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1046

뒤척이다 - 천양희

뒤척이다   천양희(1942~ )     뒤척이다   허공을 향해   몸을 던지는 거미처럼   쓰러진 고목 위에 앉아   지저귀는 붉은가슴울새처럼   울부짖음으로 위험을   경고하는 울음원숭이처럼   바람 불 때마다 으악   소리를 내는 으악새처럼   불에 타면서 꽝꽝   소리를 내는 꽝꽝나무처럼    남은 할 말이 있기라도 한 듯   나는 평생을   천천히 서둘렀다

내가 읽은 시 2024.10.30

도착 - 문정희

도착   문정희 (1947~)     이름도 무엇도 없는 역에 도착했어   되는 일보다 안 되는 일 더 많았지만    아무것도 아니면 어때   지는 것도 괜찮아   지는 법을 알았잖아   슬픈 것도 아름다워   내던지는 것도 그윽해    하늘이 보내준 순간의 열매들   아무렇게나 매달린 이파리들의 자유   벌레 먹어   땅에 나뒹구는 떫고 이지러진   이대로   눈물나게 좋아   이름도 무엇도 없는 역   여기 도착했어

내가 읽은 시 2024.10.11

지금 오는 이 이별은 - 박규리

지금 오는 이 이별은 박규리 이 나이에 오는 사랑은 다 져서 오는 사랑이다 뱃속을 꾸르럭거리다 목울대도 넘지 못하고 목마르게 내려앉는 사랑이다 이 나이에 오는 이별은 멀찍이 서서 건너지도 못하고 되돌이키지도 못하고 가는 한숨 속에 해소처럼 끊어지는 이별이다 지금 오는 이 이별은 다 져서 질 수도 없는 이별이다 ―『이 환장할 봄날에』 2004

내가 읽은 시 2024.10.09

산책로 - 차도하

산책로   차도하     네모를 가방에 넣고 걸을까 합니다   동그라미가 될 때까지    모든 것을 용서합니다   용서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산책로가 필요합니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   둘이서 얘기하며 걷는 사람   뒤로 걷는 사람   박수를 치며 걷는 사람의 소음이   가방 안에서 네모가 내는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지워야 합니다    그 산책로는 세상보다 길어야 합니다    걷다가               걷다가 걷다가                                     걷다가 걷다가   걷다가                             걷다가    지쳐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   단잠을 잘 수 있어야 합니다    용서가 되지 않더라도   아직 걷지 못한 산책로가 있으니까   ..

내가 읽은 시 2024.10.04

하여간, 어디에선가 - 박승민

하여간, 어디에선가   박승민 (1964~)     안녕,   지구인의 모습으로는 다들 마지막이야   죽은 사람들은 녹거나 흐르거나 새털구름으로 떠오르겠지   그렇다고 이 우주를 영영 떠나는 건 아니야   생각,이라는 것도 아주 없어지진 않아   무언가의 일부가 되는 건 확실해   보이지 않는 조각들이 모여 ‘내’가 되었듯   다음에는 버섯 지붕 밑의 붉은 기둥이 될 수도 있어   죽는다는 건 다른 것들과 합쳐지는 거야   새로운 형태가 되는 거야   꼭 ‘인간’만 되라는 법이 어디에 있니?   그러고 보니 안녕, 하는 작별은 첫 만남의 인사였네   우리는 ‘그 무엇’과 왈칵 붙어버릴 테니깐   난 우주의 초록빛 파장으로 번지는 게 다음 행선지야

내가 읽은 시 2024.09.29

설경 - 김영태

설경(雪景)   김영태     우리 눈 높이 위에 있는 음악이다   바람이 멎은 후   꽃나무 사이 풍경처럼 삭막한 음악이다   표정만한 가벼운 몸 둘레에 따스한 얼굴   더 소중한 그 무엇을 소망하는 얼굴이다   우리 시야보다 먼데 있는 종소리다   귀를 막고 숨어도 들려오는 종소리다   하여,   이후에 찾아올 몇몇 친구   이미 묘비에 잠든 이   사랑하는 이   모두 한결같이 들려주고 싶은   음악이여   얼굴의 미소여   저 제야의 종소리는 무슨 연유일까   사랑한다는 한 마디의 유언은

내가 읽은 시 2024.09.26

탑동 - 현택훈

탑동 현택훈(1974~ ) 누군 깨진 불빛을 가방에 넣고 누군 젖은 노래를 호주머니에 넣어 여기 방파제에 앉아 있으면 안 돼 십 년도 훌쩍 지나버리거든 그것을 누군 음악이라 부르고 그것을 누군 수평선이라 불러 탑동에선 늘 여름밤 같아 통통거리는 농구공 소리 자전거 바퀴에 묻어 방파제 끝까지 달리면 한 세기가 물빛에 번지는 계절이지 우리가 사는 동안은 여름이잖아 이 열기가 다 식기 전에 말이야 밤마다 한 걸음씩 바다와 가까워진다니까 와, 벌써 노래가 끝났어 신한은행은 언제 옮긴 거야

내가 읽은 시 2024.09.22

서시 - 한강

서시   한 강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   라고 말하게 될까.   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   라고.​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끝없이 집착했는지   매달리며   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  ..

내가 읽은 시 2024.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