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1046

잘 가 - 박지웅

잘 가 박지웅 ​ ​ 여자의 혀는 정직하고 차가웠다 입에서 나오는 가장 낮은 온도 잘 가 마트에서 구입한 제품처럼 건넨 잘 가 나는 잘 가를 받아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앞뒤 잘린 토막의 말 잘 가는 피가 빠지는 데 몇 달이 걸렸다 몇 달째 꿈쩍하지 않는 잘 가 가끔 이름을 불러보았으나 잘 가는 선뜻 나오지 않았다 고깃덩어리로 썩어가는 잘 가를 꺼내어 몇 번 삼키려 했으나 오래된 관처럼 입이 열리지 않았다 냉장고는 온통 사후의 세계 나는 냉장고에 심장을 넣고 기다린다 내 혀는 아직 핏물이 덜 빠졌다 ​ ―시집 『나비가면』 2021

내가 읽은 시 2023.05.30

죄와 벌 - 조오현

죄와 벌 조오현(1932∼2018) 우리 절 밭두렁 벼락 맞은 대추나무 무슨 죄가 많았을까 벼락 맞을 놈은 난데 오늘도 이런 생각에 하루해를 보냅니다 ------------------- ■ 조오현(曺五鉉 1932년~2018년) 승려, 시조 시인. 경남 밀양 출생. 1958년 입산. 1968년 《시조문학(時調文學)》에 〈봄〉 · 〈관음기(觀音記)〉로 추천되어 나왔다. 주요작품에 〈설산(雪山)에 와서〉,〈할미꽃〉, 〈석엽십우도(石葉十牛圖)〉, 〈석굴암대불(石窟庵大佛)〉, 〈비슬산(琵瑟山) 가는길〉 등이 있다. 오현 스님은 2018년 5월 26일, 신흥사에 입적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조오현 [曺五鉉] (국어국문학자료사전, 1998., 이응백, 김원경, 김선풍)

내가 읽은 시 2023.05.28

왜왜 - 김상환

왜왜 김상환 德萬 아버지는 말씀하셨지요 만 벼랑에 핀 홍매가 말없이 지고 나면 무릎을 펼 수 없어 나이테처럼 방 안을 맴돌고 물음은 물가 능수버들 아래 외로 선 왜가리가 왜왜 보이지 않는지 먼 산 능선이 꿈처럼 다가설 때 두엄과 꽃이 왜 발 아래 함께 놓여 있는지 達蓮 어머니에 대한 나의 궁금은 앵두 하나 없는 밤의 우물가에 몰래 흘린 눈물 이후 단 한 번의 말도 없는 굽은 손 다시는 펼 수 없는 축생의 손가락 산수유나무 그늘 아래 먹이를 찾는 길고양이처럼 길 잃은 나는 왜 먼동이 트는 아침마다 십이지신상을 돌고 돌며 천부경을 음송하는지 좀어리연이 왜 낮은 땅 오래된 못에서 피어나는지 어느 여름 말산의 그 길이 왜 황토빛이고 음지마인지 해맞이공원을 빠져나오다 문득, 사리함이 아름답다는 생각 ―제4회(20..

내가 읽은 시 2023.05.27

업어주는 사람 - 이덕규

업어주는 사람 이덕규(1961~ ) 오래전에 냇물을 업어 건네주는 직업이 있었다고 한다 물가를 서성이다 냇물 앞에서 난감해하는 이에게 넓은 등을 내주는 그런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선뜻 업히지 않기에 동전 한 닢을 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업히는 사람의 입이 함박만해졌다고 한다 찰방찰방 사내의 벗은 발도 즐겁게 물속의 흐린 길을 더듬었다고 한다 등짝은 구들장 같고 종아리는 교각 같았다고 한다 짐을 건네주고 고구마 몇 알 옥수수 몇 개를 받아든 적도 있다고 한다 병든 사람을 집에까지 업어다 주고 그날 받은 삯을 모두 내려놓고 온 적도 있다고 한다 세상 끝까지 업어다주고 싶은 사람도 한 번은 만났다고 한다 일생 남의 몸을 자신의 몸으로 버티고 살아서 일생 남의 몸으로 자신의 몸을 버티고 살아서 그가 죽었을 때, ..

내가 읽은 시 2023.05.16

서시 - 이성복

서시 이성복(1952~ ) 간이식당에서 저녁을 사 먹었습니다 늦고 헐한 저녁이 옵니다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는 미끄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당신이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사방에서 새 소리 번쩍이며 흘러내리고 어두워 가며 몸 뒤트는 풀밭,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 키 큰 미루나무 사이로 잎잎이 춤춥니다

내가 읽은 시 2023.05.02

귀한 마주침, 텅 빈 충만 - 엄원태

귀한 마주침, 텅 빈 충만 엄원태 목요일 늦은 오후, 텅 빈 강의실 복도에서 쓰레기통을 비우고 있는 청소 아주머니와 마주친다. 눈이 마주치자 몸피가 조그만 아주머니는 내게 다소곳이 허리 굽혀 인사를 한다. 내가 마치 ‘높은 사람’이라도 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공손한 인사. 무슨 종류일지 짐작 가는 바 없지 않지만, 아마도 어떤 ‘결핍’이 저 아주머니의 마음에 가득하여서, 마음자리를 저리 낮고 겸손하게 만든 것이겠다. 저 나지막한 마음의 그루터기로 떠받치고 품어 안지 못할 것이 세상에 있기나 한 것일까? 아주머니, 쓰레기들을 일일이 뒤적여 종이며 캔과 병 같은 것들을 골라내어 따로 챙긴다. 함부로 버려진 것들에서 ‘소중한 어떤 것’을 챙기는 사람 여기 있다. 아주머니는 온몸으로, 시인이다.

내가 읽은 시 2023.0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