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1062

빌라에 산다 - 안현미

빌라에 산다   안현미(1972~)     극락은 공간이 아니라 순간 속에 있다 죽고 싶었던 적도 살고 싶었던 적도 적지 않았다 꿈을 묘로 몽을 고양이로 번역하면서 산다 침묵하며 산다 숨죽이며 산다 쉼표처럼 감자꽃 옆에서 산다 기차표 옆에서 운동화처럼 산다 착각하면서 산다 올챙이인지 개구리인지 햇갈리며 산다 술은 물이고 시는 불이라고 주장하면서 산다 물불 안 가리고 자신 있게 살진 못했으나 자신 있게 죽을 자신은 있다고 주장하며 산다 법 없이 산다 겁 없이 산다 숨만 쉬어도 최저 100은 있어야 된다는데 주제넘게도 정규직을 때려치우는 모험을 하며 시대착오를 즐기며 산다 번뇌를 반복하고 번복하며 산다 죽기 위해 산다 그냥 산다 빌라에 산다    그런데, 어머니는 왜서 자꾸 어디니이껴 하고 물을까

내가 읽은 시 2024.09.01

관심 - 이영광

관심   이영광     아프지도 않으면서 전화로 휴강시키고   우히히히, 베개를 끌어안고   뒹구는 사람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사람   금방 거짓말이 될 비밀들이   가슴속에 가득한 사람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혼자가 되는 사람   휴대폰과 인터넷과 디스커버리 채널의   정글 너머에   어쩌다 출몰하는 사람   사람이 되란 말이 가장 무서운 사람   사람인 듯 사람인 듯한 사람   나는 이 사람이 이상하다   나는 요즘 오직 이 사람한테 관심이 있다                    —『직선 위에서 떨다』 창비 2003.

내가 읽은 시 2024.08.30

빗소리 - 전동균

빗소리   전동균     빈집 처마 끝에 매달린 고드름을 사랑하였다   저문 연못에서 흘러나오는 흐릿한 기척들을 사랑하였다   땡볕 속을 타오르는 돌멩이, 그 화염의 무늬를 사랑하였다    나는 나를 사랑할 수 없어   창틀에 낀 먼지, 깨진 유리 조각, 찢어진 신발,   세상에서 버려져   제 슬픔을 홀로 견디는 것들을 사랑하였다    나의 사랑은   부서진 새 둥지와 같아   내게로 오는 당신의 미소와 눈물을 담을 수 없었으니    나는   나의 후회를   내 눈동자를 스쳐간 짧은 빛을 사랑하였다                        —『한밤의 이마에 얹히는 손』 2024

내가 읽은 시 2024.08.28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 나희덕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나희덕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나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흰꽃과 분홍꽃을 나란히 피우고 서 있는 그 나무는 아마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   멀리로 멀리로만 지나쳤을 뿐입니다    흰꽃과 분홍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   눈부셔 눈부셔 알았습니다    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은 그 나무는   그래서 외로웠을 것이지만 외로운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 여러 겹의 마음을 읽는 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   조금은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복숭아나무 그늘에서   가만히 들었습니다 저녁이 오는 소리를   ..

내가 읽은 시 2024.08.16

뼈아픈 후회 - 황지우

뼈아픈 후회   황지우(1952~ )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려 놓고 가는 것; 그 징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 건지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이동하는 사막 신전;   바람의 기둥이 세운 내실에까지 모래가 몰려와 있고   뿌리째 굴러가고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린다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끝내 자아를 버리지 못하는 그 고열의   神像이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

내가 읽은 시 2024.08.13

둥둥 걷어붙이고 - 송진권

둥둥 걷어붙이고   송진권 (1970~ )     둥둥 걷어붙이고   아부지 논 가운데로 비료를 뿌리며 들어가시네   물 댄 논에 어룽거리는   찔레꽃 무더기 속으로   아부지 솨아 솨르르 비료를 흩으며 들어가시네   소금쟁이 앞서가며 둥그러미를 그리는   고드래미논 가운데로 아부지   찔레꽃잎 뜬 논 가운데   한가마니 쏟아진 별   거기서 자꾸 충그리고 해찰하지 말고   땅개비 개구리 고만 잡고   어여 둥둥 걷어붙이고   들어오라고 아부지 부르시네

내가 읽은 시 2024.07.24

달은 아직 그 달이다 - 이상국

달은 아직 그 달이다   이상국     나 어렸을 적 보름이나 되어 시뻘건 달이 앞산 등성이 어디쯤에 둥실 떠올라 허공 중천에 걸리면 어머니는 야아 야 달이 째지게 걸렸구나 하시고는 했는데, 달이 너무 무거워 하늘의 어딘가가 찢어질 것 같다는 것인지 혹은 당신의 가슴이 미어터지도록 그립게 걸렸다는 말인지 나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어쨌든 나는 이 말을 시로 만들기 위하여 거의 사십여 년이나 애를 썼는데 여기까지밖에 못 왔다. 달은 아직 그 달이다.             ―『달은 아직 그 달이다』 2016

내가 읽은 시 2024.07.21

서로 등 돌리고 앉아서 누군가는 빵을 굽고 누군가는 빵을 먹고 - 김륭

서로 등 돌리고 앉아서 누군가는 빵을 굽고 누군가는 빵을 먹고 김륭(1961~ ) 늙었다, 는 문장 위에 앉아 빵을 굽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냄새가 난다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이야기여서 누군가는 춥고 누군가는 뜨거울 거야 뒷모습을 취소하고 싶은 사람들이 줄을 선다 그게 누구든 거울을 보면서 할 이야기는 아니어서 우주의 한 구석으로 개미떼처럼 몰린 우리 모두의 기억이 구워낸 빵이다 빵을 뜯어먹을 때마다 그림자처럼 붙어있던 기억이 우걱우걱 씹힌다 그게 누구든 그럴 줄 알았다 우리는 매번 빵에게 당한다 이미 지켜보고 있었던 이야기다 노후는 미래에서 오는 게 아니라 과거에서 온다

내가 읽은 시 2024.07.18

자정 - 이경림

자정   이경림     가죽 혁대처럼 질기고 긴 길의 끝에서 나는 보았네 가은*이라는 유리문을. 나는 보았네 그 속에서 수 세기가 내 몸을 돌아 나오는 것을. 지나간 들판 지나간 산 지나간 마을회관 지나간 밤의 광장이 보여주던 무성영화들. 나는 보았네 똥장군을 지고 가는 장수아버지, 취해 비틀거리며 골목을 돌아가던 아랫마을 김 영감, 어머니는 부엌에서 국수를 삶고 있었네, 할머니는 방안에서 어항 속 금붕어처럼 입을 벙긋거리며 이야기하고 있었네, 이마에 칸델라 불을 단 광부들이 막장으로 가는 비탈에 한 줄로 놓여 있었네 한 떼의 개미들처럼 나는 보았네 검고 둥그렇게 서 있는 옥녀봉, 비탈에 자지러지게 피어있는 도라지꽃, 구호물자를 받으려 줄을 선 사람들, 악동 형태는 전봇대를 타고 고압선 쪽으로 오르고 있..

내가 읽은 시 2024.07.15

역광의 세계 - 안희연

역광의 세계   안희연(1986~ )     버려진 페이지들을 주워 책을 만들었다    거기   한 사람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한 페이지도 포기할 수 없어서    밤마다 책장을 펼쳐 버려진 행성으로 갔다   나에게 두개의 시간이 생긴 것이다    처음엔 몰래 훔쳐보기만 할 생각이었다   한 페이지에 죽음 하나*   너는 정말 슬픈 사람이구나   언덕을 함께 오르는 마음으로    그러다 불탄 나무 아래서 깜빡 낮잠을 자고   물웅덩이에 갇힌 사람과 대화도 나누고   시름시름 눈물을 떨구는 가을   새들의 울음소리를 이해하게 되고    급기야 눈사태를 만나   책 속에 갇히고 말았다    한 그림자가 다가와   돌아가는 길을 일러주겠다고 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빛이 너무 가까이..

내가 읽은 시 2024.0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