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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수의 「풀잎 하나」 감상 - 문태준

풀잎 하나 이태수(1947~ ) 깊은 산골짜기 밀림에 깃들면 찰나와 영원이 하나같다 지나간 시간도 다가오는 시간도 함께 어우러져 있는 것만 같다 울창한 나무 그늘에서 흔들리는 나는 조그만 풀잎 하나 꿈꾸다 꿈속에 든 풀잎 하나 ---------------------------------- 심곡심산(深谷深山)의 산림(山林)을 더러 만나게 되지만 대개는 능선과 높은 산봉우리와 깊은 계곡을 눈으로 살피게 된다. 그런데 시인은 큰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산에 들어가서 작은 풀잎에 눈이 간다. 나무가 드리운 그늘 속에서 가만가만히 흔들리는 풀잎에 관심을 둔다. 산림은 하나의 생명 세계로서 순간과 영원,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한데 조화돼 한 덩어리를 이루면서 섞여 있는 곳인데, 시인은 거기서 하나의 개체로서의 풀..

해설시 2024.08.13

최정례의 「참깨순」 감상 - 박소란

참깨순          ―병실에서   최정례     오년 생존율 오십오 프로란 무슨 뜻인가요?   별거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간호간병 시스템4인실의 조무사들은   내 모든 오줌의 무게를 잰다   오줌 누면 달려가서 재고 기록하고   어린애처럼 나는 오줌 마렵다고 고해야 한다    옆 침대 아주머니는 수박 오천통을 밭떼기로   실어 보내고 왔단다   아이구 나 좀 살려줘요   검사 받다 죽을 거 같애   밤새도록 앓다가   아침에 남편에게 전화해서   참깨순 나왔어? 묻는다    항암제, 면역억제제 매달린   창 너머로 하늘이 펼쳐져 있다   그곳을 가로질러 작은 것들이 날아다닌다   파리인가 눈 감았다 뜨니 잠자리다   잠자리일까 새일까    관련 마커가 죄다 음성이네요   이런 경우 진단이 ..

해설시 2024.08.13

뼈아픈 후회 - 황지우

뼈아픈 후회   황지우(1952~ )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려 놓고 가는 것; 그 징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 건지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이동하는 사막 신전;   바람의 기둥이 세운 내실에까지 모래가 몰려와 있고   뿌리째 굴러가고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린다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끝내 자아를 버리지 못하는 그 고열의   神像이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

내가 읽은 시 2024.08.13

강변에서 - 송창식

강변에서   김민기 작사 작곡, 송창식 노래   서산에 붉은 해 걸리고 강변에 앉아서 쉬노라면   낯익은 얼굴이 하나둘 집으로 돌아온다   늘어진 어깨마다 퀭한 두눈마다   빨간 노을이 물들면 왠지 맘이 설레인다     강 건너 공장의 굴뚝엔 시커먼 연기가 펴오르고   순이네 뎅그란 굴뚝엔 파란 실오라기 펴오른다   바람은 어두워 가고 별들은 춤추는데   건너 공장에 나간 순이는 왜 안 돌아오는 걸까   높다란 철교 위로 호사한 기차가 지나가면   강물은 일고 일어나 작은 나룻배 흔들린다   아이야 불 밝혀라 뱃전에 불 밝혀라   저 강 건너 오솔길 따라 우리 순이가 돌아온다   라라라 라라라 노 저어라 열여섯 살 순이가 돌아온다   라라라 라라라 노 저어라 우리 순이가 돌아온다   아이야 불 밝혀라 뱃..

트럼펫 악보 2024.08.11

신라의 달밤 - 현인

신라의 달밤   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현인 노래   아아 신라의 밤이여   불국사의 종소리 들리어 온다   지나가는 나그네야 걸음을 멈추어라   고요한 달빛어린 금오산* 기슭 위에서   노래를 불러보자 신라의 밤 노래를   아아 신라의 밤이여   아름다운 궁녀들 그리웁구나   대궐 뒤에 숲속에서 사랑을 맺었던가   님들의 치맛소리 귓속에 들으면서   노래를 불러보자 신라의 밤 노래를     * 악보엔 '금오산'을  '금옥산'으로 잘못 표기하고 있다.

트럼펫 악보 2024.08.01

둥둥 걷어붙이고 - 송진권

둥둥 걷어붙이고   송진권 (1970~ )     둥둥 걷어붙이고   아부지 논 가운데로 비료를 뿌리며 들어가시네   물 댄 논에 어룽거리는   찔레꽃 무더기 속으로   아부지 솨아 솨르르 비료를 흩으며 들어가시네   소금쟁이 앞서가며 둥그러미를 그리는   고드래미논 가운데로 아부지   찔레꽃잎 뜬 논 가운데   한가마니 쏟아진 별   거기서 자꾸 충그리고 해찰하지 말고   땅개비 개구리 고만 잡고   어여 둥둥 걷어붙이고   들어오라고 아부지 부르시네

내가 읽은 시 2024.07.24

달은 아직 그 달이다 - 이상국

달은 아직 그 달이다 이상국 나 어렸을 적 보름이나 되어 시뻘건 달이 앞산 등성이 어디쯤에 둥실 떠올라 허공 중천에 걸리면 어머니는 야아 야 달이 째지게 걸렸구나 하시고는 했는데, 달이 너무 무거워 하늘의 어딘가가 찢어질 것 같다는 것인지 혹은 당신의 가슴이 미어터지도록 그립게 걸렸다는 말인지 나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어쨌든 나는 이 말을 시로 만들기 위하여 거의 사십여 년이나 애를 썼는데 여기까지밖에 못 왔다. 달은 아직 그 달이다. ―『달은 아직 그 달이다』 2016

내가 읽은 시 2024.07.21

서로 등 돌리고 앉아서 누군가는 빵을 굽고 누군가는 빵을 먹고 - 김륭

서로 등 돌리고 앉아서 누군가는 빵을 굽고 누군가는 빵을 먹고 김륭(1961~ ) 늙었다, 는 문장 위에 앉아 빵을 굽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냄새가 난다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이야기여서 누군가는 춥고 누군가는 뜨거울 거야 뒷모습을 취소하고 싶은 사람들이 줄을 선다 그게 누구든 거울을 보면서 할 이야기는 아니어서 우주의 한 구석으로 개미떼처럼 몰린 우리 모두의 기억이 구워낸 빵이다 빵을 뜯어먹을 때마다 그림자처럼 붙어있던 기억이 우걱우걱 씹힌다 그게 누구든 그럴 줄 알았다 우리는 매번 빵에게 당한다 이미 지켜보고 있었던 이야기다 노후는 미래에서 오는 게 아니라 과거에서 온다

내가 읽은 시 2024.07.18

자정 - 이경림

자정   이경림     가죽 혁대처럼 질기고 긴 길의 끝에서 나는 보았네 가은*이라는 유리문을. 나는 보았네 그 속에서 수 세기가 내 몸을 돌아 나오는 것을. 지나간 들판 지나간 산 지나간 마을회관 지나간 밤의 광장이 보여주던 무성영화들. 나는 보았네 똥장군을 지고 가는 장수아버지, 취해 비틀거리며 골목을 돌아가던 아랫마을 김 영감, 어머니는 부엌에서 국수를 삶고 있었네, 할머니는 방안에서 어항 속 금붕어처럼 입을 벙긋거리며 이야기하고 있었네, 이마에 칸델라 불을 단 광부들이 막장으로 가는 비탈에 한 줄로 놓여 있었네 한 떼의 개미들처럼 나는 보았네 검고 둥그렇게 서 있는 옥녀봉, 비탈에 자지러지게 피어있는 도라지꽃, 구호물자를 받으려 줄을 선 사람들, 악동 형태는 전봇대를 타고 고압선 쪽으로 오르고 있..

내가 읽은 시 2024.07.15

역광의 세계 - 안희연

역광의 세계   안희연(1986~ )     버려진 페이지들을 주워 책을 만들었다    거기   한 사람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한 페이지도 포기할 수 없어서    밤마다 책장을 펼쳐 버려진 행성으로 갔다   나에게 두개의 시간이 생긴 것이다    처음엔 몰래 훔쳐보기만 할 생각이었다   한 페이지에 죽음 하나*   너는 정말 슬픈 사람이구나   언덕을 함께 오르는 마음으로    그러다 불탄 나무 아래서 깜빡 낮잠을 자고   물웅덩이에 갇힌 사람과 대화도 나누고   시름시름 눈물을 떨구는 가을   새들의 울음소리를 이해하게 되고    급기야 눈사태를 만나   책 속에 갇히고 말았다    한 그림자가 다가와   돌아가는 길을 일러주겠다고 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빛이 너무 가까이..

내가 읽은 시 2024.07.10