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1036

돌멩이들 - 장석남

돌멩이들 장석남(1965~ ) 바닷소리 새까만 돌멩이 너덧 알을 주워다 책상 위에 풀어놓고 읽던 책갈피에도 끼워두고 세간 기울어진 자리도 괴곤 했다 잠 아니 오는 밤에는 나머지 것들 물끄러미 치어다도 보다가 맨 처음 이 돌멩이들 있던 자리까지를 궁금해하노라면, 구름 지나는 그림자에 귀 먹먹해지는 어느 겨울날 오후 혼자 매인 늦둥이 송아지 눈매에 얹힌 낮달처럼 저나 나나 살아간다는 것이, 이렇듯 외따로 있다는 것이,

내가 읽은 시 2024.04.11

낮 동안의 일 - 남길순

낮 동안의 일 남길순(1962~ ) 오이 농사를 짓는 동호씨가 날마다 문학관을 찾아온다 어떤 날은 한 아름 백오이를 따 와서 상큼한 오이 냄새를 책 사이에 풀어놓고 간다 문학관은 날마다 그 품새 그 자리 한 글자도 자라지 않는다 햇볕이 나고 따뜻해지면 오이 자라는 속도가 두 배 세 배 빨라지고 화색이 도는 동호 씨는 더 많은 오이를 딴다 문학관은 빈손이라 해가 바뀌어도 더 줄 것이 없고 문학을 쓸고 문학을 닦고 저만치 동호 씨가 자전거를 타고 오고 있다 갈대들 길 양쪽으로 비켜나는데 오늘은 검은 소나기를 몰고 온다 문학관을 찾은 사람들이 멍하니 서서 쏟아지는 비를 보고 있다 지붕 아래 있어도 우리는 젖는다

내가 읽은 시 2024.03.26

불시착 - 변혜지

불시착 변혜지 우리가 인중에 흰 얼룩을 묻히고 다니던 아이였을 때 마을로 들어서는 길목은 우리 것이었다. 줄에 묶은 통나무를 질질 끌고 다니는 것처럼, 우리는 주어진 모든 시간을 그 길목에 묶어두었다. 백까지 세야 돼. 오래된 장승을 중심으로 아이들이 달려나가면, 술래는 시위에 메겨진 화살 같았다. 어떤 날에는 다른 곳으로 튕겨 나가기도 했다. 과실수들이 붉은 열매를 아낌없이 내어주고, 초원의 풀들이 마련해준 잠자리에 누우면 밤하늘에는 반짝이는 별들이 가득했다. 다 함께 장승 놀이를 하자. 부리부리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면서, 우리를 지키자. 잠시도 서로를 떠나지 말자. 코를 훌쩍거리며 나는 모두에게 엄숙하게 제안했고 그곳에서 술래를 놓고 떠난 아이가 돌아올 때까지 오래오래 행복하게 지내기도 했다. 그래..

내가 읽은 시 2024.03.18

슬픈 환생 - 이운진

슬픈 환생 이운진 몽골에서는 기르던 개가 죽으면 꼬리를 자르고 묻어준단다 다음 생에서는 사람으로 태어나라고, 사람으로 태어난 나는 궁금하다 내 꼬리를 잘라 준 주인은 어떤 기도와 함께 나를 묻었을까 가만히 꼬리뼈를 만져본다 나는 꼬리를 잃고 사람의 무엇을 얻었나 거짓말 할 때의 표정 같은 거 개보다 훨씬 길게 슬픔과 싸워야 할 시간 같은 거 개였을 때 나는 이것을 원했을까 사람이 된 나는 궁금하다 지평선 아래로 지는 붉은 태양과 그 자리에 떠오르는 은하수 양떼를 몰고 초원을 달리던 바람의 속도를 잊고 또 고비사막의 외로운 밤을 잊고 그 밤보다 더 외로운 인생을 정말 바랐을까 꼬리가 있던 흔적을 더듬으며 모래 언덕에 뒹굴고 있을 나의 꼬리를 생각한다 꼬리를 자른 주인의 슬픈 축복으로 나는 적어도 허무를 얻..

내가 읽은 시 2024.02.22

눈물로 간을 한 마음 - 오탁번

눈물로 간을 한 마음 오탁번 시집 『비백』을 내면서 맨 앞에 ‘시인의 말’을 쓰는데 ‘눈물로 간을 한 미음’이라고 치면 자꾸 ‘미음’이 ‘마음’이 된다 동냥젖으로 눈물로 간을 한 미음으로 어머니가 나를 살리셨다는 사연인데 다시 쳐도 또 ‘마음’이 된다 ‘눈물로 간을 한 마음’? 그렇다마다! 그 미음이 바로 어머니의 마음이라는 걸 노트북은 어찌 알았을까 글자판에 바짝 붙어있는 ㅏ와 ㅣ가 나를 비아냥하는 것도 다 그윽한 뜻 아닐까 몰라 곰곰 생각에 겨워 눈을 감으면 은하수 건너 캄캄한 하늘 희끗희끗 흩날리는 어머니의 백발 —『2022 대한민국예술원 문학분과 연간작품집』2022.

내가 읽은 시 2024.02.18

밤눈 - 오탁번

밤눈 오탁번 박달재 밑 외진 마을 홀로 사는 할머니가 밤저녁에 오는 눈을 무심히 바라보네 물레로 잣는 무명실인 듯 하염없이 내리는 밤눈 소리 듣다가 사람 발소리? 하고 밖을 내다보다 간두네 한밤중에도 잠 못 든 할머니가 오는 밤눈을 내다보네 눈송이 송이 사이로 지난 세월 떠오르네 길쌈 하다 젖이 불어 종종걸음 하는 어미와 배냇짓하는 아기도 눈빛으로 보이네 빛바랜 자서전인 양 노끈 다 풀어진 기승전결 아련한 이야기를 밤 내내 조곤조곤 속삭이네 밤눈 오는 섣달그믐 점점 밝아지는 할머니의 눈과 귀 —『동리⸳목월』2022. 가을

내가 읽은 시 2024.02.18

속삭임 1 - 오탁번

속삭임 1 오탁번 2022년 세밑부터 속이 더부룩하고 옆구리가 아프고 명치가 조여온다 소리를 보듯 한 달 내내 한잔도 못 마시고 그냥 물끄러미 술병을 바라본다 무슨 탈이 나기는 되게 났나 보다 부랴사랴 제천 성지병원 내과에서 위 내시경과 가슴 CT를 찍고 진료를 받았는데 마른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진다 (참신한 비유는 엿 사 먹었다) 췌장, 담낭, 신장, 폐, 십이지장에 혹 같은 게 보인단다 아아, 나는 삽시간에 이 세상 암적 존재가 되는가 보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1초쯤 지났을까 나는 마음이 외려 평온해진다 갈 길이 얼마 남았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가는 것보다야 개울 건너 고개 하나 넘으면 바로 조기, 조기가 딱 끝이라니! 됐다! 됐어! —2023. 01.05 —시집 『속삭임』 2024.2 --------..

내가 읽은 시 2024.02.18

바람 부는 날 - 김종해

바람 부는 날 김종해(1941~ ) 사랑하지 않는 일보다 사랑하는 일이 더욱 괴로운 날, 나는 지하철을 타고 당신에게로 갑니다. 날마다 가고 또 갑니다. 어둠뿐인 외줄기 지하통로로 손전등을 비추며 나는 당신에게로 갑니다. 밀감보다 더 작은 불빛 하나 갖고서 당신을 향해 갑니다. 가서는 오지 않아도 좋을 일방통행의 외길, 당신을 향해서만 가고 있는 지하철을 타고 아무도 내리지 않는 숨은 역으로 작은 불빛 비추며 나는 갑니다. 가랑잎이라도 떨어져서 마음마저 더욱 여린 날, 사랑하는 일보다 사랑하지 않는 일이 더욱 괴로운 날, 그래서 바람이 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 당신에게로 갑니다. ―『바람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 1990

내가 읽은 시 2024.02.12

숲 - 이영광

숲 이영광 나무들은 굳세게 껴안았는데도 사이가 떴다 뿌리가 바위를 움켜 조이듯 가지들이 허공을 잡고 불꽃을 튕기기 때문이다 허공이 가지들의 기합보다 더 단단하기 때문이다 껴안는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무른 것으로 강한 것을 전심전력 파고든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다면 나무들의 손아귀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졌을 리가 없다 껴안는다는 것은 또 이런 것이다 가여운 것이 크고 쓸쓸한 어둠을 정신없이 어루만져 다 잊어버린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이글거리는 포옹 사이로 한 부르튼 사나이를 유심히 지나가게 한다는 뜻이다 필경은 나무와 허공과 한 사나이를, 딱따구리와 저녁바람과 솔방울들을 온통 지나가게 한다는 뜻이다 구멍 숭숭 난 숲은 숲字로 섰다 숲의 단단한 골다공증을 보라 껴안는다는 것은 이렇게 전부를 통과시켜 주고도 ..

내가 읽은 시 2024.0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