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1036

약속의 후예들 - 이병률

약속의 후예들 이병률(1967∼ ) 강도 풀리고 마음도 다 풀리면 나룻배에 나를 그대를 실어 먼 데까지 곤히 잠들며 가자고 배 닿는 곳에 산 하나 내려놓아 평평한 섬 만든 뒤에 실컷 울어나보자 했건만 태초에 그 약속을 잊지 않으려 만물의 등짝에 일일이 그림자를 매달아놓았건만 세상 모든 혈관 뒤에서 질질 끌리는 그대는 내 약속을 잊었단 말인가

내가 읽은 시 2024.02.05

흑백 무지개 - 강나무

흑백 무지개 강나무(1971~) 요구르트, 그 다디단 것은 한 줄짜리 만화처럼 금방 바닥이 났다 언니는 아침마다 사라지고 엄마는 밥때가 아니면 미싱을 멈추지 않았다 창고 속에서 여자들이 실밥을 머리에 가득 얹고 노루발을 밀어 면장갑을 만들었다 흰 손바닥들이 언덕을 이루면 미끄럼을 타고 싶었다 심심하면 불을 질러야 했지만 성냥불 불꽃마저 희어서 재미가 없을 것 같았다 일부러 길을 잃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누군가 나를 안아 들고 대문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의자처럼 마당에 앉아 있다가 문득 방으로 가 손거울을 놓고 들여다본 아랫도리는 종일 입에 물고 있어 늘어진 검은 고무 꽈리 같았다 아무나 쓰러지기를 바랐다 아니면 죽거나 그때 내게 옜다, 새빨간 거짓말이라도 누가 던져 주었다면 맴돌던 좁은 마당에서 노란 돌..

내가 읽은 시 2024.02.03

구부러진 길 - 이준관

구부러진 길 이준관(1949~ ) 나는 구부러진 길이 좋다. 구부러진 길을 가면 나비의 밥그릇 같은 민들레를 만날 수 있고 감자를 심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날이 저물면 울타리 너머로 밥 먹으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구부러진 하천에 물고기가 많이 모여살듯이 들꽃도 많이 피고 별도 많이 뜨는 구부러진 길 구부러진 길은 산을 품고 마을을 품고 구불구불 간다. 그 구부러진 길처럼 살아온 사람이 나는 또한 좋다. 반듯한 길 쉽게 살아온 사람보다 흙투성이 감자처럼 울퉁불퉁 살아온 사람의 구불구불 구부러진 삶이 좋다. 구부러진 주름살에 가족을 품고 이웃을 품고 가는 구부러진 길 같은 사람이 좋다.

내가 읽은 시 2024.01.12

사람값 - 송경동

사람값 송경동(1967~ ) ‘집값’이 아닌 ‘집’이 소중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 ‘학벌’이 아닌 ‘상식’이 소중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 드높은 ‘명예’보다 드러나지 않는 ‘평범’을 귀히 여기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소수의 풍요’보다 ‘다수의 행복’을 우선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독점과 지배’보다 ‘공유와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 ‘사람’만이 최고라는 생각을 버리고 살아있는 모든 것 앞에 경배하는 새로운 인간종이 되게 하소서

내가 읽은 시 2024.01.06

그대의 별이 되어 - 허영자

사랑은 눈멀고 귀먹고 그래서 멍멍히 괴어 있는 물이 되는 일이다 물이 되어 그대의 그릇에 정갈히 담기는 일이다 사랑은 눈 뜨이고 귀 열리고 그래서 총총히 빛나는 별이 되는 일이다 별이 되어 그대 밤하늘을 잠 안 자고 지키는 일이다 사랑은 꿈이다가 생시이다가 그 전부이다가 마침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일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그대의 한 부름을 고즈너기 기다리는 일이다

내가 읽은 시 2024.01.03

완행열차 - 허영자

완행열차 허영자(1938~ ) 급행열차를 놓친 것은 잘된 일이다 조그만 간이역의 늙은 역무원 바람에 흔들리는 노오란 들국화 애틋이 숨어 있는 쓸쓸한 아름다움 하마터면 나 모를 뻔하였지 완행열차를 탄 것은 잘된 일이다 서러운 종착역은 어둠에 젖어 거기 항시 기다리고 있거니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누비듯이 혹은 홈질하듯이 서두름 없는 인생의 기쁨 하마터면 나 모를 뻔하였지 —『기타를 치는 집시의 노래』 1995

내가 읽은 시 2024.01.03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 신경림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신경림 어려서 나는 램프 불 밑에서 자랐다. 밤중에 눈을 뜨고 내가 보는 것은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뿐이었다. 나는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다. 조금 자라서는 칸델라 불 밑에서 놀았다. 밖은 칠흑 같은 어둠 지익지익 소리로 새파란 불꽃을 뿜는 불은 주정하는 험상궂은 금점꾼들과 셈이 늦는다고 몰려와 생떼를 쓰는 그 아내들의 모습만 돋움새겼다. 소년 시절은 전등불 밑에서 보냈다. 가설극장의 화려한 간판과 가겟방의 휘황한 불빛을 보면서 나는 세상이 넓다고 알았다, 그리고 나는 대처로 나왔다. 이곳저곳 떠도는 즐거움도 알았다 바다를 건너 먼 세상으로 날아도 갔다.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들었다. 하지만 멀리 다닐수록, 많이 보고 들을수록 이상하게도..

내가 읽은 시 2023.12.28

모든 첫 번째가 나를 - 김혜수

모든 첫 번째가 나를 김혜수 모든 첫 번째가 나를 끌고 다니네 아침에 버스에서 들은 첫 번째 노래가 하루를 끌고 다니네 나는 첫 노래의 마술에서 풀려나지 못하네 태엽 감긴 자동인형처럼 첫 노래를 흥얼거리며 밥을 먹다가 거리를 걷다가 흥정을 하다가 거스름돈을 받다가 아침에 들은 첫 번째 노래를 흥얼거리네 모든 첫번째 기척들이 나를 끌고 다니네 첫 떨림과 첫 경험과 첫사랑과 첫 눈물이 예인선처럼 나를 끌고 모든 설레임과 망설임과 회한을 지나 모든 두 번째와 세 번째를 지나 모든 마지막 앞에 나를 짐처럼 부려놓으리 나는, 모든, 첫 번째의, 인질, 잠을 자면서도 나는 아침에 들은 첫 노래를 흥얼거리네 나는, 모든, 첫 기척의, 볼모

내가 읽은 시 2023.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