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사랑의 전집 - 배한봉

공산(空山) 2023. 7. 18. 12:12

   사랑의 전집
   배한봉
 
 
   당신의 꽃밭에는 영원히 지지 않을 꽃들만 가득합니다.
   아침에 보드라운 햇살이 내리고 숲의 새들은 향기에 전율하였습니다.
   눈을 뜬 내가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아장거리면 뽀오얗게 젖가슴을 내어 기다리시던 당신은 지금도 꽃밭을 일구고 계십니다.
 
   꽃이 피는 만큼 당신은 동공이 생긴 밑동처럼 검게 파이고
   수없이 씨앗들을 땅에 뿌린 꽃나무는 파리한 웃음을 지으며 잎들만큼 무성한 지난날을 가만히 바라보십니다.
 
   당신은 꽃밭 너머 꽃밭에 계십니다. 꽃과 나비가 만든 문 너머에서 환하십니다.
   오랜 세월 당신의 길을 기억하는 어린 꽃나무가 아무 일 없다는 듯 울창한 숲을 이루었습니다.
   당신이 그리울 때마다 꽃밭에 놓인 꿈의 시간을 하늘에 압정으로 하나씩 눌러 박아 놓았습니다.
 
   숲 위에 별이 총총 뜹니다.
   먼 옛날의 무수한 내일이 사랑의 전집을 펼칩니다.
 
 
   ― 『현대시』, 202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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