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1046

K의 부엌 - 천서봉

K의 부엌 천서봉 이제, 불행한 식탁에 대하여 쓰자 가슴에서 울던 오랜 동물에 대하여 말하자 가령 상어의 입속 같은 검은 식욕과 공복의 동굴 속에서 메아리치는 박쥐의 밤들 들개의 허기, 늪처럼 흡입하는 아귀의 비늘과 그 비늘이 돋는 얼굴에 대하여 말하자 하여 그 병의 딱딱한 틈에서 다시 푸른 순(筍)을 발음하는 잡식성의 세계사에 대하여 말을 가둔 열등한 감자와 그 기저의 방 속에서 끝내 다복할 주검에 대하여 말하자 기어이 모든 숨을 도려내고야 말, 아름다운 칼들 가득한 K의 부엌에서 딱딱하게 굳어 기괴한 신탁의 소리를 내고야 말 우리의 혀에 대하여 말하자 간이나 허파 따위를 담고 보글보글, 쉼 없이 끓어오르는 냄비 속 레퀴엠에 대하여 말하자, 우리가 요리하고픈 우리의 부위, 왼손이 끊어내고 싶던 그 왼손..

내가 읽은 시 2023.09.10

새로운 기쁨 - 유계영

새로운 기쁨 유계영 ​ ​ 그런 나라에는 가본 적 없습니다 영화에서는 본 적 있어요 나의 경험은 아침잠이 많고 새벽에 귀가합니다 잎사귀를 다 뜯어먹힌 채 돌아옵니다 안다고 말하고 싶어서 차바퀴꿈은 많이 꿉니다 황봉투에 담긴 얇고 가벼운 꿈인데 ​ 낮에는 구청 광장에 우두커니 서서 감나무를 올려다보았습니다 까치가 까치밥을 쪼는 것을 보고 밤에는 하염없이 영화를 보았습니다 트빌리시 바르샤바 베오그라드 그런 도시에는 가본 적이 없고 ​ 까치가 나뭇가지를 툭 차면서 날아가는 것은 낮에 본 것 미치지 않고서야 미치지 않고서야 그러는 것같이 팔이 떨어져라 흔들리는 잎사귀들이라면 밤에 본 것 ​ 나의 경험은 내내 잠들어 있습니다 다시는 일어날 마음이 없어 보입니다 죽어서도 보고 있다면 죽은 것이 아닌데 자꾸 보고 있..

내가 읽은 시 2023.08.25

한참이나 물끄러미 쳐다본다 - 조성국

한참이나 물끄러미 쳐다본다 조성국(1963~ ) 산불에 타면서 꿈적 않고 웅크린 까투리의 잿더미 요렁조렁 들추다 보니 꺼병이 서너 마리 거밋한 날갯죽지를 박차고 후다닥 내달린다 반 뼘도 안 되는 날개 겨드랑이 밑의 가슴과 등을 두르는 데서 살아남은 걸 보며 적어도 품이라면 이 정도쯤은 되어야지, 입안말하며 꽁지 빠지게 줄행랑치는 뒷덜미를 한참이나 물끄러미 쳐다본다

내가 읽은 시 2023.08.22

기억을 버리는 법 - 김혜수

기억을 버리는 법 김혜수 버리자니 좀 그런 것들을 상자 속에 넣어 높은 곳에 올려놓는다 가끔 시선이 상자에 닿는다 쳐다보고만 있자니 좀 그런 것들을 더 큰 상자에 넣어 창고 속에 밀어버린다 창고 속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모서리가 삭아내리는 것들 자주 소멸을 꿈꾸며 닳아 내부조차 지워져버린 것들 가끔 생각이 창고에 닿는다 고요한 어둠 속에서 점차 생각조차 희박해지고 창고를 넣을 더 큰 상자가 없을 때 그때 상자 속의 것들은 버려진다 나도, 자주, 그렇게 잊혀갔으리라 ―『이상한 야유회』 (창비 2010)

내가 읽은 시 2023.08.19

와이퍼 - 차성환

와이퍼 차성환 희곡을 쓰는 사람을 길에서 만났다. 오래전에 그가 해준 찐득한 토마토파스타 냄새가 떠올랐다. 쌍둥이가 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는데 옆에 쌍둥이가 서 있다. 어딘가를 급히 가는 길이라고 했다. 모두다 어디론가 간다. 악수를 하면서 차시인 언제 보지요, 하지만 언제 볼 생각은 없어 보인다. 서로 안부를 묻고 둘은 서둘러 차에 탔다. 운전석과 조수석에 동시에 탔는데 누가 희곡을 쓰는 사람인지 헷갈렸다. 누가 형인지 동생인지 물어볼 수도 있었는데 결정적인 실수를 한 것 같다. 눈꼬리가 약간 올라간 쪽이 형일 거야. 그는 약간 못되게 생겨먹었으니까. 중얼거리며 한손으로 흔들다가 아쉬운 마음에 다른 손도 번쩍 들어 똑같은 속도로 안녕, 하고 흔들었다. ― 『딩아돌하』, 2023, 여름.

내가 읽은 시 2023.08.02

폭설 카페 - 전영관

폭설 카페 전영관 북방으로 떠나기 맞춤인 날이다 눈송이를 헤아리는 당신에게 탁자에 흥건한 커피 향을 준비하라고 눈짓한다 솔개처럼 날아갈 생각을 했다 활공이란 허공을 미끄러지는 새들의 기법 눈 내리는 날의 생각들은 위험해도 푹신하다 나의 북방은 안온할 것 발정에 겨운 수컷 순록들이 뿔 부딪는 소리에 하르르 자작나무 가지의 설화(雪花)가 쏟아지는 곳 우리의 북방은 분주할 것 어둠 속으로 살금거리는 들짐승들 사이 어미 여우가 꼬리로 가만가만 젖먹이들 칭얼거림을 덮어 재우는 곳 당신은 아내여서 북방의 끼니를 예감하는지 눈빛 자욱하다 눈구경 하느라 창가에 서 있다가 순록에게 배운 듯 우쭐거리며 자리로 돌아온다 토끼나 쫓다가 도끼마저 잃어버린 나무꾼처럼 자발없이 웃어본다

내가 읽은 시 2023.08.02

설중매(雪中梅) - 안상학

설중매(雪中梅) 안상학 ​ ​ 지금 여기서 내가 눈 속에서 꽃을 피우든지 꽃으로 피어서 눈을 맞든지 ​ 나는 꽃으로 향기로울 때 잎이 없음을 서러워하지 않았다 ​ 나는 잎으로 푸르를 때 꽃이 없음을 서러워하지 않았다 ​ 나는 금빛 열매를 달았을 때 향기가 없음을 서러워하지 않았다 ​ 나는 나목으로 동토에 섰을 때 그 모든 것이 없음을 서러워하지 않았다 ​ 나는 꽃이었고 향기였고 잎이었고 열매였고 나목이었고 또 나는 꽃이었다가 향기였다가 잎이었다가 열매였다가 나목이었다가 또 나는 꽃이었으니 ​ 나는 지금 내게 없는 기쁨을 노래한 적 없다 나는 지금 내게 없는 슬픔을 노래한 적 없다 ​ 나목이 나목을 잃고 꽃이 꽃을 잃고 열매가 열매를 잃고 잎이 잎을 잃고 향기가 향기를 잃을 때에도 ​ 꽃에 앞서 잎을 내세..

내가 읽은 시 2023.07.24

덩굴손 - 염창권

덩굴손 염창권(1960~ ) 어린 딸의 하루하루를 맡겨두는 이웃집 구석진 벽으로 가서 덩굴손을 묻고 울던 걸 못 본 척 돌아선 출근길 종일 가슴이 아프더니 담 벽을 타고 넘어온 포도 넝쿨 하나 잎을 들추니 까맣게 타들어 간 덩굴손 해종일 바지랑대를 찾는 안타까운 몸짓 저물어서야 너를 찾아 집으로 돌아가는구나 촉촉한 네 눈자위를 꼬옥 부여잡고 걸으면 "아침에 울어서 미안해요" 아빠를 위로하는구나.

내가 읽은 시 2023.0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