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백일홍 편지 - 배재경

공산(空山) 2023. 6. 16. 21:06

   백일홍 편지

   배재경(1966~ )

 

 

   어머니는 분분한 사월 85년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다 환갑을 넘긴 외사촌 형은 고모고모!를 부르며 꺼이꺼이 슬프게 운다 아들인 나보다 더 섧게 울어 내가 무안할 정도다 삼일장 봉분을 쌓고자 연분홍 벚꽃 잎이 우수수 날리는 도로를 달려 고향 뒷산아부지 옆으로 모셔졌고외사촌 형은 어느 사이 준비했는지 백일홍 두 그루를 봉분 앞 좌우에 심었다 우리~고모좋아~하는~인데엉엉곡을 하며 백일홍을 심는다 우리 가족사를 모르는 분들이라면 외사촌 형이 부모상을 당한 자식 같다 나는 왜 눈물이 안 나는 것일까사촌 형의 곡소리가 높으면 높을수록 나는 형의 등을 토닥이며 달래기 바빴다 상주가 뒤바뀐 듯하다 그런 사촌 형은 이태 뒤 홀연히 어머니를 보러 떠났다형이 음주를 한 건지는 알지 못했고 10여 년 한몸으로 살아온 1톤 트럭은 부서진 몸 안에 형을 가두고 놓아주지 않았다 자신을 망가뜨린 주인을 용서할 수 없다는 듯 앙다문 포터의 문짝을 떼어내느라 긴급출동요원들이 애를 먹었다 그런데 그때부터 어머니 묘의 왼편 백일홍이 서서히 말라가더니 1년 만에 형을 따라갔다 나는 쓸모없어진 그 백일홍 뼈대를 낫으로 쳐내며 못된 놈이라 뱉어주었고 오른쪽 백일홍은 무성히 가지를 펴고 뜨건 햇살에 가슴 활짝 열고는 복슬복슬 꽃을 화려하게 피워댔다 땀을 삐질삐질 쏟아내며 이른 벌초를 하다 보면 붉은 백일홍이 자꾸 엄마 웃음처럼 비치는데아 이거 환장하겄네 마치 엄마가 화사히 한복을 입고 마실 나가는 듯 서서 나를 보는 듯하다 사촌 형이 자기 고모를 위해 심은 건지나를 위해 심은 건지는 아직도 오리무중이지만,

 

 

   ―《시산맥》2022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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