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1046

섬광 - 황지우

섬광 황지우 내 중세 정원을 채찍으로 내리치는 번개; 하늘과 땅을 鎔接하는 보라 섬광에 낙원이 잠깐 윤곽만 나타났다 없어진다 그건 한낱 광휘에 불과하리라 몽매에 혹해 있는 이 어리석은 자는 그러므로 평생 깨닫지 않으리라 얼마 후 당도한 천둥 소리, 조바심이었을까? 하늘 마룻장에서 누군가 발 구르는 소리; 섬광을 본 꽃과 가지들 다 재가 된 숯덩이 정원에 쏟아붓는 暴雨; 이래도 낙원이더냐?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문학과지성사.

내가 읽은 시 2015.11.17

소나무에 대한 예배 - 황지우

소나무에 대한 예배 황지우 학교 뒷산 산책하다, 반성하는 자세로 눈발 뒤집어쓴 소나무, 그 아래에서 오늘 나는 한 사람을 용서하고 내려왔다. 내가 내 품격을 위해서 너를 포기하는 것이 아닌, 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것이 나를 이렇게 휘어지게 할지라도. 제 자세를 흐트리지 않고 이 地表 위에서 가장 기품 있는 建木; 소나무, 머리의 눈을 털며 잠시 진저리친다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문학과지성사.

내가 읽은 시 2015.11.17

너와집 한 채 - 김명인

너와집 한 채 김명인 길이 있다면, 어디 두천 쯤에나 가서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의 버려진 너와집이나 얻어 들겠네, 거기서 한 마장 다시 화전에 그슬린 말재를 넘어 눈 아래 골짜기에 들었다가 길을 잃겠네 저 비탈바다 온통 단풍 불붙을 때 너와집 썩은 나무껍질에도 배어든 연기가 매워서 집이 없는 사람 거기서도 눈물 잣겠네 쪽문을 열면 더욱 쓸쓸해진 개옻 그늘과 문득 죽음과, 들풀처럼 버팅길 남은 가을과 길이 있다면, 시간 비껴 길 찾아가는 사람들 아무도 기억 못하는 두천 그런 산길에 접어들어 함께 불붙는 몸으로 저 골짜기 가득 구름 연기 첩첩 채워 넣고서 사무친 세간의 슬픔, 저버리지 못한 세월마저 허물어버린 뒤 주저앉을 듯 겨우겨우 서 있는 저기 너와집, 토방 밖에는 황토흙빛 강아지 한 마리 키우겠네 부뚜..

내가 읽은 시 2015.11.16

북어 - 최승호

북어 최승호 밤의 식료품 가게 케케묵은 먼지 속에 죽어서 하루 더 손때 묻고 터무니없이 하루 더 기다리는 북어들, 북어들의 일개 분대가 나란히 꼬챙이에 꿰어져 있었다. 나는 죽음이 꿰뚫은 대가리를 말한 셈이다. 한 쾌의 혀가 자갈처럼 죄다 딱딱했다. 나는 말의 변비증을 앓는 사람들과 무덤 속의 벙어리를 말한 셈이다. 말라붙고 짜부라진 눈, 북어들의 빳빳한 지느러미. 막대기 같은 생각 빛나지 않는 막대기 같은 사람들이 가슴에 싱싱한 지느러미를 달고 헤엄쳐 갈 데 없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느닷없이 북어들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거봐,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귀가 먹먹하도록 부르짖고 있었다. ―『대설주의보』민음사 --------------------------------- 최승호..

내가 읽은 시 2015.11.16

소쩍새 울다 - 이면우

소쩍새 울다 이면우 저 새는 어제의 인연을 못 잊어 우는 거다 아니다, 새들은 새 만남을 위해 운다 우리 이렇게 살다가, 누구 하나 먼저 가면 잊자고 서둘러 잊고 새로 시작해야 한다고, 아니다 아니다 중년 내외 두런두런 속말 주고 받던 호숫가 외딴 오두막 조팝나무 흰 등 넌지시 조선문 창호지 밝히던 밤 잊는다 소쩍 못 잊는다 소소쩍 문풍지 떨던 밤.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창비, 2001.

내가 읽은 시 2015.1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