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바라기 노리코 21

이바라기 노리코의 하직 인사

이번에 저(이바라기 노리코)는 (2006)년 (2)월 (17)일 (지주막하출혈)로, 이 세상을 하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생전에 써 둔 것입니다. 내 의지로, 장례·영결식은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 집도 당분간, 사람이 살지 않게 되니, 조위품이나 꽃 따위 아무것도 보내지 말아주세요. 반송 못하는 무례를 포개는 것뿐이라고 생각되니까. "그 사람이 떠났구나" 하고 한순간, 단지 한순간 생각해 주셨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오랫동안 당신께서 베풀어 주신 따뜻한 교제는, 보이지 않는 보석처럼, 나의 가슴속을 채워서, 광망을 밝히고, 나의 인생을 얼마만큼 풍부하게 해 주신 건가... 깊은 감사를 바치면서, 이별의 인사말을 드립니다. 고마웠습니다. 2006년 3월 길일

세월

세월   이바라기 노리코(茨木のり子, 1926~2006)     진실을 다 알기에는   이십오 년이라는 세월은 짧았을까요   아흔의 당신을 상상해 본다   여든의 나를 상상해 본다   어느 한쪽이 노망이 들고   어느 한쪽이 기진맥진하고   어쩌면 둘 다 그리 되어   영문도 모른 채 서로 미워하고 있는 모습이   언뜻 스쳐간다   어쩌면 또   푸근한 할배와 할멈이 되어   자 갑시다 하고   서로 목을 조르려 해도   그 힘조차  없어 엉덩방아를 찧는 모습   하지만   세월만은 아니겠지요   단 하루만의   벼락같은 진실을   품에 안고 살아나가는 사람도 있는 걸요    ―『이바라기 노리코 선집』 다니카와 슌타로 엮음, 조영렬 옮김, AK, 2023.

밤의 정원

밤의 정원   이바라기 노리코(茨木のり子, 1926~2006)     향이, 흘러들어   비로소 알아차린다   꽃들이 피기 시작한 것을   정원에 한 그루 금목서金木犀    알알이 맺힌 꽃은   크림색에서 울금색으로   금방 색깔을 바꾸고   아낌없이 요염한 향기를 내뿜는다    멍한 데가 있었던 당신은   헤어 토닉과 쉐이빙 로션을   자주 혼동해서   바르는 사람이기도 했던지라    밤의 찬공기에 감도는 그윽한 꽃향기에 홀려   저 세상과 이 세상의 경계   투명한 가을의 회전문을 밀치고   불쑥, 이곳에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여름 기모노를 입고   어라?   예상치 못했다는 듯   머리를 쓸어올리면서    이미 알아차렸으면서도   이쪽은 짐짓 시치미를 떼고   놀라지 않도록 티 내지..

발자국

발자국   이바라기 노리코(茨木のり子, 1926~2006)     은행이 지는 날   박물관 유리 너머로 보는 점토에 찍힌 작은 발자국   길이 4센티미터 가량 되는 유아의 발자국   아오모리현 롯카쇼 마을에서 출토   조몬시대 후기   아이는 으앙 하고 울었을까   생글생글 웃고 있었을까   마른 점토판을 알불로 서툴게 태웠어도   그 부드러움은 생생하니   옛날 그 옛날의 부모들도   사랑스런 아이의 발자국을 남기고 싶어했다   병아리콩 다섯 알이 늘어선 듯한 발가락   어쩐지, 뭉클하게 젖어드는 눈시울    나한테는 슬픈 일이 있었고   울다 울다 지쳐   눈물샘이 얼어붙고   감정도 다 메말라   마음이 움직이는 일 따위 모조리 없어져 버렸는데   자그마한 발이 툭 차주었다   내 속에 딱딱하게 ..

호수

호수    이바라기 노리코(茨木のり子, 1926~2006)          〈원래 엄마란          고요          한 데가 있어야 하는 법이란다〉    명대사로구나!    뒤돌아보니   양갈래머리와 단발머리   두 개의 책가방 흔들거리며 걷던   낙엽 진 길    엄마만 그런 게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 깊숙이   고요하고 잔잔한 호수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다자와 호수처럼 깊고 푸른 호수를   감추어 지니고 있는 사람은   말해보면 알 수 있지, 두 마디, 세 마디로    그것이야말로, 고요히 가라앉아   쉽사리 늘지도 줄지도 않는 저만의 호수   결코 타인이 침범할 수 없는 마魔의 호수    교양이나 학력 따위하고는 관계가 없는 듯하다   인간의 매력이란   아마도 그 호수 언저..

혼자 있는 흥겨움

혼자 있는 흥겨움   이바라기 노리코     혼자 있는 것은, 흥겹다   흥겹고 흥겨운 숲이다   꿈이 톡톡, 터져 나온다   안 좋은 생각도, 솟아 나온다   에델바이스도, 독버섯도    혼자 있는 것은, 흥겹다   흥겹고 흥겨운 바다다   수평선도 기울고   더할 나위 없이 사나운 밤도 있다   바다 잔잔한 날 태어나는 명주조개도 있다    혼자 있는 것은, 흥겹다   맹세코 억지를 부리는 게 아니다    혼자 있을 때 쓸쓸한 놈이   둘이 모이면, 더욱 쓸쓸하다   잔뜩 모이면   더, 더, 더, 더욱 타락한다    사랑하는 이여   아직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못하는, 너   혼자 있을 때, 가장 흥겨운 녀석으로   있어 주게     ―『이바라기 노리코 선집』 다니카와 슌타로 엮음, 조영렬 옮김, ..

오우메 가도

오우메 가도   이바라기 노리코(茨木のり子, 1926~2006)     나이토 신주쿠에서 오우메까지   곧장 연결될 터인 오우메 가도*   말똥 대신 배기 가스   끊임없이 줄지어 서서   시각을 다투며 핏발 선 눈으로 핸들을 잡은 이들은   오늘 아침 벌떡 일어나 세수했을까?   꾸물꾸물 반창고를 떼어내듯 침대와 떨어졌다          구루미 복사지          동양합판          사케 기타노호마레          마루이 크레디트          아케보노 빵   가도 한 군데에 버스를 기다리느라 서 있으니   무수한 중소기업 이름   갑자기 신선하게 눈앞을 스쳐지나가고   필사의 가문家紋   과연 몇 년 뒤까지   보존될까 의심하면서   음력 5월 초하루 고이노보리**   천연덕스럽게 바람을..

샘 - 이바라기 노리코

샘   이바라기 노리코(茨木のり子, 1926~2006)     내 안에   피어난   라벤더 같은 것은   모두 당신께 드렸습니다   그러니 향기가 더는 남아 있지 않아요    내 안에    넘치는   샘물 같은 것은   당신의 숨이 끊어졌을 때   일시에 치솟더니 말라버렸습니다   이젠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아요    다시금 당신을 만나게 된다면   또 향기가 날까요  오월의 들판처럼   또 넘쳐흐를까요  루르드의 샘처럼

짐승이었던

짐승이었던   이바라기 노리코(茨木のり子, 1926~2006)     짐승이었던 밤도 있었다   그래 인간도 짐승이구나   사무치게 깨달은 밤도 있었다    시트를 팽팽히 당겨보아도   침실은 낙엽을 긁어모아 가득 쌓아둔   너구리 소굴과 다르지 않네    익숙한 움막   흐트러진 터럭   두 마리 짐승이 풍기는 냄새    어느 날 갑자기 나의 짝이 사라지고   나는 멀뚱히 인간이 되었다   그저 인간이 되어버렸다

총독부에 다녀올게

총독부에 다녀올게   이바라기 노리코(茨木のり子, 1926~2006)     한국의 노인 중에는   지금도   화장실에 갈 때   유유히 일어나   "총독부에 다녀올게"   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던가   조선총독부에서 소환장이 오면   가지 않고는 못 버티던 시대   불가피한 사정   이를 배설과 연결 지은 해학과 신랄함    서울에서 버스를 탔을 때   시골에서 온 듯 보이는 할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두루마기를 입고   검은 갓을 쓴   소년이 그대로 자라 할아버지가 된 듯   순수 그 자체의 인상이었다   일본인 여럿이 일본어로 몇 마디 나누었을 때   노인의 얼굴에 공포와 혐오   스치는 것을 보았다   어떤 말보다도 강렬하게   일본이 한 짓을   그때 보았다     ―『처음 가는 마을』 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