링 6펜스를 받아오기 위해 나가서는 해가 지고 술집들이 문을 닫고 한참 지나서야 비틀비틀 노래를 부르며 돌아왔다. 집에선 전날 상점 주인들이 주었던 몇 알 안 되는 감자를 삶아 먹고 허기를 달래며 실업수당을 받아올 아빠만을 기다리는데, 그 돈을 술값으로 모두 탕진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6개월 후에는 올리버의 쌍둥이 형제인 유진도 폐렴으로 죽는다.
아빠가 엄마에게 산책하러 가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엄마는 안 된다고 말한다. 엄마는 아빠가 뭘 하려는지 안다. 마지막 남은 몇 실링을 술집에서 쓰지 못해 안달이 났다는 걸 안다. 알았어, 아빠가 대답한다.
말라키와 나는 유진이 죽었던 그 침대로 돌아온다. 나는 유진이 묘지에 있는 그 하얀 관 속에서 떨지 않길 바란다. 물론 유진이 이젠 더 이상 그곳에 없다는 것도 안다. 천사들이 묘지로 내려와 관을 열어줘서, 사람 죽이는 섀넌 강의 습기로부터 멀리 떠나 저 하늘 위 천국에 올리버, 마거릿과 함께 있을 것이다. 그곳엔 피시앤드칩스, 또 토피가 아주 많고, 참견쟁이 이모들도 없으며, 아빠들은 모두 직업안정국에서 받은 돈을 집으로 가져와 그들을 찾으러 술집을 헤매고 다닐 필요도 없으리라.
크리스마스에 엄마가 말라키와 프랭크를 데리고 빈첸시오 회에 가서 줄을 서서 받은 배급표로 푸줏간에서 얻은 것은 크리스마스에는 아무도 먹지 않는 돼지머리다. 그것을 몸이 아픈 엄마를 대신하여 안고 집으로 가는 길에서 만난 초등학교 급우들에게서 프랭크는 온갖 놀림을 받는다.
엄마는 돼지머리에 쓸 냄비를 빌릴 수 있는지 알아보라고 나를 외할머니 댁에 보낸다. 외할머니가 말한다. 도대체 너희들 만찬 때 뭘 먹겠다는 거냐? 돼지머리라고! 예수님, 마리아님, 요셉님, 아주 갈 데까지 가는구나. 네 아비는 밖에 나가서 햄이나 거위 한 마리 정도도 찾을 수 없다든? 도대체 그놈은 어떻게 생겨먹은 인간이냐, 도대체.
엄마는 방금 물을 채운 냄비 속에 돼지머리를 넣고, 돼지가 삶길 동안 아빠는 말라키와 나를 데리고 미사 드리러 구세주회 성당에 간다. 성당안은 따뜻하고 꽃, 향, 양초 냄새로 향긋하다.
돼지머리 얘기를 읽으면 내게도 떠오르는 추억이 있다. 부모님이 포도 농사를 하실 때의 일이다. 포도밭 가운데의 큰 바위 밑에서 어느 날 강아지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바위 밑을 들여다보니 아직 눈을 뜨지 않은 강아지들이 꼬무락대고 있었다. 그 강아지들을 소쿠리에 주워담으니 모두 여덟 마리였는데, 집으로 와서 헛간에다 짚을 깔고 강아지들을 쏟아놓았다. 등이 검고 가슴은 흰 어미 들개가 낮에는 사람을 피해 집 주위만 맴돌다가 밤에는 헛간을 들락거리며 새끼들에게 젖을 먹이더니 며칠 뒤부터는 어미도 우리 집 식구가 되었다.
그 어미가 하루는 제 덩치만 한 돼지머리를 하나 물고 와서는 헛간 앞에다 내려놓았다. 아마도 마을 뒤쪽 순환도로에서 누군가 새로 산 차의 무사고 운행을 기원하는 고사를 지내고 두고 간 돼지머리 같았다. 어미는 새끼들에게 주려고 돼지머리를 물고 와서는 무거워서 문턱을 넘지 못하고 헛간 앞에다 두었던 것이다. 엄마는 그것을 깨끗이 씻고 푹 삶아서 사람도 먹고 강아지와 어미에게도 먹였다. 그 후에도 몇 번이나 어미는 돼지머리를 물고 와서 사람과 개 할 것 없이 온 식구가 돼지머리 고기로 포식할 수 있었다.
들판의 젖소 세 마리가 돌담 위에 머리를 걸치고 우리를 보며 음매 하고 운다. 패디가 말한다. 오호라, 젖 짜는 시간이야. 패디는 담을 넘어가 젖소의 젖통 바로 아래 드러눕는다. 그러고는 젖꼭지를 잡아당겨 입 속에 우유를 쭉 짜넣는다. 패디가 우유 짜는 걸 멈추더니 말한다. 어서 와, 프랭키, 신선한 우유야. 아주 맛있어. 저기 다른 젖소를 데려와. 모두 젖 짤 때가 됐다고.
선생님이 이제 첫 고해성사와 첫 영성체를 준비할 때라고 말한다. 너희들이 교리문답에 나오는 모든 질문들과 답들을 익히고 기억할 때다. 이제 훌륭한 가톨릭 신자가 될 때, 옳고 그른 것을 분간할 때, 부름을 받으면 기독교를 위해 죽을 각오를 할 때란 말이다.
선생님은 기독교를 위해 죽는 게 영광스런 일이라고 말하고, 아빠는 아일랜드를 위해 죽는 게 영광스런 일이라고 말한다. 나는 우리가 살기를 바라는 사람이 세상에 과연 있을까 궁금하다. 남동생들과 여동생도 죽었다. 걔네들도 아일랜드나 기독교를 위해 죽은 건지 궁금해진다. 아빠는 그 아이들은 뭔가를 위해 죽기엔 너무 어렸다고 말한다. 엄마는 동생들이 질병과 배고픔 때문에, 직업 없는 아빠 때문에 죽은 거라고 말한다. 아빠는 허, 참, 안젤라, 하더니 모자를 눌러 쓰고 긴 산책을 하러 나간다.
선생님은 우리더러 녹색 표지가 달린 첫 영성체 교리문답서 값으로 3펜스를 가져오라고 한다. 문답서에는 우리가 첫 영성체를 받기 전에 외워둬야 할 질문들과 답이 모두 담겨 있다. 5학년인 큰 아이들은 빨간 표지로 된 두꺼운 견진성사 문답서를 가지고 다니는데, 그건 6펜스짜리다. 나도 어서 자라 훌륭한 사람이 돼서 빨간색 견진성사 교리문답서를 들고 뽐내며 돌아다니고 싶다. 하지만 사람들이 내게 이러저러한 것들을 위해 죽기를 기대하는 그날까지, 그렇게 오래 살 것 같지는 않다. 나는 아일랜드나 기독교를 위해 죽지 않은 어른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 묻고 싶다. 하지만 그런 질문에 어른들은 내 머리를 쥐어박거나 나가서 놀라는 말만 할 게 뻔하다.
엄마가 트로이 선생님을 데려온다. 그는 내 이마를 만지고, 눈꺼풀을 뒤집고, 등을 살펴보기 위해 몸을 뒤집어엎더니, 나를 들쳐안고 자기 자동차로 달린다. 엄마도 따라 뛴다. 트로이 선생님은 엄마에게 내가 장티푸스에 걸렸다고 말한다. 엄마가 울부짖었다. 오, 하느님, 오, 하느님, 제 가족을 몽땅 잃게 되는 겁니까? 도대체 언제 끝나는 건가요? 엄마는 차에 타서 나를 무릎에 안고, 시립병원의 열병 진료소로 가는 내내 구슬피 운다.
프랭크가 한 달 후면 11살이 되던 때 장티푸스로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병원에서 최악의 고비를 넘기고 회복되어 갈 즈음, 옆 병실에 입원해 있던 13살의 소녀가 말을 걸어온다.
어이, 장티푸스 소년, 일어났어?
응.
괜찮아졌니?
응.
그럼 왜 여기 있는 거야?
나도 몰라. 난 아직 침대에 있어. 사람들이 내 몸에 바늘을 찌르고 약을 줘.
넌 어떻게 생겼니?
나는 속으로 무슨 질문이 이래, 라고 생각한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이, 너 거기 있니, 장티푸스 소년?
응.
이름이 뭐야?
프랭크.
좋은 이름이네. 내 이름은 퍼트리셔 마디건이야. 넌 몇 살이니?
열 살.
오. 실망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다음 달 8월엔 열한 살이 돼.
음, 열 살보단 낫네. 난 9월에 열네 살이 돼. 내가 왜 열병 진료소에 있는지 알고 싶니?
응.
난 디프테리아랑 또 다른 무슨 질병에 걸렸어.
다른 무슨 병이 뭔데?
저 사람들도 모른대. 외국에서 병이 옮은 것 같대. 우리 아빠가 아프리카에 있었거든. 난 거의 죽을 뻔했어. 네가 어떻게 생겼는지 나한테 말해 줄래?
이렇게 말을 주고 받다가 병원에서는 다른 병실 사람하고 특히 남자아이랑 여자아이일 경우에는 절대 서로 말하면 안 된다고 수녀의 제지를 받는다. 그러나 수녀의 눈을 피해 퍼트리셔는 자기가 읽던 영국 역사책을 청소부 아저씨를 통해 보내주고, 좋아하는 시를 프랭크에게 읽어주기도 한다. 그러다가 결국엔 위층 병실로 옮겨지고 만다. 얼마 후 아저씨로부터 퍼트리셔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마치 황순원의 소나기의 한 장면처럼.
어쨌든, 프랭키, 넌 이제 며칠 안으로 여기서 나가게 될 거야. 그러니까 아래층 퍼트리셔는 몰라도, 너는 읽고 싶은 시를 전부 읽을 수 있어. 퍼트리셔는 어찌 될는지 모르겠구나. 하느님 굽어살피소서.
퍼트리셔가 어찌됐는지 아저씨는 이틀 후에 알게 된다. 퍼트리셔는 원래 침대에서 환자용 변기를 써야 했는데 변소에 가려고 침대 밖으로 나왔다가 변소에서 쓰러져 죽었다. 바닥에 걸레질을 하고 있던 셰이머스 아저씨의 두 뺨에 눈물이 흐른다. 아저씨는 이런 말을 한다. 꽃다운 나이에 변소에서 죽다니, 정말 더럽게 불공평한 일이야. 네게 그 시를 낭송하게 해서 병실을 옮기게 만들었다고 그애가 미안하다더라, 프랭키. 모두 다 자기 잘못이라고 했어.
그렇지 않아요, 셰이머스 아저씨.
나도 알지, 그래서 그애한테 그렇게 말해주지 않았겠니.
아빠는 나더러 열심히 공부해서 언젠가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 빨간색 만년필, 파란색 만년필을 셔츠 주머니에 꽂고 책상에 앉아서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비 들이치지 않는 실내에서 일하고, 신사복에 구두를 신고, 살 만한 따뜻한 집 한 칸 있으면 남자로서 뭘 더 바랄 게 있겠냐면서. 아빠는 미국에서는 뭐든 할 수 있다고, 미국은 기회의 땅이라고 말한다. 메인에서 어부가 될 수도 있고 캘리포니아에서 농부가 될 수도 있단다. 미국은 사람 죽이는 강이 흐르는 회색 도시 리머릭과는 다르다.
매일 아침 난롯가에서 아빠를 독차지할 수만 있다면 쿠훌린도, 일곱 번째 계단의 천사도, 다른 어떤 것도 필요 없다.
저녁이면 아빠는 우리가 과제하는 것을 도와준다. 엄마 말로는 미국에선 숙제homework라고 부른다고 한다. 하지만 여기 아일랜드에서는 산수, 영어, 아일랜드어, 역사를 과제exercise라고 부른다. 아빠는 북부 출신이기 때문에 모국어가 짧아서 아일랜드어 과제는 도와줄 수 없다. 말라키가 자기가 아는 모든 아일랜드 단어들을 가르쳐주겠다고 하지만, 아빠는 그러기에 자기는 너무 늦었다고, 늙은 개에게 새로 짖는 법을 가르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잠들기 전, 우리가 난롯가에 둘러앉아 아빠에게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면, 아빠는 골목에 사는 누군가에 대한 이야기를 지어내고, 이야기는 우리를 온 세계로 데리고 다니며 하늘 위로 날고 바닷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골목으로 돌아오곤 한다. 아빠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피부색도 다르고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고 거꾸로다. 자동차와 비행기가 물속으로 들어가고 잠수함이 하늘을 난다. 상어가 나뭇가지에 앉고 거대한 연어가 달에서 캥거루와 장난을 치고 논다. 북극곰이 호주에서 코끼리와 씨름을 하고, 펭귄이 줄루족에게 백파이프 부는 법을 가르친다. 이야기가 끝나면 우리를 위층으로 데리고 올라가 우리가 기도하는 동안 함께 무릎을 꿇는다. 우리는 주기도, 성모송 세 번, 교황을 위한 기도를 드린다. 하느님 엄마를 축복해주소서, 하느님 죽은 여동생과 남동생들을 축복해주소서, 하느님 아일랜드를 축복해주소서, 하느님 데 벌레라를 축복해주소서, 하느님 아빠한테 일자리를 주는 사람은 모두 축복해주소서. 아빠가 말한다. 자, 이제 자거라, 얘들아. 신성한 하느님께선 너희를 지켜보고 계시기 때문에 너희가 언제 나쁜 짓을 하는지 다 아신단다.
삼위일체처럼 아빠 안에도 세 사람이 있는 것 같다. 아침에 신문을 읽을 때의 아빠, 저녁에 이야기를 들려주고 기도드릴 때의 아빠, 그리고 나쁜 짓을 한 후 술냄새를 풍기며 집으로 돌아와 우리가 아일랜드를 위해 죽기를 바라는 아빠.
나는 아빠가 나쁜 짓을 할 때면 슬프지만, 그렇다고 아빠를 멀리할 수는 없다. 아침의 아빠가 진짜 우리 아빠이기 때문이다. 내가 만약 미국에 있다면 영화 속에서처럼 아빠, 사랑해요, 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리머릭에선 놀림을 당할까봐 그런 말을 할 수가 없다. 하느님과 아기와 경주에서 이긴 말은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도, 그밖에 다른 것에 대해 그런 말을 하는 건 바보멍청이나 하는 짓이었다.
사람들이 밤낮으로 양동이를 비워대는 통에 우리는 부엌에 있는 것이 괴로울 지경이다. 엄마는 섀넌 강이 아니라 문밖 화장실 악취가 우리 식구를 죽일 거라고 말한다. 모든 것이 흘러넘쳐 우리집 문 밑으로 스며드는 겨울철도 나쁘지만, 파리와 청파리, 쥐들이 기승을 부리는 따뜻한 날씨는 더 끔찍하다.
이렇게 프랭크는 아빠에 대한 연민과 사랑과 미움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다.
히틀러의 독일과 영국이 전쟁 중에 있어서 가난한 아일랜드 남자들은 돈을 벌기 위해 아이러니하게도 800년 동안이나 아일랜드를 괴롭혀온 영국으로 떠나고, 그들이 매달 보내오는 전신환으로 맛있는 음식들을 먹고 영화도 보며 풍요로운 생활을 한다. 프랭크의 아빠도 결국엔 일자리를 찾아 영국으로 떠나지만, 영국에 가서도 술값으로 봉급을 다 날려버리는지 소식이 없다.
그 소년이 다시 오더니 우체국의 오코넬 부인에게 물어봤지만 매코트네에 온 우편물은 없다고 하더라고 전한다. 엄마는 불 꺼진 벽난로 쪽으로 돌아앉아 잿더미를 바라보면서 담뱃진에 절어 갈색이 되어버린 엄지손가락과 담뱃불에 덴 가운뎃손가락 사이에 우드바인 꽁초를 끼고 마지막 한 모금의 위안을 빨아들인다. 겨우 다섯 살밖에 안 된 마이클은 사정이 어떤지 모르는 모양이다. 나처럼 열한 살이 될 때까지는 알 턱이 없지. 녀석은 배가 고프다면서 엄마에게 오늘 저녁 피시앤드칩스를 먹을지 묻는다. 엄마가 마이클을 달랜다. 그건 다음주에 먹자, 아가. 그러자 녀석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다시 골목으로 놀러 나간다.
첫 전신환이 오지 않으면, 도대체 뭘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게 된다. 다들 집으로 돌아간 골목에서 동생들을 데리고 마냥 놀고 있을 수만은 없다. 집집에서 풍겨나는 소시지 냄새, 베이컨 냄새, 빵 굽는 냄새에 괴로워하면서 골목에 남는 건 창피한 일이다. 어둠 속에서 이웃집 창문으로부터 새어나오는 전등 불빛도 보고 싶지 않고, 이웃집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BBC나 <에이레 라디오>의 뉴스 소리도 듣고 싶지 않다.
길 건너 사는 다운스 씨가 자기 어머니 장례를 치르러 영국에서 돌아와서 자기 부인한테 우리 아빠 얘기를 한다. 다운스 부인은 그 얘기를 브라이디 해넌에게 하고, 브라이디가 다시 우리 엄마한테 전한다. 다운스 부인에 따르면, 말라키 매코트는 완전히 술에 미쳤고, 코번트리의 술집이란 술집은 죄다 들락거리며 봉급을 탕진하고, 아일랜드 항전가를 불러댄다고 했다. 영국인들은 아일랜드인들이 툭하면 수백 년간의 고통을 물고 늘어지는 데 익숙해서 그런 노래 부르는 것쯤은 상관하지 않는대. 하지만 술집에서 영국의 국왕 부처와 그들의 귀하신 두 딸과 국왕의 모후를 모욕하는 사람은 절대 참지 않는다는 거야. 그 힘없는 노인네가 누구한테 무슨 짓을 했다고. 어쨌든 말라키는 술 마시는 데 돈을 몽땅 써버려서 집세까지 다 날리고 집주인에게 쫓겨나서 공원에서 새우잠을 자는 신세가 되었다지 뭐야. 늘 망신당할 짓만 하고 돌아다닌다니까. 다운스 씨는 이 유서 깊은 도시에 수치만 안겨주는 말라키가 리머릭 사람이 아닌 게 천만다행이라고 했대. 코번트리의 치안판사들도 이젠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한 것 같아. 그 사람들은 말라키 매코트가 그런 짓거리를 당장 그만두지 않으면 영국 땅에서 영원히 추방하고 말 거라고 으름장을 놓고 있대.
이 기막힌 소식을 들은 엄마는 브라이디 아줌마에게, 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평생 이토록 절망적인 적은 없었다고 하소연한다. 오코넬 가게에서는 외상을 안 주려고 하고, 외할머니는 1실링만 꿔달래도 엄마의 면전에서 고함을 친다. 빈첸시오 회에서는 남편이 영국에 가 있는 마당에 도대체 언제까지 구호품을 얻으러 올 거냐고 엄마를 다그친다. 엄마는 아이들이 다 해진 누더기 같은 셔츠에, 너덜너덜해진 바지에, 찢어진 신발에, 구멍 난 양말을 신고 다니는 게 너무나 챙피스럽다.
폐렴이 악화된 엄마가 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프랭크와 동생들은 애기 이모네에 머물면서 눈칫밥을 먹으며 지낸다. 엄마가 나아서 퇴원할 무렵, 영국에 가서 소식이 없던 아빠가 돌아와서 며칠 머물다가 다시 영국으로 떠난다. 2주일 후 아빠로부터 처음으로 3파운드짜리 전신환을 받고 리머릭의 프랭크 가족은 천국에 온 것 같은 기분이지만, 그 후로 아빠는 다시 깜깜소식이다. 열한 살밖에 안된 프랭크는 해넌 씨를 도와 석탄 자루를 배달하는 일을 한다. 그러나 하루에 1실링을 받는 그 일도 얼마 가지 않아 해넌 아저씨가 건강 악화로 입원하는 바람에 끝나고 만다.
집세를 내지 못해 살던 집에서 쫓겨나게 되자 할머니가 데려다준 레이먼 그리핀의 집으로 이사를 한다. 이 집 역시 도저히 사람 사는 집이라고 하기 어려울 정도다.
우리가 처음 그 집으로 들어갔을 때 레이먼은 아래층 방을 뺏기고 다락방으로 쫓겨 올라갔다고 몹시 화가 난 듯 끊임없이 투덜댔다. 그리고 뒷마당에 있는 화장실에 가기 위해 다락방을 오르내리는 데도 지쳤다고 소리쳤다. 그가 식탁이랑 의자 가져와, 나 내려갈 거야, 라고 소리치면 우리는 서둘러 식탁을 치우고 식탁을 벽 쪽으로 밀어붙여야 한다. 하지만 그도 지쳤는지 다락방 오르내리는 일을 그만두고 자기 어머니가 쓰던 예쁜 요강을 쓰겠다고 한다. 레이먼은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읽으면서 골드 플레이크 담배를 피운다. 때로는 엄마에게 1, 2실링을 던져주며 우리를 시켜서 차와 함께 먹을 스콘이나 햄, 얇게 저민 토마토 등을 사오라고 한다. 레이먼이, 안젤라, 요강이 다 찼어, 하고 소리치면 엄마는 의자와 식탁을 끌어다 다락방에 올라가서 요강을 갖고 내려와 뒷마당 화장실에다 요강을 비우고 깨끗이 씻은 다음 다시 다락방으로 올려보낸다. 엄마가 굳은 표정으로, 우리 나리께서 오늘은 필요한 게 더 없으십니까, 라고 물으면 레이먼은 껄껄 웃으면서 이런 건 다 여자가 하는 일이잖아, 안젤라. 여자가 하는 일. 게다가 공짜로 얹혀살면서 뭘 그래, 라고 빈정거린다.
아일랜드 군대는 음악에 재능이 있고 육군 군악대에서 훈련받고 싶어하는 소년들을 찾고 있다. 그들이 내 동생 말라키를 받아들이고, 말라키는 군인이 되고 트럼펫을 연주하기 위해 더블린으로 떠난다.
이제 집에 남은 동생은 둘뿐이다. 엄마는 가족들이 바로 자기 눈앞에서 사라지고 있다고 말한다.
학교에서 단체로 킬라루로 자전거 여행을 떠나기 하루 전 저녁, 레이먼 그리핀이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와서는 프랭크가 요강을 비우지 않았다고 자전거를 빌려줄 수 없다고 한다. 깜박하고 오늘 하루 요강을 비우지 않았을 뿐 삼 주 동안 요강도 비우고 심부름도 했으니 약속을 지키라고 항의를 하다가 프랭크는 레이먼에게 두들겨맞는다.
엄마가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잠시 후 엄마가 파라핀 램프를 끄자 사방이 어둠에 잠긴다. 그렇게 난리를 치렀으니 엄마가 침대에 눕고 싶어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벽 쪽 작은 침대로 옮겨가려고 몸을 일으킨다. 그런데 엄마가 의자로, 식탁으로, 또 의자로 올라가고. 울면서 다락방으로 올라가 레이먼에게 그저 어린애일 뿐이에요. 게다가 눈병으로 고생하고 있잖아요, 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자 레이먼이 대답한다. 똥개 같은 새끼. 내쫓아버렸으면 좋겠어. 엄마가 울면서 애원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나중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동생들은 내 옆에서 자고 있다. 레이먼 그리핀이 다시 나한테 덤벼들면 그때는 그 인간의 목을 칼로 찌를 것만 같다. 더 이상 이 집에 머무를 수 없다. 어떻게 헤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나는 집을 나와 사스필드 병영에서부터 모뉴먼트 카페까지 걷는다. 머릿속에는 온통 레이먼에게 어떻게 앙갚음을 해줄까 하는 생각뿐이다. 나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조 루이스를 만날 것이다. 그는 가난한 집안 출신이니까 내 고민을 털어놓으면 이해해줄 것 같다.
프랭크는 그길로 펫 외삼촌 집으로 간다. 외삼촌 집에서 지내고 있다는 것을 엄마가 알게 되고 엄마는 마이클 손에 쪽지를 들려 보내 집으로 돌아오라고 한다. 프랭크는 거절하고, 어릴 적에 거꾸로 떨어져 온전하지 못한 외삼촌에게 얹혀살면서 남의 집 앞에 배달된 우유를 훔치기도 하고, 과수원에 들어가 사과 서리도 한다. 결국, 엄마와 동생들도 레이먼의 집에서 프랭크가 있는 곳으로 이사를 하고, 프랭크는 열네 살이 되는 날 우체국 임시직 배달부로 취직을 한다.
일주일이 지나자 오코넬 부인이 내 생애 첫 봉급인 1파운드, 내가 받은 첫 파운드를 건네준다. 나는 계단을 뛰어내려가 오코넬 가에 있는 큰길로 간다. 가로등이 켜지고 사람들이, 나처럼 주머니에 봉급이 든 사람들이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나는 그들에게 나도 그들과 같다고, 나도 진짜 남자라고, 내게도 1파운드가 있다고 알려주고 싶다. 나는 사람들이 날 알아봐주기를 바라면서 오코넬 가의 한쪽 길을 올라갔다가 다른쪽 길로 내려가지만, 날 알아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세상에 대고 1파운드 지폐를 흔들고 싶다. 그러면 사람들은 저기 주머니에 1파운드가 든 노동자 프랭크 매코트가 가는군, 하고 말해줄 거다.
제대로 말하기 힘들었지만 나는 파 이모부랑 내 첫 맥주를 마셨다고 얘기한다. 첫 맥주를 사줄 아빠가 없어서요.
네 이모부가 이렇게 지각없는 사람은 아닌데.
나는 비틀비틀 의자로 걸어간다. 엄마가 말한다. 꼭 지 아빠랑 똑같아.
나는 입안에서 제멋대로 움직이는 혀를 통제하려고 애쓴다. 차라리, 차라리, 레이먼 그리핀보다 차라리 우리 아빠를 닮겠어요.
엄마는 내게서 고개를 돌리고 난로 속의 재를 들여다본다. 하지만 나는 엄마를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을 작정이다. 왜냐면 나는 내 맥주를, 맥주 두 잔을 마셨고, 내일이면 열여섯 살이 되는 사나이이기 때문이다.
내 말 들었어요? 레이먼 그리핀을 닮느니 차라리 아빠를 닮겠다고요.
엄마가 벌떡 일어나서 나를 똑바로 본다. 입조심해.
엄마나 그 빌어먹을 입 조심해요.
나한테 그 따위로 말하지 마라. 난 네 엄마야.
내가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할 거예요.
배달부다운 말투구나.
그래요? 그래요? 콧물이나 질질 흘리는 술주정꾼 레이먼 그리핀이나 그런 인간과 다락방으로 기어올라가는 사람보다는 차라리 배달부가 되겠어요. (...)
아침이 되자 동생들은 학교에 가고 말라키는 일자리를 구하러 나간다. 엄마는 난롯가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다. 나는 식탁 위 엄마 팔꿈치 옆에다 급료를 올려놓고 돌아선다. 엄마가 말한다. 차 한잔 마실래?
아니요.
오늘이 네 생일이잖아.
상관없어요.
엄마가 골목까지 따라나와 등뒤에 대고 소리친다. 뭐라도 좀 챙겨먹어! 나는 등을 돌린 채 대답도 하지 않고 길모퉁이를 돌아간다. 엄마에게 잘못했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지만, 말을 하다보면 모든 게 엄마 탓이라고, 엄마는 그날 밤 다락방으로 올라가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하게 될 것만 같다. 하지만 상관없다. 어쨌든 나는 피누케인 부인에게 협박편지를 써주고 돈을 받아 미국에 갈 여비를 모으고 있으니까.
나는 프란체스코 성인께 말했다. 마거릿과 올리버와 유진에 대해, 술에 취해 로디 매콜리의 노래를 부르며 집에는 돈 한 푼 가져오지 않던 아빠, 영국에 가서도 돈 한 푼 보내오지 않는 아빠에 대해, 테레사와 초록소파에 대해, 캐리코거넬 성벽 꼭대기에서 저지른 끔찍한 죄에 대해, 어린아이들을 포로수용소에서 죽게 만들고 그들의 신발이 흩어지게 만든 헤르만 괴링을 왜 목매달지 않느냐고 떠들어댄 것에 대해, 나를 문전박대한 크리스천 브러더스 학교에 대해, 어렸을 적 나를 복사로 써주지 않았던 성당에 대해, 밑창이 떨어진 신발을 신고 딸각거리며 골목을 올라가던 동생 마이클의 뒷모습에 대해, 나를 창피하게 만드는 눈병에 대해, 나를 문전박대한 예수회 수도사에 대해, 내가 따귀를 때렸을 때 엄마의 눈에서 솟구치던 눈물에 대해, 모든 걸 솔직히 털어놓는다.
그레고리 신부님이 말한다. 여기 앉아서 조용히 있고 싶니? 혹시 잠깐 기도하고 싶어?
프랭크는 신문과 잡지를 배달하는 일도 한다. <존 오브 런던스 위클리>의 16페이지를 모조리 찢어서 수거해오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 기사는 산아 제한에 관한 건데, 아일랜드인들이 봐서는 안 될 음란한 내용이다. 배포금지가 되니까 그것을 찾는 사람은 더 많아지고, 프랭크는 동료 배달원들과 함께 그 찢은 페이지를 뒤로 빼돌려 팔아서 미국에 갈 뱃삯으로 8파운드를 우체국에 예금한다.
열아홉 살 생일 전날 금요일 저녁, 피누케인 부인이 셰리주를 사오라고 해서 가게에 갔다가 돌아와보니 부인은 안락의자에 앉아 눈을 부릅뜬 채 죽어 있고, 지갑이 활짝 열린 채 바닥에 떨어져 있다. 나는 부인의 얼굴을 차마 쳐다보지 못하고 지갑에서 지폐 뭉치를 빼낸다. 모두 17파운드다. 나는 트렁크 열쇠를 가지고 위층으로 올라간다. 트렁크에 있던 100파운드 중 40파운드를 꺼내 주머니에 찔러넣고 장부도 챙긴다. 그 돈을 우체국에 예금해둔 돈과 합치면 미국으로 건너갈 여비는 충분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방금 사온 셰리주도 아까워서 들고 나온다.
섀넌 강으로 가서 부둣가에 앉아 피누케인 부인의 셰리주를 홀짝거린다. 장부 안에는 애기 이모의 이름이 있다. 이모가 빚진 액수는 9파운드다. 오래전에 내 옷을 살 때 쓴 돈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젠 갚을 필요가 없는 돈이다. 나는 장부를 강물에 던져버린다. 이모에게 9파운드를 벌게 해줬다고 말할 수 없는 게 아쉽다. 리머릭 골목의 가난한 사람들, 바로 내 이웃들에게 협박편지를 쓰는 것이 늘 미안했는데, 이제 내가 장부를 없애버렸으니 그 사람들이 얼마나 빚졌는지 아무도 모를 테고, 그 사람들은 나머지 돈은 갚지 않아도 된다. 그들에게 말해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나는 당신들의 로빈 후드요, 라고.
셰리주 한 모금을 더 마신다. 갖고 있는 돈 중 1,2파운드를 떼서 피누케인 부인의 영혼의 안식을 위해 미사를 바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부인의 장부는 섀넌 강을 따라 대서양 쪽으로 굼실굼실 흘러간다. 나도 머지않아 그 뒤를 따라갈 것이라고 다짐한다.
엄마는 우리 가족이 파티를 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첫째 아들은 미국으로, 둘째 아들은 영국으로, 그렇게 자식들이 하나둘 떠나가면서 여는 파티라 서글프다고 말한다. 엄마는 슬리니 씨를 돌봐주고 받은 급료에서 아껴서 모은 돈 몇 실링으로 빵과 햄과 브론과 치즈와 레모네이드와 흑맥주 몇 병을 사온다. 파 키팅 이모부도 흑맥주와 위스키를 가져오고, 애기 이모의 까다로운 입맛을 위해 셰리주도 작은 병으로 한 병 가져온다. 이모는 직접 구운 건포도 케이크를 들고 온다.(...) 엄마는 슬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우리 모두 엄마를 따라 합창한다.
당신이 어느 곳을 헤맨다 해도
어머니의 사랑이 당신을 축복할 거예요
어머니 살아 계실 때 잘 돌봐드려요
가시고 나면 그리워질 테니
오후 늦게 코크 항을 출발한 ‘아이리시 오크’ 호는 킨세일과 케이프 클리어를 지나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날이 어두워지자 저 멀리서 언제 다시 볼지 모를 아일랜드의 맨 끝, 마이즌 헤드의 불빛이 가물거린다.
그대로 눌러앉아 우체국 시험도 치고 출세도 했어야 하는 건데. 마이클과 알피에게 깨끗한 신발을 신겨 학교에도 보내고 녀석들을 배불리 먹일 만큼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 건데. 내가 돈만 많이 벌면 우리 가족도 뒷골목에서 벗어나 큰 거리나 아니면 정원 딸린 집들이 있는 대로변 주택가로 이사를 갈 수도 있을 텐데. 그때 그 시험을 쳤어야 했어. 그랬다면 엄마는 다시는 슬리니 씨의 요강도, 그 누구의 요강도 비우지 않아도 되는 건데.
이미 다 늦어버렸다. 나는 이미 배에 올라탔고, 아일랜드는 저 멀리 어둠 속으로 멀어져가고 있다. 갑판에 서서 뒤돌아보자니, 리머릭에 있는 가족과 영국에 있는 말라키와 아빠가 떠오른다. 그러면서, 이런 바보 같은 노릇이 또 어디 있남,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더 바보 같은 건, 그 순간, 아빠가 술만 먹으면 불러대던 로디 매콜리 노래와 침대에서 숨이 넘어가게 기침을 해대는 클로헤시 씨 앞에서 엄마가 숨이 차도록 부르던 케리 무도회의 밤 노래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것이다. 그 순간, 엄마와 동생들과 고약하긴 하지만 그 모습 그대로의 이모, 내게 첫 맥주를 사준 파 이모부가 있는 아일랜드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엄마 말대로 오줌보가 눈에 가 붙었는지 눈에서는 자꾸 눈물이 흘러내린다.
배가 미국에 도착했지만 목적지에 바로 가지 않고 중간 기착지에서 하룻밤을 정박하는 동안, 남편들이 멀리 사냥을 떠나고 없는 여자들이 접근해오고, 그들과 난잡한 밤을 보낸다. 그리고 565페이지나 되는 두꺼운 이 책은, 마지막 챕터는, 단 하나의 단어 ‘그렇군요’로 끝을 맺는데, 이 말은 프랭크 매코트가 나중에 미국 생활에 대해 쓸 다른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나는 무선 기사와 함께 갑판에 서서 불빛이 반짝이는 미국의 야경을 바라본다. 무선기사가 말한다. 대단해! 멋진 밤이었지, 프랭크? 정말 굉장한 나라 아닌가?
그렇군요.('T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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