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1036

올 여름의 인생 공부​ - 최승자

올 여름의 인생 공부 ​최승자 ​ 모두가 바캉스를 떠난 파리에서 나는 묘비처럼 외로웠다. 고양이 한 마리가 발이 푹푹 빠지는 나의 습한 낮잠 주위를 어슬렁거리다 사라졌다. 시간이 똑똑 수돗물 새는 소리로 내 잠 속에 떨어져 내렸다. 그러고서 흘러가지 않았다. ​ 엘튼 죤은 자신의 예술성이 한물갔음을 입증했고 돈 맥글린은 아예 뽕짝으로 나섰다. 송×식은 더욱 원숙해졌지만 자칫하면 서××처럼 될지도 몰랐고 그건 이제 썩을 일밖에 남지 않은 무르익은 참외라는 뜻일지도 몰랐다. ​ 그러므로, 썩지 않으려면 다르게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다르게 사랑하는 법 감추는 법 건너뛰는 법 부정하는 법. 그러면서 모든 사물의 배후를 손가락으로 후벼 팔 것 절대로 달관하지 말 것 절대로 도통하지 말 것 언제나 아이처럼 ..

내가 읽은 시 2023.12.28

깨끗한 식사 - 김선우

깨끗한 식사 김선우 어떤 이는 눈망울 있는 것들 차마 먹을 수 없어 채식주의자 되었다는데 내 접시 위의 풀들 깊고 말간 천 개의 눈망울로 빤히 나를 쳐다보기 일쑤, 이 고요한 사냥감들에도 핏물 자박거리고 꿈틀거리며 욕망하던 뒤안 있으니 내 앉은 접시나 그들 앉은 접시나 매일반. 천년 전이나 만년 전이나 생식을 할 때나 화식을 할 때나 육식이나 채식이나 매일반. 문제는 내가 떨림을 잃어간다는 것인데, 일테면 만년 전의 내 할아버지가 알락꼬리암사슴의 목을 돌도끼로 내려치기 전, 두렵고 고마운 마음으로 올리던 기도가 지금 내게 없고 (시장에도 없고) 내 할머니들이 돌칼로 어린 죽순 밑둥을 끊어내던 순간, 고맙고 미안해하던 마음의 떨림이 없고 (상품과 화폐만 있고) 사뭇 괴로운 포즈만 남았다는 것. 내 몸에 무..

내가 읽은 시 2023.12.28

섶섬이 보이는 방 - 나희덕

섶섬이 보이는 방 ―이중섭의 방에 와서 ​ 나희덕 서귀포 언덕 위 초가 한 채 귀퉁이 고방을 얻어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아이들을 키우며 살았다 두 사람이 누우면 꽉 찰, 방보다는 차라리 관에 가까운 그 방에서 게와 조개를 잡아먹으며 살았다 아이들이 해변에서 묻혀온 모래알이 버석거려도 밤이면 식구들의 살을 부드럽게 끌어안아 조개껍질처럼 입을 다물던 방, 게를 삶아먹은 게 미안해 게를 그리는 아고리와 소라껍질을 그릇 삼아 상을 차리는 발가락군이 서로의 몸을 끌어안던 석회질의 방, 방이 너무 좁아서 그들은 하늘로 가는 사다리를 높이 가질 수 있었다 ​ 꿈속에서나 그림 속에서 아이들은 새를 타고 날아다니고 복숭아는 마치 하늘의 것처럼 탐스러웠다 총소리도 거기까지는 따라오지 못했다 섶섬이 보이는 이 마당에 서서 ..

내가 읽은 시 2023.12.28

신문지 밥상 - 정일근

신문지 밥상 정일근 더러 신문지 깔고 밥 먹을 때가 있는데요 어머니, 우리 어머니 꼭 밥상 펴라 말씀하시는데요 저는 신문지가 무슨 밥상이냐며 궁시렁 궁시렁 하는데요 신문질 신문지로 깔면 신문지 깔고 밥 먹고요 신문질 밥상으로 펴면 밥상 차려 밥 먹는다고요 따뜻한 말은 사람을 따뜻하게 하고요 따뜻한 마음은 세상까지 따뜻하게 한다고요 어머니 또 한 말씀 가르쳐 주시는데요 해방 후 소학교 2학년이 최종학력이신 어머니, 우리 어머니 말씀 철학

내가 읽은 시 2023.12.28

동승 - 하종오

동승同乘 하종오 국철을 타고 앉아 가다가 문득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들려 살피니 아시안 젊은 남녀가 건너편에 앉아 있었다 늦은 봄날 더운 공휴일 오후 나는 잔무하러 사무실에 나가는 길이었다 저이들이 무엇 하려고 국철을 탔는지 궁금해서 쳐다보면 서로 마주 보며 떠들다가 웃다가 귓속말할 뿐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모자 장사가 모자를 팔러 오자 천 원 주고 사서 번갈아 머리에 써 보고 만년필 장사가 만년필을 팔러 오자 천 원 주고 사서 번갈아 손바닥에 써 보는 저이들 문득 나는 천박한 호기심이 발동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황급하게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국철은 강가를 달리고 너울거리는 수면 위에는 깃털 색깔이 다른 새 여러 마리가 물결을 타고 있었다 나는 아시안 젊은 남녀와 천연하게 동승하지 못하고 있어 낯짝..

내가 읽은 시 2023.12.28

고래를 위하여 - 정호승

고래를 위하여 정호승 ​ 푸른 바다에 고래가 없으면 푸른 바다가 아니지 마음속에 푸른 바다의 고래 한 마리 키우지 않으면 청년이 아니지 ​ 푸른 바다가 고래를 위하여 푸르다는 걸 아직 모르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모르지 ​ 고래도 가끔 수평선 위로 치솟아 올라 별을 바라본다 나도 가끔 내 마음속의 고래를 위하여 밤하늘 별들을 바라본다

내가 읽은 시 2023.12.28

첫사랑 - 고재종

첫사랑 고재종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꽃 한번 피우려고 눈은 얼마나 많은 도전을 멈추지 않았으랴 ​ 싸그락 싸그락 두드려 보았겠지 난분분 난분분 춤추었겠지 미끄러지고 미끄러지길 수백 번 ​ 바람 한 자락 불면 휙 날아갈 사​​​랑을 위하여 햇솜 같은 마음을 다 퍼부어 준 다음에야 마침내 피워 낸 저 황홀 보아라 ​ 봄이면 가지는 그 한 번 덴 자리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상처를 터뜨린다.

내가 읽은 시 2023.12.28

물의 출구 - 나희덕

물의 출구 나희덕 그 물을 기억한다 먼지와 거품을 끌고 가던 물, 시든 물풀을 누더기처럼 걸치고 엉금엉금 기어가던 물, 더 이상 흐른다고 말할 수 없던 물, 비가 와도 젖지 않고 땀과 눈물과 오줌에만 젖어들던 물, 쾌활했던 물줄기 잦아들고 자기도 모르는 고요에 갇혀 있던 물, 숨 막히는 그 고요야말로 소용돌이였음을 너무 늦게야 알게 된 물, 하루하루 진창에 가까워져도 물만, 물만, 남아 있으면 된다고 믿었던 물, 검은 눈동자처럼 타들어가던 물 검은 눈동자 속에 지는 해가 가득 들어와 있다 활활 타오르는 불의 우물 저 물의 출구를 따라 여기로 흘러왔다 — 『야생사과』 2009.

내가 읽은 시 2023.12.25

밥풀 - 이기인

밥풀 이기인 (1967~ ) 오늘 밥풀은 수저에서 떨어지지 않네 오늘 밥풀은 그릇에서 떨어지지 않네 오늘 밥그릇엔 초저녁 별을 빠뜨린 듯 먹어도 먹어도 비워지지 않는 환한 밥풀이 하나 있네 밥을 앞에 놓은 마음이 누룽지처럼 눌러앉네 떨그럭떨그럭 간장종지만한 슬픔이 울고 또 우네 수저에 머물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이 저녁의 어둠 이 저녁의 아픈 모서리에 밥풀이 하나 있네 눈물처럼 마르고 싶은 밥풀이 하나 있네 가슴을 문지르다 문지르다 마른 밥풀이 하나 있네 저 혼자 울다 웅크린 밥풀이 하나 있네

내가 읽은 시 2023.12.07

그냥 쓰세요 - 구순희

그냥 쓰세요 ― 경상도 사투리 2 구순희 공중분해된 사투리를 불러들여 근처 수선집으로 갔다 ㅆ과 ㅅ의 발화는 수선 불가라며 돌려보내기에 몇 번 헛바퀴 돌다가 경상도라고 적힌 간판 속으로 쑥 들어갔다 그 집 주인은 벽에 붙은 된소리 몇 개를 읽어 보라고 한다 경기도는 겡기도, 경상도는 겡상도, 결혼은 게론, 나는은 나넌, 들은 덜로 읽고 쌀집은 살집, 쌍문동은 상문동, 썰매는 설매, 은행은 언행, 음악은 엄악, 의사는 이사, 형님 은 헹님이라고 하니 제대로 잘 읽었다고 한다 ㅆ은 ㅅ, 모음 ㅡ는 ㅓ로 발음하는 건 지역 특성상 어쩔 수 없는 발화법이라며 된소리의 높은 고개는 수선이 안 된다고 다른 사람들도 왔다가 못 고치고 돌아갔으니 그냥 아껴서 잘 쓰라고 한다 ― 『월간 시인』, 2023.11.

내가 읽은 시 2023.1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