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친애하는 언니 - 김희준

공산(空山) 2023. 6. 25. 11:51

   친애하는 언니

   김희준(1994~2020)

 

 

   유채가 필 준비를 마쳤나봐 4월의 바람은 청록이었어 손가락으로 땅에 글씨를 썼던가 계절의 뼈를 그리는 중이라 했지 옷소매는 죽어버린 절기로 가득했고 빈틈으로 무엇을 키우는지 알 수 없었어 주머니에 넣은 꽃잎을 모른 체 했던 건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박음질이 풀릴 때 알았지 실로 재봉된 마음이었다는 걸 의사는 누워 있으라 했지만 애초에 봄은 흐린 날로 머무는 때가 많았지 벚꽃과 유채가 엉킨 들판에 어린 엄마와 어린 언니가 있어 놀이기구가 안개 속에 숨어 있었던 거야 숨바꼭질을 좋아하던 언니가 이불과 옥상과 돌담 그리고 유채꽃과 산새와 먹구름 속으로 달려가는

 

   한때 비가 내리고 물의 결대로 살 수 없다면 늙지 않은 그곳으로 가자 소매 안에 훔쳤던 벚나무에 대해 사과하는 밤, 나무의 탯줄이 보고 싶었다 뭉텅이로 발견되는 꽃의 사체를 쥘 때 알았던 거지 비어버린 자궁에 벚꽃이 피고 사라진 언니를 생각했어 비가 호수 속으로 파열하는 밤에 말이야 물 속에 비친 것은 뭐였을까

 

   언니가 떠난 나라에선 계절의 배를 가른다며? 애비가 누구냐니, 사생하는 문장으로 들어가 봄의 혈색을 가진 나를 만날 거야 떨어지는 비를 타고 소매로 들어간 것이 내 민낯이었는지 알고 싶어

 

   파문된 비의 언어가 언니에게서 나왔다는 걸 알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내가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상실의 기술 - 정성환  (0) 2023.07.10
젖은 편지를 찢다 - 노태맹  (0) 2023.06.26
제페토의 숲 - 김희준  (0) 2023.06.25
이 동물원을 위하여·3 - 엄원태  (0) 2023.06.18
백일홍 편지 - 배재경  (0) 2023.0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