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1931

돌멩이들 - 장석남

돌멩이들 장석남(1965~ ) 바닷소리 새까만 돌멩이 너덧 알을 주워다 책상 위에 풀어놓고 읽던 책갈피에도 끼워두고 세간 기울어진 자리도 괴곤 했다 잠 아니 오는 밤에는 나머지 것들 물끄러미 치어다도 보다가 맨 처음 이 돌멩이들 있던 자리까지를 궁금해하노라면, 구름 지나는 그림자에 귀 먹먹해지는 어느 겨울날 오후 혼자 매인 늦둥이 송아지 눈매에 얹힌 낮달처럼 저나 나나 살아간다는 것이, 이렇듯 외따로 있다는 것이,

내가 읽은 시 2024.04.11

낮 동안의 일 - 남길순

낮 동안의 일 남길순(1962~ ) 오이 농사를 짓는 동호씨가 날마다 문학관을 찾아온다 어떤 날은 한 아름 백오이를 따 와서 상큼한 오이 냄새를 책 사이에 풀어놓고 간다 문학관은 날마다 그 품새 그 자리 한 글자도 자라지 않는다 햇볕이 나고 따뜻해지면 오이 자라는 속도가 두 배 세 배 빨라지고 화색이 도는 동호 씨는 더 많은 오이를 딴다 문학관은 빈손이라 해가 바뀌어도 더 줄 것이 없고 문학을 쓸고 문학을 닦고 저만치 동호 씨가 자전거를 타고 오고 있다 갈대들 길 양쪽으로 비켜나는데 오늘은 검은 소나기를 몰고 온다 문학관을 찾은 사람들이 멍하니 서서 쏟아지는 비를 보고 있다 지붕 아래 있어도 우리는 젖는다

내가 읽은 시 2024.03.26

불시착 - 변혜지

불시착 변혜지 우리가 인중에 흰 얼룩을 묻히고 다니던 아이였을 때 마을로 들어서는 길목은 우리 것이었다. 줄에 묶은 통나무를 질질 끌고 다니는 것처럼, 우리는 주어진 모든 시간을 그 길목에 묶어두었다. 백까지 세야 돼. 오래된 장승을 중심으로 아이들이 달려나가면, 술래는 시위에 메겨진 화살 같았다. 어떤 날에는 다른 곳으로 튕겨 나가기도 했다. 과실수들이 붉은 열매를 아낌없이 내어주고, 초원의 풀들이 마련해준 잠자리에 누우면 밤하늘에는 반짝이는 별들이 가득했다. 다 함께 장승 놀이를 하자. 부리부리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면서, 우리를 지키자. 잠시도 서로를 떠나지 말자. 코를 훌쩍거리며 나는 모두에게 엄숙하게 제안했고 그곳에서 술래를 놓고 떠난 아이가 돌아올 때까지 오래오래 행복하게 지내기도 했다. 그래..

내가 읽은 시 2024.03.18

물통

물통 우대식 전생에 나는 낙타 등에 매달린 누란의 물장수 아라베스크의 자세로 화석이 된 누란의 물장수 모래로 된 얼굴로 장사를 나가 기울어진 돌집으로 들어가는 당신의 해진 옷깃에 물을 붓는다 초승달이 뜰 때 물통의 남은 물을 신께 바치고 물값을 내라고 멱살을 잡고 울고불고 낙타를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호수처럼 먼 데 이르면 누구의 발자국도 없다 전생에 나는 낙타도 잃고 물통도 버린 누란의 물장수 —계간 《가히》 2024년 봄호

우대식 2024.03.11

팔공산 종주(4) - 가산바위에서 파계재까지

어제는 내가 1년에 한두 번씩 3년에 걸쳐 구간별로 실행해 오던 팔공산 주능선 종주를 마무리하였다. 지지난해 1월의 파계재―동봉, 그해 가을의 동봉―관봉(갓바위), 올해 1월의 능성재(환성산)―초례봉 종주에 이어 남은 구간인 가산바위―파계재를 종주한 것이다. '가팔환초'라고 불리는 팔공산 주능선 종주 코스에서 첫 순서가 되곤 하는 가산이 어쩌다 보니 내겐 맨 나중 순서가 되어 '팔환초가'가 되었다. 내가 한 달 남짓만에 다시 팔공산 종주에 나선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며칠 전에 시내엔 비가 내렸지만, 높은 산엔 그 비가 눈으로 내렸었다. 그래서 팔공산 주능선이 하얗게 눈을 뒤집어쓰고 있는 모습이 멀리서 바라보였던 데다 봄이 온 것같이 푸근하던 기온이 갑자기 떨어져서 상고대가 많이 피어 절경일 것이라고..

텃밭 일기 2024.02.25

라원이의 첫돌

어제는 우리 집안의 천사 라원이의 첫돌이었다. 가족들만 참석한 조촐한 돌잔치는 하루를 앞당긴 그저께 저녁에 서울의 아차산 자락에 있는 워커힐 호텔 별관인 '명월관'에서 열렸다. 참석자는 라원이, 그의 엄마와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인 나,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큰아빠, 이모와 이모부, 이렇게 열 분이었다. 그저께 아침에 할머니와 나는 동대구역에서 KTX 열차를 타고, 울산에서 같은 열차를 타고 오는 큰아빠인 김교수를 만나 함께 서울역에 내렸다. 안식년을 맞아 서울에 작은 오피스텔을 마련했다는 김교수와 함께 지하철을 타고 광진구 자양동으로 가서 점심을 먹고, 그 오피스텔을 구경하며 잠시 쉰 후에, 택시를 타고 명월관으로 갔다. 한옥 건물인 명월관에서 라원이는 부모와 함께 미리 나와 사진을 찍고 있었다...

텃밭 일기 2024.02.22

슬픈 환생 - 이운진

슬픈 환생 이운진 몽골에서는 기르던 개가 죽으면 꼬리를 자르고 묻어준단다 다음 생에서는 사람으로 태어나라고, 사람으로 태어난 나는 궁금하다 내 꼬리를 잘라 준 주인은 어떤 기도와 함께 나를 묻었을까 가만히 꼬리뼈를 만져본다 나는 꼬리를 잃고 사람의 무엇을 얻었나 거짓말 할 때의 표정 같은 거 개보다 훨씬 길게 슬픔과 싸워야 할 시간 같은 거 개였을 때 나는 이것을 원했을까 사람이 된 나는 궁금하다 지평선 아래로 지는 붉은 태양과 그 자리에 떠오르는 은하수 양떼를 몰고 초원을 달리던 바람의 속도를 잊고 또 고비사막의 외로운 밤을 잊고 그 밤보다 더 외로운 인생을 정말 바랐을까 꼬리가 있던 흔적을 더듬으며 모래 언덕에 뒹굴고 있을 나의 꼬리를 생각한다 꼬리를 자른 주인의 슬픈 축복으로 나는 적어도 허무를 얻..

내가 읽은 시 2024.02.22

눈물로 간을 한 마음 - 오탁번

눈물로 간을 한 마음 오탁번 시집 『비백』을 내면서 맨 앞에 ‘시인의 말’을 쓰는데 ‘눈물로 간을 한 미음’이라고 치면 자꾸 ‘미음’이 ‘마음’이 된다 동냥젖으로 눈물로 간을 한 미음으로 어머니가 나를 살리셨다는 사연인데 다시 쳐도 또 ‘마음’이 된다 ‘눈물로 간을 한 마음’? 그렇다마다! 그 미음이 바로 어머니의 마음이라는 걸 노트북은 어찌 알았을까 글자판에 바짝 붙어있는 ㅏ와 ㅣ가 나를 비아냥하는 것도 다 그윽한 뜻 아닐까 몰라 곰곰 생각에 겨워 눈을 감으면 은하수 건너 캄캄한 하늘 희끗희끗 흩날리는 어머니의 백발 —『2022 대한민국예술원 문학분과 연간작품집』2022.

내가 읽은 시 2024.0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