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 일기

별천지에 다녀오다

공산(空山) 2023. 12. 7. 07:25

날이 많이 풀려서 어제는 자전거를 함께 타려고 아침에 몇몇 친구들에게 전화를 했다. 봉환은 오전에 볼일이 있어서 오후에 타자고 했고, 태용은 부인과 함께 마트에 가기로 해서 안 되겠다고 하였고, 재현은 좋다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창수 형님에게 전화하여 오랜만에 점심을 함께 하기로 하고, 장소는 그 형님의 집 부근인 노변동蘆邊洞의 한 삼계탕집으로 정하였다. 봉환과 재현에게도 오후 1시까지 그 식당으로  자전거를 타고 오라고 했다. 봉무동에서 자전거를 타고 그곳까지 왕복해야 하는 내게는 충분한 운동이 되지만, 두 친구는 거기서 가까운 사월동沙月洞과 정평동正坪洞에 살기 때문에 점심을 먹은 후에 함께 금호강 자전거길을 좀더 탈 생각이었다.

창수 형님은 옛 직장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이자 선배인데, 오랜만에 만났다. 내가 퇴직한 지 7년 반이 지났지만 퇴직 후에 이렇게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처음이다. 물론 다른 동료들의 혼사가 있을 때 예식장에서는 가끔 만났었다. 직장에 재직할 때, 그러니까 내가 가까운 시지時至(신매동新梅洞)에 살 적엔 동네 뒷골목에서 함께 술을 참 많이도 마셨었다. 당시에 술꾼들 때문에 애먹으셨던 형수님도 함께 뵙고 싶었으나 손자를 봐주러 딸네 집에 가셨다고 했다. 그렇게 마셔 대던 나는 급기야 건강 문제로 5년 전에 술을 끊었지만, 창수 형님도 이젠 술을 예전처럼 드시지는 않는 것 같았다. 삼계탕에 딸려 나온 인삼주 두세 잔을 마시는 것이 고작이었다. 아무렴, 건강할 때 미리미리 조심들을 해야지.

네 사람은 직장에 근무할 적의 추억을 얘기하며 옛 동료들의 안부를 서로 묻기도 하며 점심을 먹었다. 삼계탕집을 나와 옆에 있는 카페로 장소를 옮겨서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그런데, 그 카페의 창밖에는 난데없이 꽃이 만발해 있는 것이 아닌가. 양지쪽에서 핀 매화인가 싶어 다가가서 자세히 보니 벚꽃이었다. 4월에나 피는 벚꽃이 12월에 피다니. 개나리나 매화는 일찍 피는 것을 가끔 보아 왔지만, 벚꽃이 계절을 어기는 것은 생전 처음 보았다. 고목이 아닌 장년쯤 된 벚나무 너덧 그루가 그렇게 꽃을 활짝 피우고 서 있는 것이었다.

얼마전,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들 때 갑자기 닥친 한파에 텃밭의 고춧대나 호박덩굴이 동해를 입어 일제히 늘어져 버리고, 늦게까지 붙어 있던 가로수 잎사귀들도 우수수 떨어졌었다. 그 후에 다시 풀려서 며칠 동안 푸근한 날이 계속되고 있는데, 그래서 저 나무들이 착각했는지는 모르지만, 무척 낯설고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부근에 있는 다른 벚나무들은 겨울을 지내느라 깜깜해져 있는데, 왜 저 나무들만 꽃을 활짝 피우는지 곡절을 알 수가 없었다. 필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원인이나 이유는 있을 것이다. 부근 아파트 단지에서의 햇빛의 반사나 데워진 기류의 정체 등등.

차를 마시며 문득 별천지에 와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창밖으로 벚꽃을 구경하며 이야기를 계속하느라 시간이 많이 지나갔다. 그래서 친구들과 자전거를 함께 타는 것은 포기하고, 카페를 나와 바로 헤어졌다.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강둑길의 일부 구간에는 '맨발걷기'를 위한 흙길 공사가 한창이었다. 요즘 맨발걷기 붐이 일어나 나라가 들썩이는 듯하다. 민원이 쇄도하여 지방자치단체가 곳곳에 흙길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동촌유원지를 지나올 땐 예전부터 흙길이던 금호강 우안 둑길에서 맨발로 걷는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띄였다. 나는 맨발걷기에 대해선 일반적인 걷기 운동으로서의 효과는 인정하지만, 무슨 '접지接地'니 '지압指壓'이니 하는 따위의 효과나 근거에 대해서는 믿지 않는 쪽이다. 그런데 한 석달 가까이 집 앞 단산지 둑길에서 맨발걷기를 열심히 해온 아내는 요즘 거울을 쳐다보며 검은 머리카락이 많이 늘고 있다고 호들갑을 떨고 있다. 하도 그러니까 나도 긴가민가하고 있는데, 더 지켜볼 일이다.
 
그건 그렇고, 어제 내가 자전거를 탄 거리는 왕복 40km 정도였다. 집에 돌아와서 채팅방에다 벚꽃 사진과 메시지를 올렸더니 친구들도 놀랍고 신기하다는 반응들이었다.
 
   <나>
   "오늘 내가 자전거를 타고 다녀온 별천지에 대한 자랑을 친구들에게 안 할 수가 없네. 그곳엔 12월인데도 4월에 피는 벚꽃이 만발해 있었고, 꿈속인 듯 아주 오랜 옛적 친구들도 만날 수 있었지. 부드럽고 그윽한 빵 냄새와 커피향도 함께."
 
   <친구들>
   "신기하네. 오늘 찍은 사진 맞나?"
   "정말로 신기하다. 여기가 어디야?"
   "속은 듯..."
   "꽃이 불상타. 저러다 눈 오고 한파가 닥치면 우짜노. 기상이변의 희생자네"
 
   <나>
   "언제 피더라도 곧 시들고 말 꽃인데, 겨울에 한번 피어보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 않을까? ㅎㅎ 시간 되는 친구들은 노변동의 OOO 카페 뒷마당으로 한번 가 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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