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1062

이스파한 - 정 선

이스파한   정 선     즐거운 오후가 벌레 먹은 장미 같다   구멍 뚫린 꽃잎들이 다리 사이로 빨갛게 떠내려간다                     *    술보다 한 잔의 장미수 몇 모금의 시샤 다섯 번의 푸른 아잔 소리 연지벌레 카펫 몇 장과 베틀 몇 줄의 시와 하페즈 그리고 이름 그대로 ‘세상의 절반’이라는 이스파한   너    이스파한 골목에서 이스파한을 잃었다   가슴속은 두억시니였다   이스파한을 떠올리면 냉동실 냄새와 함께   검은 눈동자가 서리태로 쏟아졌다    이스파한은 질리지 않는 새벽 강   이스파한은 온종일 지루하지 않은 광장    사막 속으로 떠난 이스파한은   모스크도 카주 다리도 자얀데 강의 노을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이맘광장에는 신기루가 없고 사막 속에는 새로운 애인이 ..

내가 읽은 시 2024.05.19

우리 동네 구자명 씨 - 고정희

우리 동네 구자명 씨    고정희(高靜熙, 1948~1991)      맞벌이 부부 우리 동네 구자명 씨   일곱 달 된 아기 엄마 구자명 씨는   출근 버스에 오르기가 무섭게   아침 햇살 속에서 졸기 시작한다.   경기도 안산에서 서울 여의도까지   경적 소리에도 아랑곳없이   옆으로 앞으로 꾸벅꾸벅 존다.   차창 밖으론 사계절이 흐르고   진달래 피고 밤꽃 흐드러져도 꼭   부처님처럼 졸고 있는 구자명 씨,   그래 저 십 분은   간밤 아기에게 젖 물린 시간이고   또 저 십 분은   간밤 시어머니 약시중 든 시간이고   그래그래 저 십 분은   새벽녘 만취해서 돌아온 남편을 위하여 버린 시간일 거야.   고단한 하루의 시작과 끝에서   잠 속에 흔들리는 팬지꽃 아픔   식탁에 놓인 안개꽃 멍에..

내가 읽은 시 2024.05.14

나무도 바윗돌도 없는 산에 - 작자 미상

나무도 바윗돌도 없는 산에 작자 미상(조선 후기) 나무도 바윗돌도 없는 산에 매에게 쫓긴 까투리 마음과 큰 바다 한가운데 일천 석 실은 배에 노도 잃고 닻도 잃고 돛줄 끊어지고 돛대 꺾어지고 키도 빠지고 바람 불어 물결 치고 안개 뒤섞여 자욱한 날에 갈 길은 천리만리 남았는데 사면이 검어 어둑 저뭇한데 천지적막하고 큰 파도 떴는데 해적을 만난 도사공의 마음과 엊그제 임 여읜 내 마음이야 어디에다가 견주리오

내가 읽은 시 2024.05.13

윤동주 시집이 든 가방을 들고 - 정호승

윤동주 시집이 든 가방을 들고   정호승     나는 왜 아침 출근길에   구두에 질펀하게 오줌을 싸놓은   강아지도 한 마리 용서하지 못하는가   윤동주 시집이 든 가방을 들고 구두를 신는 순간   새로 갈아 신은 양말에 축축하게   강아지의 오줌이 스며들 때   나는 왜 강아지를 향해   이 개새끼라고 소리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가   개나 사람이나 풀잎이나   생명의 무게는 다 똑같은 것이라고   산에 개를 데려왔다고 시비를 거는 사내와   멱살잡이까지 했던 내가   왜 강아지를 향해 구두를 내던지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라는데   나는 한 마리 강아지의 마음도 얻지 못하고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진실로 사랑하기를 원..

내가 읽은 시 2024.05.13

혼밥 - 이덕규

혼밥   이덕규(1961~ )     낯선 사람들끼리   벽을 보고 앉아 밥을 먹는 집   부담없이   혼자서 끼니를 때우는   목로 밥집이 있다    혼자 먹는 밥이   서럽고 외로운 사람들이   막막한 벽과   겸상하러 찾아드는 곳    밥을 기다리며   누군가 곡진하게 써내려갔을   메모 하나를 읽는다    “나와 함께   나란히 앉아 밥을 먹었다”    그렇구나, 혼자 먹는 밥은   쓸쓸하고 허기진 내 영혼과   함께 먹는 혼밥이었구나    한번 다녀들 가시라       —『오직 사람 아닌 것』2023.3

내가 읽은 시 2024.05.07

어머니를 위한 자장가 - 정호승

어머니를 위한 자장가   정호승 (1950~ )     잘 자라 우리 엄마   할미꽃처럼   당신이 잠재우던 아들 품에 안겨   장독 위에 내리던   함박눈처럼    잘 자라 우리 엄마   산 그림자처럼   산 그림자 속에 잠든   산새들처럼   이 아들이 엄마 뒤를 따라갈 때까지    잘 자라 우리 엄마   아기처럼   엄마 품에 안겨 자던 예쁜 아기의   저절로 벗겨진   꽃신발처럼

내가 읽은 시 2024.05.01

팽목항에서 - 임선기

팽목항에서   임선기(1968~)     엄마가 새끼에게   밥을 먹이고 있다    부두도 눈이 부어 있다    맹골수도 바람은 세고   바다는 하염없이 끌려간다    바람도 바다도 제 존재를 괴로워한다    사람들은 영혼을 말하고   오래된 눈물을 흘리고 있다    나부끼는 리본들은   하늘에 있는 것 같다    말은 살아남은 자처럼   말이 없다    모든 비유가 열리고 닫힌다    초록이 너무 푸르다

내가 읽은 시 2024.04.30

돌멩이들 - 장석남

돌멩이들 장석남(1965~ ) 바닷소리 새까만 돌멩이 너덧 알을 주워다 책상 위에 풀어놓고 읽던 책갈피에도 끼워두고 세간 기울어진 자리도 괴곤 했다 잠 아니 오는 밤에는 나머지 것들 물끄러미 치어다도 보다가 맨 처음 이 돌멩이들 있던 자리까지를 궁금해하노라면, 구름 지나는 그림자에 귀 먹먹해지는 어느 겨울날 오후 혼자 매인 늦둥이 송아지 눈매에 얹힌 낮달처럼 저나 나나 살아간다는 것이, 이렇듯 외따로 있다는 것이,

내가 읽은 시 2024.04.11

낮 동안의 일 - 남길순

낮 동안의 일 남길순(1962~ ) 오이 농사를 짓는 동호씨가 날마다 문학관을 찾아온다 어떤 날은 한 아름 백오이를 따 와서 상큼한 오이 냄새를 책 사이에 풀어놓고 간다 문학관은 날마다 그 품새 그 자리 한 글자도 자라지 않는다 햇볕이 나고 따뜻해지면 오이 자라는 속도가 두 배 세 배 빨라지고 화색이 도는 동호 씨는 더 많은 오이를 딴다 문학관은 빈손이라 해가 바뀌어도 더 줄 것이 없고 문학을 쓸고 문학을 닦고 저만치 동호 씨가 자전거를 타고 오고 있다 갈대들 길 양쪽으로 비켜나는데 오늘은 검은 소나기를 몰고 온다 문학관을 찾은 사람들이 멍하니 서서 쏟아지는 비를 보고 있다 지붕 아래 있어도 우리는 젖는다

내가 읽은 시 2024.0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