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4호실 - 김병호 일반 4호실 김병호 누가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떴는지 화환도 없고 문상객도 두엇이다 특실로 가는 화환이 긴 터널을 이루는 동안에도 화환 하나 놓이지 않는 곳 신발들도 기대어 졸고 있는데 특실로 가는 문상객이 그마저 어깃장을 놓는다 성근 국화처럼 벽에 기대어 있는 젊은 아낙과, 문 뒤에 숨어 입구까지 덮쳐오는 긴 터널을 바라보고 있는 앳된 소녀 삼일장도 너무 긴 일반 4호실 내가 읽은 시 2023.10.26
사랑의 발명 - 이영광 사랑의 발명 이영광 살다가 살아보다가 더는 못 살 것 같으면 아무도 없는 산비탈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누워 곡기를 끊겠다고 너는 말했지 나라도 곁에 없으면 당장 일어나 산으로 떠날 것처럼 두 손에 심장을 꺼내 쥔 사람처럼 취해 말했지 나는 너무 놀라 번개같이,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네 ―『나무는 간다』 2013. 내가 읽은 시 2023.10.14
사람 숲에서 길을 잃다 - 김해자 사람 숲에서 길을 잃다 김해자 너무 깊이 들어와 버린 걸까 갈수록 숲은 어둡고 나무와 나무 사이 너무 멀다 동그랗고 야트막한 언덕배기 천지사방 후려치는 바람에 뼛속까지 마르는 은빛 억새로 함께 흔들려본 지 오래 막막한 허공 아래 오는 비 다 맞으며 젖어본 지 참 오래 깊이 들어와서가 아니다 내 아직 어두운 숲길에서 헤매는 것은 헤매다 길을 잃기도 하는 것은 아직 더 깊이 들어가지 못한 탓이다 깊은 골짝 지나 산등성이 높은 그곳에 키 낮은 꽃들 기대고 포개지며 엎드려 있으리 더 깊이 들어가야 하리 깊은 골짝 지나 솟구치는 산등성이 그 부드러운 잔등을 만날 때까지 높은 데 있어 낮은, 능선의 그 환하디환한 잔꽃들 만날 때까지 ― 『무화과는 없다』 걷는사람, 2022. 내가 읽은 시 2023.10.08
나무 믹담 - 김상환 나무 믹담* ―부인사 김상환 겨울 산사를 찾았다 부인은 없고 부인과 함께 바라본 느티가 묻는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지? 그럴 땐 나를 봐 무를 봐, 라고 곁에 선 왕벚이 거든다 나무에 새겨진 칼날의 허 공에는 마침내의 도가 있다 한쪽 귀가 깨진 서탑 풍경과 바람과 석등의 비밀이 부인에 있다 대웅전 지붕 끝 치미가 하늘을 오르다 말고 산신각 앞에 내려와 앉는다 흠도 티도 없는 절집 아침 마당과 마음을 돌고 도는 나는 포도나무 잎 진 자리 떨켜를 생각한다 저잣거리로 내려가는 길 눈의 흰 그림자 -------------------------------------- * 히브리어(מכתם, Michtam). 조각에 새겨 놓은 금언이나 지혜의 말씀. ―『왜왜』서정시학, 2023. 8. ■ 2023. 9. 25. .. 내가 읽은 시 2023.10.04
적막이 오는 순서 - 조승래 적막이 오는 순서 조승래(1959~ ) 여름 내내 방충망에 붙어 울던 매미. 어느 날 도막난 소리를 끝으로 조용해졌다 잘 가거라, 불편했던 동거여 본래 공존이란 없었던 것 매미 그렇게 떠나시고 누가 걸어 놓은 것일까 적멸에 든 서쪽 하늘, 말랑한 구름 한 덩이 떠 있다 내가 읽은 시 2023.09.22
가을 드들강 - 김태정 가을 드들강 김태정(1963~2011) 울어매 생전의 소원처럼 새가 되었을까 새라도 끼끗한 물가에 사는 물새가 물새가 울음을 떨어뜨리며 날아가자 바람 불고 강물에 잔주름 진다 슬픔은 한 빛으로 날아오르는 거 그래, 가끔은 강물도 흔들리는 어깨를 보일 때가 있지 오늘같이 춥고 떨리는 저녁이면 딸꾹질을 하듯 꾹꾹 슬픔을 씹어 삼키는, 울음은 속울음이어야 하지 울어매처럼 저 홀로 듣는 저의 울음소린 바흐의 무반주첼로곡만큼 낮고 고독한 거 아니아니 뒤란에서 저 홀로 익어가는 간장맨치로 된장맨치로 톱톱하니 은근하니 맛깔스러운 거 강 건너 들판에서 매포한 연기 건너온다 이맘때쯤 눈물은 뜨락에 널어놓은 태양초처럼 매움하니 알큰하니 빠알가니 한세상 슬픔의 속내, 도란도란 익어가는데 강은 얼마나 많은 울음소릴 감추고 있.. 내가 읽은 시 2023.09.21
그 집 앞 - 이윤설 그 집 앞 이윤설(1969~2020) 그의 무덤은 털모자처럼 따뜻해 보여요 그는 옆으로 누워 책을 뒤적이겠죠 남모르는 창이 있어 그리로 내다보기도 하겠죠 가을 오는 숲이 다람쥐처럼 뛰어다니는 걸 턱 괴고 바라보겠죠 냄비에 밥도 지어먹고 빨래도 하고 둥근 천장에 닿지 않도록 고개 숙이고 화장실도 다녀오고 담배도 피울 겁니다 하나도 변함이 없다고 편지도 쓸 겁니다 남모르는 창에도 어둠이 내리고 그는 창가에 앉아 생각하겠죠 이렇게 변함이 없는 걸 왜 항상 두려워했을까 털모자처럼 귀를 가리는 혼자만의 방을 갖는 것인 걸 왜 그렇게 두려워 울었을까 양치질을 하며 발을 닦고 잠자리에 누울 겁니다 잠자리에 누워 코도 골겠죠 그의 습관이니까요 꿈도 꿀까요 죽는 꿈을 꾸며 가위눌리기도 할까요 그건 물어봐야겠군요 그의 무.. 내가 읽은 시 2023.09.20
北 - 이가림 北 이가림 사철 석탄가루를 싣고 오는 열하(熱河) 승덕(承德)의 바람 속에 서서 엄마는 홍건적(紅巾賊)같이 무섭기만 한 호밀들의 허리를 쓰러넘기며 쓰러넘기며 부끄러운 달을 마중하였다 멀리 보일 듯 말 듯 움직이는 외길 따라 눈물 나는 행주치마로 가고 있었다 마른 말똥거름 따위 검불 따위 꺼멓게 널린 모닥불의 방천 둑을 지날 때마다 어찌나 키 큰 송전선주가 잉잉 울었던지 귀신처럼 무서웠다 지연(紙鳶)이 목매달고 있었다 어느 일요일이던가 애견(愛犬) 쫑이 죽고 빨간 새끼들만 남아 기어다니는 헛간 나도 한 마리 강아지 되어 바자니던 것을 오줌싸개의 나라에서는 자주 폭군이 되어 활 쏘는 이순신의 손자의 손자 한 웃음소리에도 어둠이 무너지고 한 돌팔매에도 참새 떼들은 떨어졌다 노을 속 참깨를 뿌린듯이 내가 읽은 시 2023.09.20
밤의 푸가 - 이혜영 밤의 푸가 이혜영 황혼 무렵 거대한 그 여자 밤나무 숲에 거꾸로 걸려 있네 기다리고 있네 깊고 서늘한 숨소리 맥박소리 온 숲을 울리네 높다란 밤나무 꼭대기에서 굵은 등걸 밑동으로 청 홍 황색 번득이는 비단뱀들 굽이치는 머리칼 속에 여자의 외눈이 숨어 있네 훔쳐보고 있네 천천히 견디고 있네 레바논 성전의 기둥처럼 단단하고 매끄러운 두 다리 사이로 보름달 둥싯 떠오를 때 귀에 익은 발소리 다가오네 길고 검은 손톱들 여자의 뱃가죽을 달게 찢고 있네 싱싱한 녹색과 자주색의 포도송이들 살진 잎사귀들 호랑무늬 나비들 푸른 벨벳빛 까마귀들이 자지러지는 여자의 몸에서 쏟아지네 하늘거리는 비단옷감들 붉은 고양이들이 뛰쳐나오네 황금 해골들 싯푸른 들개들 향기로운 몰약과 유향 무지개빛 성수가 솟구치네 여자가 깊어지네 .. 내가 읽은 시 2023.09.19
그대에게 - 박두규 그대에게 박두규 강가를 걸으며 산마루에 떠오르는 초저녁달을 봅니다. 이 어두워진 저녁 산모롱이 어디쯤에 아직도 빛을 다 여의지 못한 동자꽃이나 물봉선 같은 꽃들이 남아 있겠지요. 나는 아직 한 번도 빛에 이르지 못한 내 안의 깊은 어둠 속 꽃 한 송이를 떠올려 봅니다. 세상의 꿈이란 꿈 다 꾸어도 그 꽃 한 송이 이 강가에 살지 못하고, 오늘도 내 안의 어둠을 서성일 뿐입니다. 달빛 젖은 하늘에 별들이 촘촘해지면서 나는 아직도 이 어둠을 떠도는 다하지 못한 빛들의 쓸쓸함을 봅니다. 이제야 그게 사랑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숲에 들다』 애지, 2008. 내가 읽은 시 2023.0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