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오는 이 이별은 - 박규리 지금 오는 이 이별은 박규리 이 나이에 오는 사랑은 다 져서 오는 사랑이다 뱃속을 꾸르럭거리다 목울대도 넘지 못하고 목마르게 내려앉는 사랑이다 이 나이에 오는 이별은 멀찍이 서서 건너지도 못하고 되돌이키지도 못하고 가는 한숨 속에 해소처럼 끊어지는 이별이다 지금 오는 이 이별은 다 져서 질 수도 없는 이별이다 ―『이 환장할 봄날에』 2004 내가 읽은 시 2024.10.09
무운시 - 기혁 무운시(Blank Verse) 기혁 말기의 암환자는 자신의 병이 운이라고 했다. 아이를 업은 아내도, 수차례 수술을 집도한 주치의도 운이라는 단어에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운과 위장운 그리고 얼마간의 간운. 오장육부에 퍼진 운들이 깨어날수록 운명도 이름을 달리했지만, 때로는 운명의 이름들 사이에 낭만이라는 뜻이 섞이기도 했을 것이다. 두운과 요운과 각운을 맞춰온 일생처럼, 온몸의 운율로 써내려간 정형의 행간. 죽음은 어떤 염문에도 규칙을 어기지 않는다 했다. 능숙한 수사로 상처를 꿰맨 자리에 무의식 깊은 곳까지 방사선을 쬐어야 했던 비문이 완치되지 않는 은유로 전이된다. 환영은 정말 블랭크에만 숨어드는 것일까? .. 내가 읽은 시 2024.10.04
히말라야 해국 - 김명기 히말라야 해국(海菊) 김명기 (1969~) 모든 꽃이 질 즈음 해국이 핀다 비탈진 해안가에 가장 늦게까지 피어 있는 꽃 어느 산간에는 벌써 눈이 왔다는데 위태로운 꽃 위로 그칠 줄 모르고 비가 내린다 자기 몸의 몇 배나 되는 짐을 짊어진 채 샌들을 신고 히말라야 기슭을 오르는 어린 소년의 반짝이는 눈망울이 깜박일 때 동상 걸린 발가락 넷을 잘라낸 아버지는 눈 덮인 마당을 절룩절룩 걸어 다니며 아내가 숨긴 술병을 찾고 있지 몹쓸 산기슭이나 대물림한 병든 아비가 술잔에 눈물을 부딪칠 때 가파른 계곡을 겨우 올라가는 어린 눈망울과 몇 번이나 기워 신은 해진 샌들 사이 갈라진 뒤꿈치가 딛고 가는 발자국처럼 그늘진 비탈에서 비탈로 해국이 번지.. 내가 읽은 시 2024.10.02
주소 - 박소란 주소 박소란 내 집은 왜 종점에 있나 늘 안간힘으로 바퀴를 굴려야 겨우 가닿는 꼭대기 그러니 모두 내게서 서둘러 하차하고 만 게 아닌가 ―『심장에 가까운 말』 2015 내가 읽은 시 2024.09.29
하여간, 어디에선가 - 박승민 하여간, 어디에선가 박승민 (1964~) 안녕, 지구인의 모습으로는 다들 마지막이야 죽은 사람들은 녹거나 흐르거나 새털구름으로 떠오르겠지 그렇다고 이 우주를 영영 떠나는 건 아니야 생각,이라는 것도 아주 없어지진 않아 무언가의 일부가 되는 건 확실해 보이지 않는 조각들이 모여 ‘내’가 되었듯 다음에는 버섯 지붕 밑의 붉은 기둥이 될 수도 있어 죽는다는 건 다른 것들과 합쳐지는 거야 새로운 형태가 되는 거야 꼭 ‘인간’만 되라는 법이 어디에 있니? 그러고 보니 안녕, 하는 작별은 첫 만남의 인사였네 우리는 ‘그 무엇’과 왈칵 붙어버릴 테니깐 난 우주의 초록빛 파장으로 번지는 게 다음 행선지야 내가 읽은 시 2024.09.29
외출 - 김영태 외출 김영태(1936~2007) 꽃을 사야지 별을 판다면 별도 사야지 금관 담배도 한 갑 사야지 속초항 며루치도 흉년인데 진주 妓生 버선 속 맨발에 윤기가 없다면 외상으로 연탄 백덩이도 사야지 꽃 사는 마음으로 면도칼도 사야지 그럴수록 정장하고 세파를 헤쳐 나가야지 내가 읽은 시 2024.09.26
설경 - 김영태 설경(雪景) 김영태 우리 눈 높이 위에 있는 음악이다 바람이 멎은 후 꽃나무 사이 풍경처럼 삭막한 음악이다 표정만한 가벼운 몸 둘레에 따스한 얼굴 더 소중한 그 무엇을 소망하는 얼굴이다 우리 시야보다 먼데 있는 종소리다 귀를 막고 숨어도 들려오는 종소리다 하여, 이후에 찾아올 몇몇 친구 이미 묘비에 잠든 이 사랑하는 이 모두 한결같이 들려주고 싶은 음악이여 얼굴의 미소여 저 제야의 종소리는 무슨 연유일까 사랑한다는 한 마디의 유언은 내가 읽은 시 2024.09.26
탑동 - 현택훈 탑동 현택훈(1974~ ) 누군 깨진 불빛을 가방에 넣고 누군 젖은 노래를 호주머니에 넣어 여기 방파제에 앉아 있으면 안 돼 십 년도 훌쩍 지나버리거든 그것을 누군 음악이라 부르고 그것을 누군 수평선이라 불러 탑동에선 늘 여름밤 같아 통통거리는 농구공 소리 자전거 바퀴에 묻어 방파제 끝까지 달리면 한 세기가 물빛에 번지는 계절이지 우리가 사는 동안은 여름이잖아 이 열기가 다 식기 전에 말이야 밤마다 한 걸음씩 바다와 가까워진다니까 와, 벌써 노래가 끝났어 신한은행은 언제 옮긴 거야 내가 읽은 시 2024.09.22
서시 - 한강 서시 한강(1970~ )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 라고 말하게 될까. 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 라고.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끝없이 집착했는지 매달리며 눈먼 걸인처럼 .. 내가 읽은 시 2024.09.10
소나기 - 전동균 소나기 전동균(1962~) 노랑멧새들 총알처럼 덤불에 박히고 마루 밑 흰둥이는 귀를 바르르, 갑자기 컴퓨터 화면이 시커메졌다 화악, 입안 가득 차오르는 화약 같은 생흙 냄새 세상이 아픈 자들, 대속(代贖)의 맨발들이 지나간다 내가 읽은 시 2024.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