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1036

후남 언니 - 김선향

후남 언니   김선향     견디다 견딜 수는 없어   하루에 다섯 대까지 아편을 맞았다지    일본 군인들이 자신의 몸을 짓밟든 말든   자신의 영혼을 갈가리 찢든 말든   말문이 닫힌, 병든 검은 새는 아편만 찾았다지    쓸모가 없어진 그녀를 일본 군인들은   만주 벌판에 내다버렸다지    낮밤으로 들리던 그녀의 울음은   까마귀 울음과 닮았다지    풀이 보리순처럼 피어오르는 고향의 들판을   엄마가 지어준 검은 뉴똥치마 입은 소녀를   죽어가는 그녀는 떠올렸다지    철조망 너머 까마귀가 날아와 그녀를 파먹었다지   한겨울 만주 벌판의 밤   몇 조각 뼈만 빛났다지    돌아오지 못한 여자를   모질게 살아 돌아온 여자가 기억한다지     ― 『F등급 영화』 삶창, 2020

내가 읽은 시 2024.05.25

일기 - 안도현

일기   안도현     오전에는 깡마른 국화꽃 웃자란 눈썹을 가위로 잘랐다    오후에는 지난여름 마루 끝에 다녀간 사슴벌레에게 엽서를 써서 보내고    고장 난 감나무를 고쳐주러 온 의원에게 감나무 그늘의 수리도 부탁하였다    추녀 끝으로 줄지어 스며드는 기러기 일흔 세 마리까지 세다가 그만 두었다    저녁이 부엌으로 사무치게 왔으나 불빛 죽이고 두어 가지 찬에다 밥을 먹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것 말고 무엇이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

내가 읽은 시 2024.05.19

이스파한 - 정 선

이스파한   정 선     즐거운 오후가 벌레 먹은 장미 같다   구멍 뚫린 꽃잎들이 다리 사이로 빨갛게 떠내려간다                     *    술보다 한 잔의 장미수 몇 모금의 시샤 다섯 번의 푸른 아잔 소리 연지벌레 카펫 몇 장과 베틀 몇 줄의 시와 하페즈 그리고 이름 그대로 ‘세상의 절반’이라는 이스파한   너    이스파한 골목에서 이스파한을 잃었다   가슴속은 두억시니였다   이스파한을 떠올리면 냉동실 냄새와 함께   검은 눈동자가 서리태로 쏟아졌다    이스파한은 질리지 않는 새벽 강   이스파한은 온종일 지루하지 않은 광장    사막 속으로 떠난 이스파한은   모스크도 카주 다리도 자얀데 강의 노을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이맘광장에는 신기루가 없고 사막 속에는 새로운 애인이 ..

내가 읽은 시 2024.05.19

우리 동네 구자명 씨 - 고정희

우리 동네 구자명 씨    고정희(高靜熙, 1948~1991)      맞벌이 부부 우리 동네 구자명 씨   일곱 달 된 아기 엄마 구자명 씨는   출근 버스에 오르기가 무섭게   아침 햇살 속에서 졸기 시작한다.   경기도 안산에서 서울 여의도까지   경적 소리에도 아랑곳없이   옆으로 앞으로 꾸벅꾸벅 존다.   차창 밖으론 사계절이 흐르고   진달래 피고 밤꽃 흐드러져도 꼭   부처님처럼 졸고 있는 구자명 씨,   그래 저 십 분은   간밤 아기에게 젖 물린 시간이고   또 저 십 분은   간밤 시어머니 약시중 든 시간이고   그래그래 저 십 분은   새벽녘 만취해서 돌아온 남편을 위하여 버린 시간일 거야.   고단한 하루의 시작과 끝에서   잠 속에 흔들리는 팬지꽃 아픔   식탁에 놓인 안개꽃 멍에..

내가 읽은 시 2024.05.14

나무도 바윗돌도 없는 산에 - 작자 미상

나무도 바윗돌도 없는 산에   작자 미상(조선 후기)       나무도 바윗돌도 없는 산에 매에게 쫓긴 까투리 마음과   큰 바다 한가운데 일천 석 실은 배에 노도 잃고 닻도 잃고 돛줄 끊어지고 돛대 꺾어지고 키도 빠지고 바람 불어 물결 치고 안개 뒤섞여 자욱한 날에 갈 길은 천리만리 남았는데 사면이 검어 어둑 저뭇한데 천지적막하고 큰 파도 떴는데 해적을 만난 도사공의 마음과   엊그제 임 여읜 내 마음이야 어디에다가 견주리오

내가 읽은 시 2024.05.13

윤동주 시집이 든 가방을 들고 - 정호승

윤동주 시집이 든 가방을 들고   정호승     나는 왜 아침 출근길에   구두에 질펀하게 오줌을 싸놓은   강아지도 한 마리 용서하지 못하는가   윤동주 시집이 든 가방을 들고 구두를 신는 순간   새로 갈아 신은 양말에 축축하게   강아지의 오줌이 스며들 때   나는 왜 강아지를 향해   이 개새끼라고 소리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가   개나 사람이나 풀잎이나   생명의 무게는 다 똑같은 것이라고   산에 개를 데려왔다고 시비를 거는 사내와   멱살잡이까지 했던 내가   왜 강아지를 향해 구두를 내던지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라는데   나는 한 마리 강아지의 마음도 얻지 못하고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진실로 사랑하기를 원..

내가 읽은 시 2024.05.13

혼밥 - 이덕규

혼밥   이덕규(1961~ )     낯선 사람들끼리   벽을 보고 앉아 밥을 먹는 집   부담없이   혼자서 끼니를 때우는   목로 밥집이 있다    혼자 먹는 밥이   서럽고 외로운 사람들이   막막한 벽과   겸상하러 찾아드는 곳    밥을 기다리며   누군가 곡진하게 써내려갔을   메모 하나를 읽는다    “나와 함께   나란히 앉아 밥을 먹었다”    그렇구나, 혼자 먹는 밥은   쓸쓸하고 허기진 내 영혼과   함께 먹는 혼밥이었구나    한번 다녀들 가시라       —『오직 사람 아닌 것』2023.3

내가 읽은 시 2024.05.07

어머니를 위한 자장가 - 정호승

어머니를 위한 자장가   정호승 (1950~)     잘 자라 우리 엄마   할미꽃처럼   당신이 잠재우던 아들 품에 안겨   장독 위에 내리던   함박눈처럼    잘 자라 우리 엄마   산 그림자처럼   산 그림자 속에 잠든   산새들처럼   이 아들이 엄마 뒤를 따라갈 때까지    잘 자라 우리 엄마   아기처럼   엄마 품에 안겨 자던 예쁜 아기의   저절로 벗겨진   꽃신발처럼

내가 읽은 시 2024.05.01

팽목항에서 - 임선기

팽목항에서   임선기(1968~)     엄마가 새끼에게   밥을 먹이고 있다    부두도 눈이 부어 있다    맹골수도 바람은 세고   바다는 하염없이 끌려간다    바람도 바다도 제 존재를 괴로워한다    사람들은 영혼을 말하고   오래된 눈물을 흘리고 있다    나부끼는 리본들은   하늘에 있는 것 같다    말은 살아남은 자처럼   말이 없다    모든 비유가 열리고 닫힌다    초록이 너무 푸르다

내가 읽은 시 2024.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